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복음 – 잊지 말아야 할 것

배안나

잊지 말아야 할 것

 9월 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요한 3,13-17.

하느님은 아들을 너무나 사랑하셨다는 표현을 성경에서 자주 봅니다. 상상도 못 했던 아들 둘 엄마가 되어보니 눈에 더 확 들어옵니다. 아들을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 ‘하느님이 도대체 왜 이러셨을까?’ 라는 단순한 질문을 하루에도 수없이 떠올려 봅니다. 감히 하느님과 동급의 자리에 자신을 올려놓는 불경한 상상을 하는 이유는, 저도 제 아들을 정말 사랑하는 것 같은데 아이의 작은 실수에도 바로 목소리가 높아지는 일상을 반성하다 보니 그리 되었습니다. 구약시대에도 그 고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모세가 구리 뱀을 들게 한 하느님, 신약성서엔 하나뿐인 아들의 생명을 걸면서 하느님께서 끝없이 용서하고 또 용서하시는 그 끝없는 마음을 아직 잘 모릅니다.

‘현양’과 ‘구원’을 사전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세상에 높이 드러내다’라는 현양의 뜻을 알게 되니 가슴 한편이 뻐근합니다. 노란 리본이 매어진 십자가를 옆구리에 안고 걷는 이호진 프란치스코 아버님의 뒷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높은 곳에 매달려 있지도 않은 그 십자가가, 제가 본 그 어느 십자가보다도 더 높은 곳에 있고 가장 커 보였습니다.

지난 호에 고통스러운 십자가에 대해 짧은 느낌을 쓴 후, 곰곰이 주변의 십자고상이나 예수님상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다닙니다. 제가 혼배성사를 올린 도봉산 성당은 고 장동호 선생님의 작품이 많습니다. 본당 제대 십자가는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의 옆모습입니다. 언뜻 보면 무표정해 보이는 예수님이십니다. 또 어느 작가의 수도원 순례기 책에서 활짝 웃는 예수님 고상을 찍은 사진을 보았습니다. 십자가는 오직 고통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고통의 뒷모습에는 웃음이, 그 사이 삶의 무수한 면면이 함께 있음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면서 십자가의 의미가 새로 다가왔습니다. 인간 예수이자 그리스도인 그분의 삶 역시 이 땅의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은 건방진 것일까요?

하늘에서 우리를, 십자가를 짊어지고 걷는 아버지를 내려다보고 있을 젊은 넋들을 기억합니다. 매일 접하는 믿기 힘든 일들을 보며, ‘과연 나는 이 일들과 전혀 관련이 없는가?’ 하는 질문에 아니라는 말을 할 자신이 없습니다.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던 일들이 나에게 일어나고, 내 지척의 이웃에게 일어나고, 남이 행복하지 않으면 나 역시 행복하지 않다는 걸 30대 후반에 이르러 깨닫게 됐고 이 모든 일에서 저 역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먼 땅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며, 말로는 표현 못할 분노를 느꼈습니다. 이스라엘 기업들이 버는 돈이 다 팔레스타인으로 향하는 총탄구매 비용이니 이 기업들을 이용하지 말자는 의미가 담긴 이스라엘 다국적 기업들의 로고가 모여 있는 그림파일을 제 페이스북에 올렸습니다. 스타벅스 한 번 안가고 맥도날드에서 햄버거 한 번 안 사먹는다고 세상천지가 개벽할 리 없다는 것은 아마 그 그림을 만드신 분도 아시겠지요. 그렇지만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는 그 힘을 믿기에, 도대체 이런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되묻는 친구에게 이런 심정을 솔직히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을 알고 생활하는 것과, 모르고 생활하는 건 그래도 뭔가 다르다고 믿는 저는 좀 바보스러워도, 바보같이 살라고 가르쳐주신 중2 때 담임선생님이신 정귀배 선생님을 떠올리며 용기를 내어봅니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쓰는 무기가 한국산이라는 걸 알고 진짜 절망했습니다.)

세상 이곳저곳에서 젊은 삶들이 부모를, 나라를 떠났습니다. 세월호에서, 군대에서, 또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에서 삶을 마감한 젊음들이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저는, 기도 중에 그들을 기억하려고 애써봅니다. 살아남은 자로서 당신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당신들의 못 다한 삶을 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뻔뻔스럽게 떠올려 봅니다. 그 옛날, 모세가 들어 올린 구리 뱀을 상상하고, 인간의 삶 그 자체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의미를 잊지 말라는 하느님의 뜻을 말입니다.

솔직히, 지금 이 상황에서 구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자주 생각해 봅니다. 사람마다 또 사회 안에서 생각하는 구원의 의미가 다 다른 것은 확실합니다. 세월호 유족들에겐 특별법이, 군대에서 아들을 잃으신 분들의 부모님께는 명명백백한 진상규명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총성이 멈추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질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마음이 불편해질 분들이 많으시겠지요, 흠.

한국을 방문하신 교황님께 많은 분이 큰 감동과 위로를 받으셨습니다. 광화문 시복식 미사에 참석하셨던 부모님이 그러셨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900km를 걸은 이호진 프란치스코 아버님, 우연히 서강대를 방문했다가 교황님을 10m 근방에서 보았다고 자랑한 친구, 전에 일했던 직장에 방문하셨던 교황님을 뵌 모든 분들의 글과 사진을 보며 행복했습니다. 무수히 쏟아지는 교황님 관련 기사를 행복한 마음으로 읽다가, 한편으론 좀 서글프기도 했습니다. 왜 우리의 지도자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위로와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지.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가 몇 년인지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물어봅니다. 그런데 그냥 싫다고만 하고 살면 ‘신학은 행동하는 학문’ 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신 제 스승님들을 욕되게 하는 것 같고, 더 나아가 미사 시간에 앉아있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었던 이스라엘인들을 치유해 주셨고, 당신의 아들이 죽음을 맞는 십자가가 제일 많이 걸려있는 이 대한민국에서 다시 희망과 용서를 꿈꾸어야 하는, 성당 다니는 아줌마 노릇 열심히 하며 살겠습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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