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믿고, 믿고 알고 – 왜 다시 해방신학인가?

왜 다시 해방신학인가?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실

지난 10월 18일, 우리신학연구소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가 공동으로 지금우리 특강 “왜 다시 해방신학인가?”를 진행하였습니다. 기조강연을 한 성정모 교수(브라질 상파울로 감리교대학교)의 강연 내용을 정리하여 소개합니다.

많은 이들이 해방신학은 이미 끝났다고, 또는 이제는 더 이상 큰 의미를 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과 글은 해방신학이 끝났다는 이들의 생각과 전혀 다른 현실을 보여 주고 있다. 예를 들어 프란치스코 교황의 은 아주 중요한 해방신학의 관점을 가톨릭 신학에 도입하고 있다.

복음의 기쁨과 해방신학

『복음의 기쁨』은 세상을 복음화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는 세계를 ‘무신론이 판치는 세상’이라고 간주해 왔다. 따라서 가톨릭 근대 신학에서는 신의 존재와 현상을 어떻게 설명하느냐가 큰 과제였고 이를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세상을 무신론의 세상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세상’이라고 다르게 보았다.

교황은 오늘날 가장 중요한 문제를 ‘사회적 불평등과 소외’라고 보고 있다. 자본주의 안에서도 극심한 사회 불평등의 문제를 우리 시대의 큰 문제 중의 하나라고 지적하고 있지만, 그들이 걱정하고 우려하는 것은 가난한 이들의 생명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이 망가질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교황은 바로 이런 문제가 복음화에 도전적 과제라고 말하고 있다.

『복음의 기쁨』은 현 경제체제에 대한 비판 후에 이에 대하여 윤리적이며 문화적인 관점을 제시하면서, 이러한 극심한 사회적 불평등이 ‘무관심의 문화’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교황은 ‘왜 이런 문제 현실에 대해 사람들이 문제제기 하지 않는가?’라며, 이런 현상은 사람들이 돈을 우상숭배하는 사회와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모든 신학이 무신론과 이성에 관한 문제에 신학적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을 때, 프란치스코 교황은 새로운 주제를 어디에서 발굴해 낼 수 있었을까? 신심이 깊은 사람은 성령이 그에게 계시해 줬다고 할 것이지만, 나는 그의 접근 방법이 해방신학으로부터 발생하였거나 혹은 적어도 해방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생각한다.

윤리적 분노에서 출발하여 우상숭배에서 벗어나는 신학

1960~70년대 라틴 아메리카는 빈부 격차가 극심한 사회 현실 속에서 살고 있었고, 수도자와 평신도, 사목자들은 가난한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활동하였다. 이들이 현장에서 마주한 비참한 가난의 현실은 기존의 신학으로 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라틴아메리카에서의 해방신학으로 귀결된 신학운동을 태동케 한 것은 윤리적 분노였다. 가난한 사람들의 존엄성을 거부하고 있는 상황, 비인간적인 현실이 지속되는 현실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인간존엄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예수의 얼굴을 발견하게 되는 경험이었다.(마태 25장) 하느님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이들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신학적 명제로 발전하게 되었다. 인간과 비인간을 계급적으로 구분하는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고 평등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영적 경험을 통해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 경험과 투쟁이 지금까지 그들이 배웠던 신학과 어떤 차이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 신학은 이러한 사회적 문제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거나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신학, 최악의 경우 이러한 상황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설명하는 신학이었다. 사실상 오늘날의 많은 신학적 성찰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와 억압적 제도 현실을 외면함으로서 일종의 냉소적인 신앙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건 우상적인 신앙이었다. 형제의 고통에 대하여 무관심한 신앙과 신학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고통 앞에서 갖는 연민(compassion)의 마음은 우리의 신앙과 신학이 우상숭배적이지 않다는 것을 분별하는 중요한 판단기준이 되고 있다.

우상숭배와 종교로서의 자본주의

모든 사람들의 존엄한 삶을 위한 투쟁의 과정에서 비판적 성찰을 하고자 하는 신학자들은 가난의 원인은 무엇이며 그것을 극복할 방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당연히 마주하게 되었지만, 수세기 동안 신학의 중요한 대화 동반자였던 철학이 주는 답변은 충분하지 못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해방신학은 그의 태동 초기에서부터 사회과학과 대화를 시작했다. 이런 사회・경제적 분석과 연구에 의해서 해방신학자들은 자본주의가 경제 자체를 넘어서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돈이라는 객체는 인간이라는 주체와 주객전도 현상을 보인다. 돈과 상품의 물신숭배에서 인간의 가치는 사치품의 소비능력에 의해서 가늠되어진다. 인간은 부와 소비능력의 축적 여부에 따라서 그의 인간됨이 결정되어 진다. 무한정한 부의 축적과 소비를 향한 강박관념이 인간을 무한한 존재로 만들어 간다. 옛날에는 돈을 많이 벌면 그 돈을 갖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 세상에서는 1000만 달러를 가진 사람이 1억 달러를 갖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한계가 있는 구체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돈을 통해 ‘무한한 것’을 찾으려고 한다. 그 무한한 존재가 바로 ‘신’이 아니겠는가? 오늘날에는 자본주의가 ‘진정한 보편적(가톨릭) 교회 역할’을 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와 함께 자유시장은 이제 절대적 위치를 점하게 되었으며 시장의 법칙은 사회-경제적 삶을 형성하는데 최종적인 판단기준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희생에 대한 요구와 사회적 소외와 불평등을 향한 무관심 문화를 형성한다. 소비 사회에서 소비할 수 없는 사람은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죄인’들이며, ‘소비의 성전’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해방신학의 과제

이러한 현실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좀 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투쟁하고자 하는 해방신학의 과제와 기능은 가난한 자들의 죽음을 필연적인 희생으로 여기며 정당화하고 또한 이로 말미암아 사회적 무관심과 무감각을 유발시키고 있는 자본주의의 종교적 상징과 신화(자유시장에 대한 믿음과 같은)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에 있다.

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신이 존재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진정한 신이냐’는 것이다. 어디에 진정한 신이 있는가? 어떤 유형의 신을 우리 교회가 세상을 향해 선포하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사회적 투쟁과 교회와 자본주의의 우상에 대한 신학적 비판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존엄성과 존엄한 삶을 위한 그들의 권리에 대하여 공적인 확증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이를 통해,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이 사회의 우선적 관심 대상이 되고 이를 위해 필요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정치적 의지와 힘을 형성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억압으로 인해 고통받는 장소에서 바로 우리가 행동하는 신앙과 신학이 되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사랑의 하느님 나라를 경험하게 해 줄 것이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 4,12)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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