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복음 – 성인으로 가는 길

김의열

성인으로 가는 길

 9월 7일, 연중 제 23주일, 마태 18,15-20.

내 마음을 되돌아보지 못하며 살던 지난 시절, 수많은 뒷담화를 했던 부끄러운 기억들이 있다. 내가 옳고 정의로운 입장이라 여기고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때론 도마 위에, 때론 안주 삼아 그 사람 비판에 열을 올리곤 했다. 뒷담화를 하고 듣고 맞장구치고 하면서 나름대로 마음에 쌓인 부정적 감정을 쏟아내는 시원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두려움이 생겨났다. ‘없는 자리에서 내가 남의 얘기를 하듯 다른 이들도 나 없는 자리에서 내 얘기를 할 것 아닌가?’ ‘내가 하는 뒷담화가 돌고 돌아 결국 나를 향해 날아오는 화살이 되는 거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자 뒷담화를 하고 나면 영 마음이 불편하고 후회가 됐다. 무엇보다도 뒷담화를 했던 당사자를 만나게 되면 그 사람 얼굴을 쳐다보기가 부끄러워졌다. 영혼이 혼탁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이후부터 의식적으로 마음을 살피면서 뒷담화의 유혹(?)에서 벗어나려 했다. 점차 남 얘기하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자연스럽게 뒷담화를 하는 자리도 드물어졌다. 올해로 넘어오면서는 아예 뒷담화를 하지 않기로 했다. 올 한 해 3분의 2가 지난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안타깝게도 몇 차례 결심을 어겼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뒷담화의 강도(?)는 매우 약해졌고 그 횟수도 거의 손가락에 꼽을 정도이니 이제 앞으로 그 결심을 계속 이어가면 나름대로 성공한 게 아닐까 여겨진다. 이번에 우리나라에 오셔서 세월호 유가족들을 비롯해 고통받고 억울하고 힘없는 많은 이들에게 위안을 주고 가신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도 “만일 우리가 뒷담화를 하려는 욕구를 다스릴 수만 있다면 결국에는 모두 성인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으니 나도 이대로 죽 가다보면 어느새 성인 반열에 오를 수도 있겠다는 망상(?)을 가져본다.

마태복음 18장 15~18절은 형제나 동료의 잘못을 타이르는 방법과 순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다. 잘못을 보면 먼저 그 사람을 단둘이 만나 타이르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동료 몇 사람을 더 데려가 만나보고 그래도 안 되면 교회(조직 전체)에 알려서 타이르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뒷담화 자체도 문제지만, 뒷담화가 돌고 퍼져나가 당사자는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그가 속한 모임이나 공동체 전체로부터 예고 없이 비판을 당하게 되면 그 사람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게 된다. 잘못에 대한 반성은커녕 공동체에 대한 원망과 적대감만을 키울 가능성이 크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많은 경우 뒷담화에 열을 올리거나 집단적인 비난으로 한 사람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겨주곤 한다. 그래서 잘못을 보게 되면 가장 먼저 그 사람과 단둘이 만나 이야기하고 타이르는 게 우선이다. 그 사람이 충고를 고맙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더 없이 좋아질 것이다.

내 경험에 따르면 타인의 잘못을 보고 충고를 하려 할 때도 신중하게 해야 한다. 충고나 비판 이전에 반드시 먼저 내 마음부터 들여다보고, 만일 충고하려는 상대방을 향한 내 마음이 분노나 적대감이나 거부감이나 열등감처럼 부정적인 기운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차라리 충고하지 않는 게 낫다. 아무리 올바른 말이라도 부정의 기운에 바탕을 두고 표현되는 말들은 상대방에게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또 다른 상처나 분노나 적대감이나 거부감을 심어주고 이는 다시금 고스란히 내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을 열게 하고 변화시키는 건 따뜻한 사랑의 기운이다. 날카롭고 차갑고 부정적인 기운은 서로를 더욱 움츠러들게 하고 두꺼운 벽을 높게 쌓도록 만들 뿐이다. 오직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고 끌어안고 싶은 마음이 느껴질 때만 올바른 비판이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충고를 하는 게 좋을 듯하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잘못에 대한 가장 높은 충고나 타이름은 조건 없는 용서다. 이어지는 마태복음 18장 21~22절에서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할까요?”라고 묻는 수제자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망설임 없이 대답하신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시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이야기하신 ‘뒷담화의 욕구를 완전히 다스리기’는 결국 조건 없는 용서를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지금은 멀게 느껴지지만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야 할 성인의 길이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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