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복음 – 덤으로 지고 가는 십자가 행렬들

지요하

덤으로 지고 가는 십자가 행렬들

 9월 21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축 이동, 루카 9,23-26.

일찍이 내가 십자가를 지고 있음을 알았다. 내 삶 자체가 십자가임도 알았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나는 십자가를 부여받았고, 내 몫의 십자가 때문에(또는 그 덕분에) 내가 살고 있음도 깨달았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삶’이라는 십자가를 지게 된다. 복된 조건 가운데 태어나건 불우한 환경 속에서 태어나건 삶은 그 자체로 각자에게 십자가가 된다. 사람은 누구나 종말을 향해 간다. 그 어떤 삶이건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닌 이상 이승의 유한함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섭리에 자신을 내맡긴 채 이끌려 갈 뿐이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닌 주어진 삶은 사람에 따라 십자가가 되기도 하고, 그냥 운명이나 팔자로만 인식되기도 한다. 십자가라는 인식은 역설의 의미를 내포한다. 내 삶은 위대한 섭리로부터 주어진 것이며 ‘신의 초대’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인식과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의 실체적 상징물이며, 당연히 ‘구원’의 의미를 내포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들은 자신의 삶과 관련하여 늘 십자가를 의식해야 한다. 믿음이 십자가일 수도 있다. 자신의 삶을 십자가로 생각하고 또 자신의 신앙을 십자가로 여긴다는 것은 구원에 대한 갈망을 포유하는 것이므로, 그 순간부터 그 십자가는 희망의 광채를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어떤 형태의 십자가이건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것임을 깨달아 스스로 희망의 불빛을 안고 구원의 문을 향해 간다는 뜻일 터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역설이다. 고난 가운데 희망이 있음을,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 다음에 부활이 있음을 십자가는 말해 준다.

세상에는 자기 몫의 십자가를 명확히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십자가에 대한 인식을 거부하거나 꺼리는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다.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삶이 아니라 주어진 것인데도, 십자가라는 인식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자신의 삶 자체가 십자가임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을 더욱 힘들게도 한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은 그 십자가 때문에 고난을 겪거나 목숨을 잃기도 한다.

직접적인 신앙 박해가 없는 지금 시대에도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을 여러 가지 형태로 모욕하고 무시하고 핍박하는 현상이 무시로 벌어진다. 세상에 십자가를 드러내는 행위가 치열하게 전개될수록 그것에 대한 대응도 활발해진다. 때로는 십자가를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십자기를 메고 가는 사람들을 방해하거나 박해하는 경우도 있다. 또 십자가 무리에 합류한 사람들이 십자가를 지고 앞서 가는 사람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냉랭한 무관심으로 더욱 힘들게 하는 상황도 있다.

오늘도 거리에서 십자가를 드러내며 사는 이들을 무시로 볼 수 있는 풍경이 거의 일상적으로 전개된다. 전국 수많은 곳곳에서 거리에 선 사제, 수도자, 신자들을 본다. 그들의 십자가 행렬은 2014년 오늘에도 줄기차게 이어진다. 길 위의 십자가 행렬이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은 일단 국가적으로 불행한 일이다.

사제든 수도자든 신자든 각자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다. 자기 몫의 십자가를 감당하는 것만도 힘겨운데, 그들은 한데 거리에서 십자가를 드러내는 일을 반복적으로 감행한다. 그것은 그들이 덤으로 지고 가는 십자가다. 사제 성소건 수도 성소건 부르심에 응답하여 지게 된 십자가지만, 구원의 문을 향해 가는 희망의 길이더라도 힘겹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중 삼중의 십자가를 지고 거리로 나온다. 안전한 고정된 길을 거부한 채 더욱 고달픈 길을 택한 셈이다.

나는 오늘도 서울 한복판인 광화문과 대한문에서, 밀양과 제주 강정 등에서 덤으로 지고 가는 십자가 행렬을 본다. 그들은 그것이 자신들이 지고 가야 할 십자가이기에, 또 세상에 드러내야 할 십자가이기에 오늘도 기꺼이 온몸에 지고 거리에 선다. 바람 부는 길거리에서 보게 되는 십자가 행렬, 예수 그리스도님을 온몸 온 마음으로 따르는 고통과 영광의 십자가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9월호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