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진보신학, 우리 시대 고통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나?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과 신자유주의 시대의 부조리한 모순을 비판하면서,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이 다시 조명을 받고 있다. 해방신학의 지평을 인간의 욕망에까지 넓힌 선구적인 2세대 해방신학자라는 평가를 받는 브라질 성정모 교수와 함께 오늘의 진보신학이 우리 시대를 어떻게 읽고 어떤 과제를 안고 있는지 2017년 12월 8일, 인문카페 엣꿈에서 좌담회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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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황경훈_우리신학연구소 소장

좌담          김진호_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김항섭_한신대학교 종교문화학과 교수
성정모_브라질 상파울루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통역          심범섭_라이스대학교 언어학 박사

‘굴욕감’과 ‘속하지 못함’

신자유주의 시대 가난한 이들의 고통

황경훈: 해방신학자인 성정모 선생님을 모시고, 한국의 민중신학과 우리신학이 함께 대화하는 자리를 갖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오늘은 크게 두 가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우선, 라틴 아메리카와 한국사회 모두 신자유주의가 심화되면서 가난한 이들의 고통이 극에 달했다고 생각하는데, 그 양상은 조금 다르다고 봅니다. 각각의 신학에서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보는지 나눠보고 싶습니다. 그다음에는 이런 상황에 대해 진보적 신학자들이 어떻게 개입할 것인지 나누고 싶습니다.

성정모: 가난한 이들의 고통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 먼저 신학적 방법론을 말하고 싶습니다. 신자유주의를 경제체제로 접근하면, 고통을 이야기할 여지가 없습니다. 신자유주의는 가난한 이들의 고통에 관해 이%ec%84%b1%ec%a0%95%eb%aa%a8야기하는 것을 어렵게 합니다. 고통은 두 종류가 있는데, 배고픔과 같은 신체적 고통이 있고 굴욕감이라는 고통이 있습니다. 육체적 배고픔은 어느 사회든 마찬가지이지만, 굴욕감은 문화에 따라 다릅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안에서는 굴욕감이 공통적으로 나타납니다. 이를테면 가난한 이들은 불의한 경제체제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게으르고 효율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을 도와줄 필요가 없다는 굴욕감을 갖게 합니다. 이런 굴욕감은 개인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갖게 하지 못하게 것으로 연결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명확하게 지적하셨듯이 ‘무관심의 세계화’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수요·공급 등 기술적으로 경제를 논의할 필요가 없고, 이 무관심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 무관심은 영적 무관심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서를 보면 하느님께서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 36,26)고 말씀하셨고, 하느님의 영, 새로운 영을 넣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마찬가지로 영을 갖고 있고, 이 새로운 영이 우리의 돌로 된 마음을 일깨워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의 고통을 함께 느껴야 하고, 이것이 공감, 연민입니다.

김진호: 한국사회에서 신자유주의와 결합된 빈곤의 문제는 199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두드러진 빈곤 현상의 특징은 ‘귀속되지 못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비록 찢어지게 가난해도 민족이니 노동자니 하는 범주가 구성원 각각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묶어냈지만,  %ea%b9%80%ec%a7%84%ed%98%b8이제는 공동체적 범주가 갈가리 찢겨져 하위로 내몰린 이들은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자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 노숙자, 가출청소년(녀) 등 오늘 한국사회의 가장 심각한 빈곤 상황에 놓인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귀속성(attribution)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최근 민중신학자들의 큰 관심은 이런 귀속성을 상실한 민중의 고통을 묻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속하지 못한 민중의 현실을 보면서 파악한 공통된 특징은 언어의 장애였습니다. 예를 들면, 불안정 노동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불만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합니다. 정규직 노동자는 법적으로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조직이나 권리가 있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는 반복적으로 자기 권리의 말소현상을 겪습니다. 이들을 인터뷰해보면 자기를 표현하는 언어 기능이 상당히 퇴화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 여러 사회적 트라우마를 겪었던 사람들은 정신적 외상으로 인해 말더듬이 증세라던가 맥락 없이 말하는 증상이 나타나고, 가출청소년들에게도 언어 이상 증상이 나타납니다. 최근 속해 있지 못하는 이들에게 나타나는 대표적 증세가 언어적 장애라는 점에 주목해서 저는 이를 ‘사회적 실어증’이라고 명명했습니다. 민중신학의 과제는 이런 민중의 사회적 실어증 문제와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에 초점을 두게 되었습니다.

성정모 선생님께서 굴욕감 이야기를 하셨는데, 속하지 못하는 것을 반복적으로 체험하는 현상은 한편에서는 민중을 무능력하게 하고, 다른 편에서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게 합니다. 심지어 민중은 흉물스러운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이 요즘 민중신학자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민중들의 실재입니다.

김항섭: 신자유주의를 한국에서 경험하면서 제가 느꼈던 것 중 하나가 문화로서 신자유주의 문제입니다. 신자유주의 가치나 이념이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특히 광고 등에 널리 유통되면서 우리 삶 자체가 그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신자유주의 이념과 가치에 친숙해지고, 그러면서 이런%ea%b9%80%ed%95%ad%ec%84%ad 문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됩니다. 신자유주의 문화에 익숙해지다 보면 마치 이런 것들이 보편적이고 자연적인 것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화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적으로 행동하는데, 본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말로는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그렇게 행동합니다.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에 대한 좌파의 의식이나 행동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문제를 학교에서 굉장히 많이 느낍니다. 학교 구조조정을 선도하는 이들은 보수주의자,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민중운동을 하는 진보주의자입니다. 그런 이들이 신자유주의의 논리에 따라서 대학을 구조조정하고, 그런 모순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신자유주의 가치나 이념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보편적 가치처럼 자리 잡은 문제라고 봅니다. 그런데 제가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이런 문제에 대한 신학적 작업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보편성을 가장하여 나타나는 신자유주의 가치나 이념들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황경훈: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신학적 연구주제로 삼아서 고민하는 신학자가 거의 없다고 봅니다. 90% 이상의 신학자가 사제인데 그들은 다 신학교에 있고, 평신도 신학자는 주로 종교학을 하고 있어서 그런 신학적 작업을 거의 수행하지 못합니다. 전국 14개 교구에 정의평화위원회가 있어서 『복음의 기쁨』이나 『찬미받으소서』 같은 가톨릭 사회교리를 신자들에게 교육하지만, 신학적 작업으로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연구하지는 않습니다.

 

김진호: 한국사회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작업이 대학을 중심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현실은 어떻게 보면 비평적 커뮤니티로서 대학이 몰락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는 가톨릭뿐 아니라 개신교, 종교학 어느 분야에서도 비슷한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또 종교와 사회가 만나서 같이 논의하는 장도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런 점에서 대학 밖에서 이뤄지는 연구 플랫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리신학연구소나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가 맡아야 할 과제의 하나이기도 하지요.

진보신학의 과제,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신학적 언어로 드러내는 일

황경훈: 1970, 80년대에도 가난한 이들은 배가 고팠고 굴욕감도 느꼈는데, 지금은 그때와 어떤 차이가 있다고 해방신학에서는 보는지 궁금합니다.

 

성정모: 근대는 18, 19세기 이후에 시작되었는데, 이때 등장한 새로운 복음에서는 좋은 삶이 내세에 있지 않고 현세에 있으며, 모든 사람이 그 좋은 삶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했습니다. 근대의 질문은 어떻게 하면 좋은 삶을 이룰 것인가였고, 자본주의든 마르크스주의든 그 대답을 찾으려 했습니다.

1970년대에 문화적 변화가 시작되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1972년에 『성장의 한계(Limit of Growth)』라는 중요한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은 환경과 생태의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당시에 좋은 삶이란 소비를 많이 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는데, 환경과 생태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 두 가지를 다 가질 수는 없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두 가지가 제기되었는데, 하나는 생태문제를 문제로 여기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좋은 삶의 개념을 바꿔서 소비를 줄이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는 소비에 대한 부정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소비하는 것이 좋은 삶이지만, 이것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1974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하이에크(Friedrich A. Hayek)의 이념을 기반으로 출현한 신자유주의는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이성을 제시했습니다. 즉, 1970, 80년대에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도 권리가 있지만, 불의한 사회구조 때문에 그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은 사회운동을 통해 좋은 삶을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부자와 똑같이 좋은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말했고, 당시에 가난한 사람은 불의한 상황에 놓여 있었기에 이런 구조를 바꾸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가난한 사람은 가난이 자신 탓이라고 생각하도록 강제하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그런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잘못하여 자본주의 체제의 일부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럴 권리를 얻지 못한다고 여기면서 심지어 자신의 고통을 자기 잘못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죄책감마저 느낍니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모든 것이 시장 아래 있습니다. 예전에 젊은 남녀는 공원에서 만났지만, 요즘은 술집이나 카페에 갑니다. 돈이 없으면 만날 수가 없습니다. 돈이 없으면 사회관계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분들도 지금은 이런 관계망이 무너짐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까 김진호 실장님이 말한 사회적 언어 장애와 관계있습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부흥하는 오순절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이상한 언어를 말하곤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 교회에서 자유롭게 소리를 지를 수 있는데, 이 소리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이들은 이 소리를 통해서 우리는 그런 고통을 당할 필요가 없다고 외칠 뿐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오순절 교회에서도 이렇게 마음대로 소리를 지를 공간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돈을 내지 않으면 이런 공간을 얻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탈식민주의 이론가인 스피박(Gayatri Chakravorty Spivak)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책을 썼는데, 초판에서 그녀의 대답은 ‘아니다’였지만 두 번째 판에서는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난한 사람들은 이때에도 자신에게 벌어지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문화적 틀이 없습니다. 신학이 해야 할 한 가지 일은 이 사람들에게 설명할 틀을 제공하는 것인데, 명확한 언어가 아니라 그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상징적 언어로써 이 틀을 제공해야 합니다. 이 틀을 통해서 그 사람들이 느끼고, 꿈꾸고, 욕망하는 것들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김진호: 민중신학의 주요 고민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민중의 언어장애 문제를 극복하는 데 있습니다. 성정모 교수님이 말씀하신 ‘굴욕감’이 오늘 한국에서 나타나는 두 양식은 ‘무력감’과 ‘분노’입니다. 둘 다 자기가 겪는 고통의 현실이 왜곡되어 표현되는 이유들이지요. 그런 점에서 우리 시대 민중은 과거보다 훨씬 더 스스로 변화의 주체가 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 우리의 고민입니다. 그런 점에서 문화사회학자 엄기호가 말한 ‘곁의 정치’, 즉 주변에서 민중의 언어를 ‘대신 증언’하는 것이 필요하지요. 해서 민중신학은 민중의 고통을 해석하여 시민사회가 들을 수 있는 언어로 번안하는 데 큰 관심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물론 신학자로서 사회를 분석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

성정모: 최근 브라질을 비롯해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은 원래의 파토스(Pathos)를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이제 라틴 아메리카에서 중요한 것은 여성, 흑인, 토착민의 정체성 투쟁이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투쟁은 보이지 않습니다. 건강보험, 주택, 교육문제 등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국가에 돈을 요구하는 데 중점을 두지 신학이나 신자유주의의 문제는 다루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와 고통의 관계에 대한 고민이나 그런 투쟁은 없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전체적으로 연관 지어 보는 그런 관점이 부족해 보입니다.

 

김항섭: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의 현실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볼리비아나 에콰도르에서 원주민 봉기가 활발해지면서 ‘탈식민주의(decolonialism)’가 생겨났습니다. 일반적으로 탈식민주의자들은 해방신학을 선구적 사상으로 인정하는데, 일부 저자는 해방신학을 비판합니다. 해방신학이 근대를 뛰어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비판에 대해서 성정모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리고 또 클로도비스 보프(Clodovis Boff)는 해방신학자들이 인식론적 차원이나 실천적 차원에서 가난한 사람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하면서 하느님을 배제하고 가난한 사람을 우선시하는 우를 범했다고 해방신학을 비판합니다. 예전에 성 교수님의 박사논문에서도 해방신학을 비판했는데, 해방신학자들이 하느님 나라를 사회주의와 혼동했다는 겁니다. 해방신학자들 사이에서 이런 논쟁이 계속되는지요?

 

성정모: 우선 해방신학 안에 있는 서로 다른 그룹을 구별해야 합니다. 물론 가장 유명한 해방신학자인 보프(Leonardo Boff)의 그룹은 근대성을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유토피아가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믿었는데, 이는 근대의 생각입니다. 탈식민주의자인 미뇰로(Walter Migñolo)가 이런 점을 들어 해방신학을 비판할 때 맞는 점도 있지만, 다 맞지는 않습니다. 미뇰로는 해방신학을 비판할 때 해방철학자인 두셀(Enrique Dussel)의 이야기를 가져와서 비판하는데, 해방신학자들도 두셀의 이론을 활용하여 탈식민주의를 주장합니다.

그리고 클로도비스 보프는 해방신학이 가난한 사람을 위한 것이지 예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비판했는데, 저는 이것이 틀렸다고 봅니다. 클로도비스 보프는 고전적 신학자이지 해방신학자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는 가난을 이야기하지만, 그가 사용하는 사고의 방법론은 교의신학적이지 해방신학적이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신학적 문제가 제기되는데, 하느님에 대한 말은 추상적이어서 어떤 하느님을 말하는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누군가 하느님에 관해 이야기할 때, 예수님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했는가를 참조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말하는 하느님과 교황 프란치스코가 말하는 하느님은 조금 다른데, 그 다른 점은 가난한 사람들과 하느님을 관련짓는가 아닌가의 측면입니다.

 

김진호: 민중신학에서도 그런 논쟁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그런 논쟁은 현장을 벗어난 이론지상주의적 주장들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저는 다른 식으로 이 문제를 논의하고 싶은데, 사람들이 신은 누구인가라고 묻는 자리, 거기에서 신학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선이니 가난한 사람이 우선이니 하는 원론적 논쟁이 아니라, 고통당하는 이들이 하느님을 향해 처절하게 묻는 그곳에서 그 현장성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신을 말하고 가난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성정모: 문제는 신학이 무엇인가라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신학이란 하느님을 바라보았지만, 현재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논의해야 하는데 이에 대해서 충분히 답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갈라티아서에서 우리의 싸움은 육체와 피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주권자, 세상의 영에 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신학은 사회과학이 보지 못하는 것, 곧 사회를 움직이는 영을 다루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조직을 형성하고 운동을 벌일 때, 하느님의 영이 그들을 움직이고 조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교회의 신학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신개념은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제가 해방신학을 비판하는 지점은 현실을 간과하는 점입니다. 해방신학이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을 해방한다고 말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고, 하느님이 그들 가운데서 어떻게 역사하는가 이런 것을 명시적으로 이야기하고, 기존의 신개념이 이런 현실을 보지 못하는 점을 비판하는 것, 오늘의 해방신학에서는 이런 작업이 필요합니다.

 

진보신학의 과제, 공공성의 회복

황경훈: 최근 진보신학에서는 공공신학 논의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런 논의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김진호: 한국에서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의 일상생활 구석구석까지 자본주의가 침투하면서 공공적인 것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효율성을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공공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예를 들면 빈민운동 하는 분들이 지역재생 운동을 하거나, 자본을 어떻게 사회적 자본으로 전환할 것인가 하는 운동이 공공성 논의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민중신학자들도 이런 사회적 공공성 문제에 깊숙이 개입해서 지역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그런 것에 관한 신학적 논의를 펴고 있습니다.

 

성정모: 브라질에서 공공신학이라는 말은 두 가지 차원의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신학이 공적인 대학 공간에서 논의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학이 개인의 삶에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공적 영역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김진호 실장님의 이야기는 그 두 번째 차원인데, 이런 생각은 1970년대의 해방신학에서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의견에 동의하는데, 신자유주의의 도래 이후에 공공의 선을 위한 정치가 그 역할을 상실했습니다. 모든 것이 경제적 효율로 판가름 나고, 대통령을 뽑을 때도 효율적 관리자인가를 보게 되었습니다. 정치의 중요성, 또 공적 영역의 중요성을 논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청중: 진보신학이 정말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도구인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가 더 인간다운 사회가 되기 위해 진보신학은 어떻게 기여할 수 있습니까?

 

성정모: 저에게 영이라는 것은 단지 종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람, 사회, 집단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막스 베버(Max Weber)가 말한 ‘자본주의의 정신(the Spirit of Capitalism)’이라는 개념을 좋아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는 두 가지 영이 있는데, 하나는 지배의 논리를 움직이는 영이고 다른 하나는 저항과 해방의 논리를 움직이는 영입니다. 저항의 영은 ‘은총(grace)’입니다. 저에게 신학은 하느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를 보면서, 어떤 영이 하느님에게서 오는지 어떤 영이 우상에게서 오는지 식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는 세계화를 움직이는 영을 발견하고 비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이 가난한 사람 사이에서 어떻게 역사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해결책은 없습니다. 신학에는 구체적 해결책이 없습니다. 하지만 신학이 하는 일은 영에 관한 것이니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진호: 우리는 큰 역할은 못 하지만, 은폐된 민중의 현실을 찾아내고 폭로하는 일을 주로 해왔고, 그 문제를 좀 더 깊게 읽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은폐의 메커니즘에 공모했는지, 교회는 여기에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읽어내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민중신학자 중에는 사회적 자본 운동에 관여하는 이도 있고 인권단체 등에서 활동하는 이도 있으며 성소수자 권리를 위해 일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들 각각은 민중을 위한 제도화를 위해서 미력하나마 노력하고 있습니다.

 

황경훈: 오랜 시간 토론했지만 미진한 느낌도 듭니다. 다음에 성정모 교수님께서 한국에 또 오시면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면 좋겠습니다. 긴 시간 이야기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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