세계 교회는 지금 – 파푸아뉴기니 멘디 교구의 미래를 바라보며

서용범

파푸아뉴기니 멘디 교구의 미래를 바라보며

남태평양에 위치한 섬나라 파푸아뉴기니(Papua New Guinea)는 1975년 호주로부터 독립한 신생국이다. 그러나 5만 년 전에 사람이 처음으로 이곳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유럽인 선원이 최초로 이 섬을 방문한 것은 16세기였으나, 19세기 초까지도 세상에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1,000여 개의 독자적인 부족과 850여 종의 지역 언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다양한 문화 형태를 이루고 있어서 오늘날 인류학적으로 매우 큰 관심을 받고 있는 곳이 되었다. 전형적인 몬순 기후로 습하고 일 년 내내 비가 많이 내린다.

파푸아뉴기니는 법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원래 전통적인 종교는 애니미즘 및 조상숭배였다. 그러나 현재 통계에 의하면 기독교 인구가 무려 약 96%이니 실제로는 기독교 국가라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듯싶다. 주류 기독교 종파로 가톨릭교회가 약 30%, 루터교회가 약 16%, 연합교회가 약 8%, 성공회가 3%를 이루고 있으며, 100여 개의 군소 개신교 종파가 나머지를 차지하고 있는데, 해가 갈수록 4개 주류 기독교 종파가 차지하는 비율이 줄어들고 있다. 주류 교회의 전례가 낡고 권위적이며 성적인 면에서 지나치게 엄격하고 청년들이 흥미를 부여할 수 있는 동기 제공의 부족 등을 그 이유로 든다. 4개 주류 기독교 종파 교회의 신자석이 점차 비어가고 있다.

파푸아뉴기니 가톨릭교회는 4개의 대교구를 포함하여 19개 교구가 있는데, 멘디(Mendi)교구는 남부 고산지역에 있다. 필자가 본당 신부로 선교사목을 하고 있는 레이크 쿠투부(Lake Kutubu) 성당은 멘디교구에서 가장 낮은 곳인 해발 950m에 있지만 대부분 다른 성당들은 해발 1,500m에서 2,000m 정도에 위치한다. 그래서 파푸아뉴기니의 다른 지역보다도 많이 늦게 외부인의 발길이 닿았다. 이곳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은 1939년 호주 정부에서 파견한 지역 순찰관들(Patrol Officers)이었다. 그 당시 현지인들은 발가벗고 돌도끼와 돌화살로 수렵을 하고, 나무로 만든 삽으로 주식인 고구마를 경작하는 신석기시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고 한다. 실질적인 탐사는 2차 세계대전으로 잠시 중지되었다가, 1950년 초에 재개되었다.

처음으로 멘디 지역에 들어온 가톨릭 선교사들은 1954년 프랑스의 성심선교회(French Missionaries of the Sacred Heart)였지만, 이듬해인 1955년 6명의 미국 카푸친 작은형제회(Order of Friars Minor Capuchin, OFM. Cap.) 소속 선교사들이 이 지역을 이어받았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대부분 길이 없었고, 호주 식민통치 정부가 방대한 산악지역을 정부 부설기관 설치 및 안전을 위한 새로운 토지영역으로 선교사들의 활동을 제한하는 시기였다. 1965년이 되어서야 이 제한이 풀려 선교사들은 뜨거운 선교열정을 가지고 많은 개신교회들과 경쟁하면서 교회를 세워나갔다. 1966년 11월15일 멘디교구가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초창기에는 주로 미국 카푸친 작은 형체회만이 활동을 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인도의 카푸친 작은형제회, Missionary Society of the Heralds of Good News(HGN)와 Congregation of St. Teresa(CST) 소속의 선교사제들, 폴란드의 Missionaries of the Holy Family(MSF)와 피데이 도눔(Fidei Donum)으로 6개 교구에서 온 사제들, 그리고 필자가 소속된 한국외방선교회 (Korean Missionary Society, KMS.) 사제들이 들어와 사목하는데 이르렀다. 하지만 외국 선교사들이 미국 카푸친 작은형제회 출신인 주교와 1명의 수사를 포함하여 24명인데 비하여, 현지인은 카푸친 작은형제회 소속의 사제가 3명, 수사가 8명, 타 교구에서 파견 온 사제 1명을 포함한 방인 사제가 10명, 부제 2명, 신학생 13명으로 아직도 방인에 의한 교회 자립은 요원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밖에 더 심각한 문제로는 신자가 현격하게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2006년 통계를 보면 12%였고, 2011년에는 13%로, 그렇잖아도 멘디교구 가톨릭 신자 비율은 타 교구에 비해 높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교구 자체 조사에 의하면 이 비율마저도 8.7%로 격감하였다. 위기에 직면하였다. 신석기시대에서 살던 사람들에게 현대 자본주의 물결이 몰아치고 여지없이 물질만능주의가 거칠지만 순박했던 사람들 틈새로 파고들었다. 다국적 정유회사들이 파푸아뉴기니 정부와 2009년부터 2040년까지 액화천연가스 발굴 계약을 맺었다. 대부분 가스가 멘디 지역에 매장되어 있는데 미화 150억 달러가량의 규모라고 한다. 이 프로젝트로 기인한 고용과 임금 갈등, 땅 보상에 따른 부족 간의 전쟁, 성매매와 에이즈 확산 등 사회적인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으나 정부는 이에 대해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세속의 교회에 어찌 이 여파가 미치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신보다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재물을 쫓고, 지루한 미사 참례보다는 숨어서 대마초나 피우며 카드게임을 하는 것이 더 짜릿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이제 이들도 비록 맨발로 밭일을 하러나갈 때도 한 손에는 휴대전화를 들고 간다. 신석기시대와 신자유주의의 공존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교구 재정이 붕괴 직전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멘디교구는 본당 사목 이외에, 특수 사목이라고 할 수 있는 각종 교육 및 의료사업에도 헌신하고 있다. 부패하고 능력 없는 정부에서 미처 손이 미치지 못한 부분을 교회가 메우고 있는 셈이다. 멘디교구의 재정 상태는 지극히 걱정되는 상황이다. 2012년 2월 취임된 멘디교구장 도날드(Donald Francis Lippert, OFM Cap.) 주교는 1년에 걸쳐 교구 재정에 대한 전면적이고 치밀한 조사와 검토를 하였다. 그해 멘디교구 재정 수입의 87%는 외국에서의 기부금이었고, 국내 기부금은 2%로 미미하였으며, 예금 이자는 5%, 그 밖의 수입이 6%였다. 재정 수입의 지나친 외국 기부금에 대한 의존은 교구의 미래가 매우 불안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멘디교구는 이런 재정 확보의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실질적인 대처 방안으로, 2013년부터 2017년에 이르는 ‘교구 재정 자립 5개년 계획(Diocesan Self-Reliance 5-year Time-Line)’을 내놓았다. 그동안 교회가 이른바 ‘퍼주기’ 식의 선교 방침을 점차적으로 줄이겠다는 것인데, 시행 2년차인 현재 지금껏 교회에서 대부분을 무상으로 받아 왔던 고질적인 습성 때문인지 신자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

멘디교구는 아직 어린 교회이다. 정부의 부정부패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이른바 돈맛을 본 개개인의 타락도 급속도로 심화되고 있다. 교구 재정은 불안하고 신자들은 교회에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이러한 힘겨운 도전 앞에서도 멘디교구는 결곡하게 걸어 나갈 것이다. 부디 고군분투하는 파푸아뉴기니 멘디교구를 위해 함께 기도하기를 청한다.

서용범 한국외방선교회 소속. 멘디교구 레이크 쿠투부 성당 초대 신부로 2010년부터 사목하고 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10월호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