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교회 – 헬레나의 성지 순례

최화선

아우구스타 헬레나, 순례자 헬레나

고대 그리스도교의 여성 순례자들 가운데 첫 번째로 살펴볼 이는,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다. 250년경 태어났다고 추정되는 헬레나의 생애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후대의 사가들은 대부분 그녀의 낮은 신분을 언급하면서 동시에 그녀의 덕성을 강조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헬레나가 어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어떠한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녀가 270년경 소아시아에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와 결혼하고 아들 콘스탄티누스를 낳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292년 사두정치(四頭政治, Tetrarchia) 체제하에서 서로마의 %ed%97%ac%eb%a0%88%eb%82%98%ea%b8%b0%eb%85%90%ec%a3%bc%ed%99%94부제(副帝, Caesar)가 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정치적 야망을 위해 293년 헬레나를 버리고 서로마의 정제(正帝, Augustus) 막시미아누스(Maximianus)의 딸 테오도라(Theodora)와 결혼하면서, 헬레나는 결국 혼자 아들 콘스탄티누스를 키운다. 로마사에서 잊힐 뻔했던 헬레나는, 306년 이후 콘스탄티누스가 서로마의 지도자로 부상하면서 다시 등장하였고, 325년 황후 및 황실의 고귀한 여성들에게 주어지는 칭호 ‘아우구스타(augusta)’를 받았다.

이렇게 아들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통해 로마사에 이름을 남긴 헬레나이지만, 우리가 헬레나를 기억하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그녀의 그리스도교 신앙과 관련된 행적 때문이다. 헬레나가 언제 어떻게 그리스도 신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분명 그녀의 신앙은 아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종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짐작된다. 무엇보다도 326년 70대 후반의 나이에 떠난 그녀의 팔레스티나 순례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성지 건설사업이나 이후 성지 순례 전반에 큰 영향을 주었다. 헬레나의 순례에 대한 언급은 4~5세기 교회사가들 글 대부분에서 나타나는데, 시대나 관심사의 차이에 따라 이들이 언급하는 내용에 조금씩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들에 주목하면서 헬레나의 순례를 되짚어보자.

헬레나는 왜 순례를 떠났나?

헬레나가 노년의 몸을 이끌고 먼 길의 순례를 떠난 이유에 대해서 후대 사가들은 다양한 설명을 남겼다. 루피누스와 소크라테스의 교회사에서는 헬레나에게 순례를 떠나라는 하느님의 계시가 내렸다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계시나 꿈의 이야기보다는 “기도드리고” “성스러운 땅을 찾아보기” 위해 헬레나 스스로 결심했다고 묘사하는 글도 있다. 헬레나의 순례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에우세비우스의 글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헬레나는 모든 주권을 지닌 하느님께 합당한 경건함을 바치고, 위대한 황제인 그녀의 아들과 하느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왕세자들인 그의 아들들을 위한 감사의 봉헌을 기도로 완성하기로 마음먹자, 그 칭송받아 마땅한 땅을 자세히 조사해보고, 황실의 일원으로서 동방 속주의 마을과 사람들을 살펴보는 일에 자신의 훌륭한 지력을 사용하기 위해, 노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젊은이의 열정을 가지고 길을 떠났습니다. (에우세비우스, 『콘스탄티누스의 생애』 3권 42.1)

 

에우세비우스의 이 구절은 헬레나가 행한 순례의 두 가지 측면을 교묘하게 잘 요약한다. 즉 헬레나의 순례는 성스러운 장소를 직접 찾아가 그곳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종교적 여행이자, 제국의 곳곳을 직접 돌아보며 자선을 베푸는 황실 여성의 순행이기도 했다. 최근의 역사학자들은 헬레나의 순례에서 후자의 의미를 좀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헬레나의 순례에서 이 두 차원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헬레나가 순례를 떠나기 직전 로마 황실에서는,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첫 번째 배우자 미네르비나(Minervina)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크리스푸스(Crispus)가 처형당하고, 뒤이어 황후 파우스타(Fausta)가 처형된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의 처형 이유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후 많은 사람은 이들이 불미스러운 관계를 맺었고 이를 알게 된 황제가 분노해서 이들을 처형했다고 추정한다. 어찌 되었건 이 일은 콘스탄티누스의 입지를 흔들 수도 있는 큰 사건이었고, 헬레나 역시 손자와 며느리가 처형된 이 사건으로 심한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아들과 손자들을 위한 감사와 봉헌의 기도’라는 에우세비우스의 말의 이면에는 분명 이 사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결론적으로 헬레나의 순례는 이 일과 관련해서 헬레나 자신의 신앙의 내적 측면에서도 그리고 황실의 외적 측면에서도 성공적이었다. 즉 헬레나는 비극적 사건이 일어난 로마를 떠나 성지에서 기도하면서 슬픔을 다스렸고, 또 그 와중에 그녀가 동방의 여러 도시에서 황실 여성으로서 베푼 다양한 자선 행위들은 황제 콘스탄티누스에 대한 여론을 좋은 쪽으로 바꾸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헬레나의 순례 동기에는―우리 삶의 대부분이 그러하듯이―지극히 현실적인 삶의 문제와 이를 넘어서는 종교적 추구라는 두 가지 차원이 밀접하게 결합되었다.

 

헬레나와 십자가 발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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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헬레나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떠올리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 발견에 관한 이야기다. 헬레나가 순례 도중 수난의 장소인 골고타를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예수가 매달렸던 진짜 십자가를 찾아냈다는 이야기는 4세기 말~5세기의 여러 교부들, 교회사가들의 글에서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헬레나는 꿈에 나온 하느님의 계시로 십자가가 묻힌 장소를 찾았다고 이야기되기도 하고, 계시 이전 이미 직접 그곳에서 십자가를 찾기 위해 상세한 조사를 했다고 한다. 이 십자가는 아픈 여인의 병을 낫게 하거나, 혹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기적을 행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헬레나는 이 십자가에 박혀 있던 못들을 빼내 로마에 가져와서 아들 콘스탄티누스에게 주었고, 콘스탄티누스는 말 고삐와 왕관에 이 못들을 박았다고도 한다.

십자가를 발견하는 헬레나

이렇게 헬레나와 십자가 발견 이야기는 교회사에 정착되지만, 정작 헬레나와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에우세비우스의 글에서는 헬레나가 순례 도중 십자가를 발견했다는 내용이 없다(에우세비우스의 글에서는 예수의 무덤을 발굴하는 장면에서도 헬레나가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언급 자체가 헬레나 사후 20여 년이 지난 350년경이 되어서야 등장한다. 진짜 십자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이 십자가는 곧 많은 이의 열광적인 경배 대상이 되었다. 순례지를 방문한 사람들은 십자가 조각을 조금이라도 떼어가려고 했으며, 이렇게 가져간 조각은 당대의 가장 귀한 선물이 되었다. 이러한 십자가 열광의 한가운데서 헬레나가 바로 이러한 십자가 발굴의 장본인으로 이야기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즉 헬레나는 성지 순례의 핵심 중 하나인 성물을 찾아낸 사람으로 자리 잡았다. 한편 헬레나의 순례는 성지 순례의 또 다른 핵심, 즉 성지에 세워진 교회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헬레나의 순례로 지어진 교회들

헬레나는 순례 도중 예수의 생애와 관련된 주요 장소들에 교회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골고타의 ‘주님 무덤 성당’은 대체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령으로 세워졌다고 이야기된다. 하지만, 간혹 이 경우에도 헬레나의 십자가 발견 이야기와 연결해, 이 장소를 발굴하고 여기에 성당을 세울 것을 명령한 것이 헬레나라는 기록이 나타나기도 한다. 에우세비우스는 ‘주님 무덤 성당’의 건축은 오로지 콘스탄티누스의 업적으로 기록하지만, 예수의 탄생과 승천을 기념하는 장소에 세워진 두 교회는 헬레나의 공으로 돌렸다.

베들레헴의 ‘예수탄생기념성당’

%ec%98%88%ec%88%98%ed%83%84%ec%83%9d%ea%b8%b0%eb%85%90%ec%84%b1%eb%8b%b9베들레헴의 예수 탄생 동굴을 찾아오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은 이미 2세기 때부터 나타난다. 순례길에 오른 헬레나 역시 이 동굴을 찾아 경배드리고 이곳에 예수 탄생을 기념하는 교회를 세우는 작업에 착수했다. 333년경 완공된 이 건물은 이후 순례자들이 반드시 방문하는 팔레스티나의 주요 순례지가 되었고, 380년대에 이곳을 방문한 로마의 귀족 부인 파울라는 이곳에서 예수의 탄생 장면을 눈앞에서 보듯 생생하게 체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헬레나가 세운 교회는 6세기 사마리아 반란 때 파괴되었고, 지금 현재 남아 있는 ‘예수탄생기념성당’은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재건하였다. 비록 헬레나의 옛 교회는 사라졌지만, 예수 탄생 기념 동굴의 자리는 여전히 그때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순례자의 발걸음을 끌어당기고 있다.

올리브 산 위의 ‘엘레오나 성당’

%ec%97%98%eb%a0%88%ec%98%a4%eb%82%98%ec%84%b1%eb%8b%b9올리브 산은 예수의 승천 장소로 알려진 곳이다. 헬레나는 순례 도중 이곳을 방문해서 특히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준 장소라고 알려진 동굴 위에 교회를 세우기로 했다고 한다. 이후 이 교회는 ‘엘레오나(Eleona, 올리브 숲) 성당’ 혹은 ‘제자들의 성당’이라 불리게 된다. 올리브 산 위의 교회에 대한 언급은 333년경 팔레스티나 순례에 관한 최초의 기록을 남긴 “보르도 순례자”의 여행기에 이미 등장한다. 이후 380년경 순례자 에게리아는 예루살렘의 사순 전례를 묘사하며 ‘엘레오나 성당’의 구조와 쓰임새를 자세ㅎ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614년 페르시아 군대가 ‘엘레오나 성당’을 파괴했고, 이후 12세기 십자군들이 이곳에 다시 작은 교회를 세웠으나 이 역시 곧 이슬람의 공격으로 파괴되었다. 이로부터 한참 후인 19세기 한 프랑스 여인의 노력으로 옛 교회의 흔적을 찾는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으며, 그 결과 다시 세워진 것이 현재의 ‘주님의 기도 성당’이다. 현재 ‘주님의 기도 성당’은 19세기에 세워진 가르멜회 수녀원 건물과 이후 20세기 초 그 옆에서 발굴된 4세기 헬레나의 성당 흔적에 기반해 다시 세워진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헬레나는 예수의 생애와 관련된 성지뿐 아니라 팔레스티나 곳곳에 남아 있는 성서의 흔적을 꼼꼼히 돌아보고 그곳에서 기도를 드렸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2년 동안의 순례를 마치고 328년경 돌아와 330년경 세상을 떠났다. 헬레나는 로마 가톨릭교회 및 동방 정교회, 성공회, 루터교에서 성인으로 공경받는다.

헬레나의 순례는 그리스도교 성지가 형성되는 과정과 직접 관련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물론 헬레나가 성지의 교회 건설 및 십자가 발견과 관련된 맥락에는 각 시대의 교부들, 교회사가들이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라는 상징적 존재를 통해 강조하고자 했던 특정한 신학적 정치적 맥락이 있었다. 헬레나가 실제 예수의 십자가를 발견했는지와 상관없이, 헬레나는 분명 당시의 신학적 정치적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를 상징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녀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여러 가지 맥락(성지의 정통성, 십자가 발견의 진위성 등)에서 큰 힘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들의 글을 문자 그대로 다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비록 남성 신학자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전유한 헬레나의 모습만이 남아 있지만, 그렇다고 노년의 몸을 이끌고 성지로 긴 여행을 떠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상징적으로 역사와 종교 속에 새겨 넣은 실제 헬레나의 모습이 희석되지는 않는다. 실제 헬레나의 순례가 없었다면, 후대의 십자가 발견 이야기도 아마 이와는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헬레나는 그리스도교 성지 순례의 시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여성이며, 그녀의 순례가 그리스도교 성지 건설 및 팔레스티나 순례 발달에 끼친 큰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헬레나의 순례를 시작으로 4세기 로마의 많은 귀족 그리스도교 여성은 팔레스티나 순례를 떠나기 시작했다. 황실에서는 헬레나의 순례로부터 100여 년 뒤인 438년 테오도시우스 2세의 부인 에우도키아가 헬레나처럼 황실 여성으로서 모범을 보이며 팔레스티나 순례를 떠나기도 했다. 헬레나가 시작한 순례의 열정을 이후 여성들은 어떻게 이어갔는지 계속 살펴보겠다.


참고문헌

Rufinus, Hist. Eccl. x. 7. The Church History of Rufinus of Aquileia: Books 10 and 11, trans. by Philip R. Amidon, S. J.(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Socrates, Hist. Eccl. I. xvii. edit. by P. Périchon and P. Maraval, Histoire ecclésiastique, SC 407(Paris: Editions du Cerf, 2004.

Cameron and S. G. Hall, Eusebius: Life of Constantine(Oxford: Clarendon Press, 1999), p.137.

W. Drijvers, Helena Augusta: the Mother of Constantine the Great and the Legend of Her Findings of the True Cross(Leiden: E. J. Brill, 1992), pp.60~62.

예루살렘의 키릴루스, 『교리문답 설교집』 4.10; 10.19. Leo P. McCauley and Anthony A. Stephenson, The Works of Saint Cyril of Jerusalem, 2 vols. Fathers of the Church, 61, 64(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1969, 1970).

사진출처

325~326년경 제조된 헬레나 기념주화(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Follis-Helena-trier_RIC_465.jpg).

십자가를 발견하는 헬레나(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t_Helena_finding_the_true_cross.jpg).

예수 탄생 기념 동굴 제대(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Birthplace_of_Jesus.jpg).

‘주님의 기도 성당’에 복원된 동굴(h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Grotto_in_Church_of_the_Pater_Noster.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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