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열 수사의 동아시아 기행 – 홍콩 순례일기

동아시아 기행을 시작하며

홍콩 순례일기

신한열 (떼제공동체 수사)

2018년은 절반 이상을 동아시아에서 보내게 되었다. 떼제의 국제 청년 모임이 8월에 홍콩에서 열려, 준비와 진행을 위해 2월부터 공동체의 파견을 받아 현지로 왔다. 세계 각지에서 2천여 명이 모일 것으로 예상한다.

프랑스에 살기 시작한 지 만 30년. 그동안 매년 몇 차례씩 다른 나라에 갔지만, 여섯 달 넘게 떼제를 떠나서 지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교통이 편리한 카울룬의 조던 지하철역 근처에서 다른 형제 두 사람과 공동생활을 시작했고, 두 달이 지나 젊은 수사 둘이 더 합류했다.

홍콩은 10년 전부터 여러 차례 방문했다. 지난 3년 동안은 여름 방학 때마다 ‘동아시아 젊은이 모임’을 이곳에서 열었다. 한국과 중국, 일본, 타이완, 홍콩, 마카오의 젊은이들이 닷새 동안 함께 지내면서 기도하고 대화하는 소박한 시간이었고, 이 지역의 가톨릭과 개신교 청년들이 믿음을 깊게 하고 우정을 나누는 좋은 기회였다. 2013년 한국의 대전에서 동아시아 모임을 처음 시도했을 때, 홍콩 청년 40여 명이 단체로 참석했다. 영어와 중국어를 하는 홍콩 청년들은 본토와 타이완에서 온 젊은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고, 한국과 일본 참가자들과 금세 친구가 되었다. 이 젊은이들은 그 뒤로도 서로 연락을 계속했고, 일부는 다른 나라로 친구들을 찾아가기도 했다.

프랑스에 살면서 1년에 한두 번씩 동아시아를 방문하는 내가 해마다 이런 모임을 주관하기는 쉽지 않다. 비록 공동체의 동의가 있었지만, 나 혼자서 동아시아 모임을 계속한 것은 홍콩 젊은이들의 적극적인 협조 덕분에 가능했다. 여러 해 전부터 한 달에 두 차례 떼제의 노래와 침묵을 곁들인 공동 기도회를 하면서 모이는 이곳 청년들은 자기 일처럼 동아시아 모임의 준비와 진행을 도와주곤 했다. 첫해는 ‘임틴차이’에서 모임을 했다.

 

소금밭이 있는 섬에서

임틴차이(鹽田仔)는 주룽(九龍)반도의 북동쪽 사이쿵(西貢)에서 배를 타고 20분가량 가면 닿는 작은 섬이다. 배가 선착장에 닿기 한참 전부터 야트막한 언덕 위의 하얀 성당이 눈길을 끈다. 1879년 신언회(말씀의 선교 수도회)의 선교사 요셉 프라이나데메츠가 이곳에 와서 2년간 살면서 중국말을 익힌 다음 산둥성으로 갔다. 중국 옷을 입고 살았던 그는 뒤에 중국말로 교리서를 썼다. 2003년 교종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된 그가 살았던 흔적이 이 섬마을에 아직 남아 있다.

나는 여러 해 전 어느 여름날 혼자 이곳에 와서 피정을 한 적이 있다. 긴 중국 여정을 마치고 홍콩에서 마침 하루 일정이 비었다. 어디 가서 쉴까 하던 나에게 홍콩교구의 총대리 도미니크 찬 신부는 자기 조상들이 살았던 곳이라며 임틴차이를 적극적으로 추천해주었다. 그런데 여름날 이 섬은 나무 밑이라 해도 바깥은 너무 무더웠다. 성인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걸었던 나는 쾌적한 기후의 남부 티롤 출신인 그가 홍콩의 덥고 습한 날씨를 어떻게 견디어 냈을까 헤아려 보았다.

임틴차이는 ‘작은 소금밭’이라는 말이다. 본래 선전(深圳)의 임틴(鹽田)에 살던 ‘하카(客家)’ 찬(陳)씨 씨족들이 19세기부터 이곳에 살기 시작했다. 아마 자신들의 본향을 생각하며 그렇게 이름 지은 듯하다. 하카인들은 고대부터 수백 년에 걸쳐 중원(中原), 곧 황하 유역에서 남중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이다. 같은 한족이면서도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간직한 이들은 남중국에서 다시 타이완과 세계 각지로 이민했다. 지역에 따라서는 하카인이 화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곳도 있다. 상대적으로 소수이면서도 하카인들은 무엇보다 혁명 정치 군사 지도자를 많이 배출함으로써 근대 중국 역사에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인 몇 사람만 꼽아도 19세기의 태평천국을 주도한 홍쉬취안(洪秀全), 근대 중국의 국부 쑨원(孫文), 인민해방군의 창설자 주더(朱德) 등이다.

임틴차이의 하카인들은 일찍이 사이쿵에 와 있던 선교사들을 통해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다. 1866년에 첫 세례자가 나왔고, 1875년이 되자 전 주민이 신자가 되었다. 1890년에 이탈리아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이 완공되었다. 농사와 염전,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가던 이 교우촌 마을은 인구가 500명이 넘던 곳이었는데, 산업화와 함께 차츰 주민들이 도시로 옮겨가서 마침내 적막강산이 되었다. 도미니크 신부의 부모도 그가 태어나기 전에 이 섬을 떠났다.

홍콩교구는 폐허가 되어가던 이곳 성당을 2013년에 수리했고 찬 신부를 중심으로 신자들이 계속 순례를 가기 시작했다.

찬 신부는 단계적으로 염전도 복원했다. 도시에 사는 신자들이 순례를 와서 소금을 생산하는 과정을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했다. 이 섬에서 관광객과 순례자들에게 판매하는 기념품 가운데 하나는 한 치가량의 조그만 청동 십자가 안에 소금을 넣은 것이다. “땅의 소금이 되어라”라고 가르치신 스승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다. 오늘날 땅의 소금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신앙을 증거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 아닐까? 십자가 없는 신앙이 과연 가능할까? 오늘날 어떤 이들에게는 그저 장식품이 지나지 않지만, 예수님의 시절 십자가는 정치적이었다. 증거하는 삶은 비싼 대가를 치르는 법이다. 죽음 없이는 부활도 없다.

 

홍콩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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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 사제의 평균 연령이 69세다. 신학교에는 전교생을 다 세어도 10명이 안 된다. 홍콩에는 종신부제들이 있지만, 그들도 대부분 연령대가 높다. 한국과 달리 선교회와 수도회 사제들이 많은 본당에서 일한다. 하지만 수도회도 교구와 마찬가지로 회원이 줄고, 점차 고령화하는 추세다. 비교적 젊은 회원이 있는 선교회나 수도회는 중국 대륙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면서, 이곳에서 준비하는 경우가 많다.

사제가 부족한 상태에서 평신도의 역할이 더욱 중요한 것은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그들의 활약이 눈에 띄지는 않는다. 4명의 총대리 중의 한 사람인 람 신부는 “홍콩교구 신자들은 착하고, 시키는 일은 잘한다. 하지만 의견을 물으면 말을 못 한다. 우리가 평신도들을 제대로 교육하지 못했다”고 반성했다. 어떤 신자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홍콩 신자는 모두 바빠서 %ed%99%8d%ec%bd%a9%ea%b5%90%ea%b5%ac-%ec%8b%a0%ed%95%99%ea%b5%90-%ec%a0%84%ea%b2%bd봉사할 시간을 내기 어렵다. 그래서 시간을 내지 못하는 대신 헌금과 기부를 통해 교회를 섬긴다.” 수많은 학교와 복지 시설이 후원자의 이름을 달고 있다.
홍콩의 카리타스(가톨릭 사회복지회)는 정부를 제외하면 가장 많은 사람을 고용하는 기관으로 손꼽힌다. %ed%99%8d%ec%bd%a9%ea%b5%90%ea%b5%ac-%ec%b5%9c%ea%b3%a0%eb%a0%b9-%ec%82%ac%ec%a0%9c%ec%9d%b8-%ec%98%81-%ec%8b%a0%eb%b6%80%ec%99%80-%ec%b5%9c%ec%97%b0%ec%86%8c-%ec%8b%a0%ed%95%99%ec%83%9d-%eb%b2%a0병원과 지역 센터 등 여러 복지 시설을 운영한다. 가톨릭교회가 있는 거의 모든 나라에 카리타스가 있지만, 유독 홍콩 카리타스는 우리 귀에 익다. 정치적 이유로 한국 교회가 북한을 직접 지원하지 못하던 시절, 여러 해 동안 홍콩 카리타스를 통해서 물자를 보냈기 때문이다. 그때 홍콩 카리타스의 대북 프로그램을 책임지고 수십 차례 북한을 방문한 실무자는 스위스 여성 카티 젤베거였다. 20년 전 우리 떼제공동체가 북한 지원을 시작할 때, 취리히 공항으로 찾아간 나에게 그는 많은 도움말을 해주었다. 카티는 나중에 스위스 정부 개발협력기구의 대표로 평양에서 5년 동안 일했다. 우리는 베이징과 평양에서 만나곤 했다. 카티는 지금도 자신이 세운 작은 NGO를 통해 북한 어린이를 돕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또 한 가지 홍콩교회의 특이한 점은 유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교구와 수도회를 비롯해 교회 단체가 운영하는 학교가 교구 규모나 신자 비율에 비해 아주 많다는 사실이다. 물론 가톨릭 학교라고 해도 신자 비율은 그리 높지 않다. 교목실이 있고, 학교 사목이 활발한 곳이 썩 많지는 않은 것 같다. 그래도 많은 성당이 학교 울타리 안에 있거나 바로 붙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홍콩 가톨릭교회는 대단히 잘 조직되어 있다. 하지만 영적으로는 빈곤하다.” 교회 사정을 잘 아는 한 원로 신자의 말이다. 수많은 교육기관과 복지 시설을 운영하지만 무언가 모자란다는 말이다.

홍콩교구 신자 60만 명 가운데 20만 명가량은 필리핀 사람이고, 대부분은 가사 도우미들이다. 많은 본당에 광둥말과 영어 미사가 있다. 개신교회에도 필리핀 신자들을 위한 예배와 사역이 활발하다. 매주 수백 명씩 모이는 곳도 적지 않다. 어느 일요일 오후 홍콩 유니언 교회의 필리핀 예배에 갔더니 참석자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가 여성이었다. 이들이 주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홍콩은 대단히 국제적인 도시다. 외국인의 비율이 높고 사람들은 대단히 개방적이다. 과거에 선교사들은 홍콩에 진출해서 학교를 많이 세웠다. 홍콩교구에는 외국 선교사들이 여전히 여러 본당에서 일한다. 한국외방선교회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파견된 한국 사제들도 현지인 사목을 한다. 비록 방인 사제가 부족한 탓이라 해도 이 외국인 사제와 수도자들은 지역의 경계를 넘어서는 보편 교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목 일선에 들어서기 전에 선교사들은 2년 동안 광둥말을 익혀야 한다. 어떤 선교사는 어려운 중국말 그것도 9개 성조가 있는 광둥말을 익히는 것이 순교에 가까운 과정이라며 웃었다.

이탈리아의 선교회인 피메(PIME, 교황청립 외방전교회)는 홍콩 교구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클리어워터 베이(清水灣)길 843번지. 바닷가 언덕에 자리한 피메 홍콩 지부는 내가 언제든 가서 쉴 수 있는 곳이다. 한때는 100명 가까운 회원이 홍콩에서 활동했지만, 이제는 30명이 채 되지 않는다. 아흔 살의 마리오 신부와 원장 피에로 신부는 프랑스에서 온 한국인 수사를 막냇동생처럼 편히 맞이해준다. 국제 모임을 준비하면서 매일같이 혼잡하고 소음 가득한 거대 도시를 다니다가 이곳에서 나는 모자란 잠도 보충하고 깊이 심호흡한다. 이 집의 5층에 있는 성당의 한 면은 전체가 유리창이다. 창밖 발아래로 펼쳐진 바다가 멀리 보이는 섬들과 함께 평온하고 아름답다.

성당에서 나오면서 보면 맞은쪽 벽 전체를 이 선교회 출신의 순교자들 사진이 가득 채웠다. 19세기 말부터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미얀마, 중국과 홍콩 등지에서 순교한 이들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서른 살 안팎의 젊은 사제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동아시아로 와서 젊음을 불살랐고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순교’는 신약성서에서 증거라는 뜻으로 쓰인 말이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것이다. 이런 선배를 둔 오늘날의 선교사들은 홍콩에 와서 무엇을 증거하도록 부름받은 것일까? 이 자본과 기회의 도시, 경쟁의 도가니 속에서 2,000년 전 예수의 복음을 살아가는 것을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홍콩은 1차 아편전쟁에서 패한 중국이 영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인 난징조약(1842년)을 통해 영국에 할양한 땅이다. 19세기 서구 제국주의가 중국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아편전쟁은 중국인에게 굴욕의 사건으로 집단 무의식에 깊이 새겨져 있다. 당시의 교회와 선교사 다수는 선교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중국보다는 서구 열강의 편에 섰다. 가톨릭의 경우 모든 주교와 성직자 다수가 외국인이었으니 그들의 신앙심과 애국심이 연결된 당연한 귀결이라 볼 수도 있겠다. 난징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가톨릭 대성당에서는 사은찬미가가 울려 퍼졌다. 20세기 초 일부 프랑스 선교사는 중국과 프랑스의 이익이 충돌할 때, 신자들은 교회의 안위와 발전을 위해서 프랑스 편에 서야 한다고까지 가르쳤다. 당시 중국인의 눈에 교회는 어떻게 보였을까? 오죽하면 “그리스도인 한 사람이 더 늘어나면 중국인 한 사람이 줄어든다(多一个基督徒,少一个中国人)”라는 말까지 생겼을까.

제국주의의 시대는 벌써 오래전에 끝난 것일까? 오늘날 선교사들은 100년 전과 달리 자국 중심의 생각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해서 씁쓰레한 기억이 하나 떠오른다.

작년 가을이었다. 북한에 갔다가 베이징을 거쳐 홍콩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청년들과 함께 저녁 기도회를 하기로 한 본당의 사제가 “조금 일찍 와서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고 초대했다. 식탁에는 마침 그 본당에 머물던 미국인 신부 한 사람과 그의 동기생도 있었다. 두 사람은 홍콩에서 광둥말을 막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들이 속한 선교수도회에서 가장 최근에 서품을 받은 이들이라고 했다. 내가 평양과 베이징을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몇 가지 질문을 던졌고, 나는 거기에 간단히 답했다. 디트로이트 출신의 젊은 신부는 북한과 중국에 대해 대단히 적대적이고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다. 나는 약간의 유머를 섞어 “유럽에서는 오히려 미국 대통령이 더 예측 불가하다고 우려하고 있어요.” 그러자 미국 신부가 태클을 걸었다. “그건 보는 관점의 차이죠.”

“무슨 뜻이죠?” 하고 그를 바라보니 “사람마다 보는 관점이 다를 뿐이죠. 우리는 마침내 미국의 이익을 이야기하는 대통령을 갖게 되었어요. (그러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나는 둔기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처음 만난 젊은 신부와 그것도 기도회를 앞둔 저녁 식사 자리에서 논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화제를 바꾸었다. “디트로이트가 다시 살아난다고 들었는데 그런가요?”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부정부패한 사람들 한 무리가 지금 감옥에 가 있어요!”

식사 후에 본당의 보좌신부가 내게 말했다. “놀라셨죠? 저 신부는 트럼프의 광팬이예요. 자기 방에 ‘트럼프와 함께 위대한 미국을’이라는 구호를 커다랗게 써서 벽에 걸어둘 정도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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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은 종교박람회장을 방불케 한다. 수많은 종교와 교파가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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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회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나는 그날 밤 잠을 잘 이룰 수 없었다. 그 미국인 신부의 선배들은 내가 학교에 다닐 때 한국과 중남미 독재 국가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노력하다가 위협받고 추방되고 살해되었다. 미국 가톨릭의 상당수가 보수적이라고는 들었다. 하지만 사제가 ‘정의’보다 ‘이익’(그것도 ‘미국의 이익’)을 이야기하고 또 그런 정치인에게 환호하는 것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 삶을 바치려는 사람의 정치의식이 그 수준이라면? 그가 두 해 동안 광둥말을 배워서 사목과 설교를 시작한다면, 그것은 어떤 복음일까? 공부와 경험을 통해 그가 더 진화하고 변화되기를 기도할 뿐이다.

젊은이와 혁명

성삼일 동안 츤완의 성공회 교회에서 청년 10여 명과 함께 침묵 피정을 했다. 각자 네 복음서 가운데 하나를 택해서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를 천천히 읽었다. 청년들에게 파스카 신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라고 했다.

짧은 나눔 시간에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청년들의 삶은 힘들다. 물가는 계속 올랐지만, 대졸자의 초임은 여러 해 동안 변화가 없다. 지난 7, 8년간 부동산 가격이 서너 배까지 뛰어올라 대부분 홍콩 젊은이는 앞으로 자기 아파트를 장만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

몇 해 전 민주화를 위해 홍콩 거리를 메웠던 노란 우산의 물결이 지나고 아무런 변화도 없자 많은 사람이 깊이 실망했고 일부는 환멸을 느꼈다. 세대 간의 양극화 현상이 심해졌다.

“부모님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세요. 정부를 믿고 힘을 실어줘야지, 왜 반대하고 나서느냐고 하셔서 이제는 이야기를 안 하려고 해요.”

“우산 운동 뒤로 우리 세대는 내가 봐도 변했어요. 이제 청년들은 쉽게 격앙해요. 감정 조절이 잘되지 않아요.”

“젊은이들에게 교회는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어요. 우리가 싸울 때, 교회는 어디에 있었는지 묻고 싶어요.”

“내 주위에는 도교나 불교의 선에서 마음의 평정을 구하는 청년들도 있어요.”

사정이 이렇지만, 현실이 어렵다고 해서 자포자기하거나 도피하지 않고 담대히 길을 찾아 나서는 젊은이도 있다. 안셀름은 건축을 공부하고 설계사로 일한다. 결혼하고 가족이 있어도 일에 치여 사는 동료와 상사가 그의 눈에는 가련하게 보인다. 그는 의미 없이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1년 정도 시간을 내서 우선 홍콩 모임 준비를 돕고 이어서 프랑스 떼제에 가서 자원봉사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하느님이 자신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찾고 싶어 한다. 홍보 회사에서 일하는 코스모는 친구들과 마음과 힘을 모아 노숙자들을 위한 NGO를 만들었다. 매주 시간을 내서 자원봉사한다.

부활절이 지나고 며칠 되지 않았을 때, 홍콩섬에서 페리를 타고 란타우섬의 무이워항에 도착했다. 15분 정도 걸어가면, 바닷가에 50년 된 감리교 피정의 집이 있다. 평일이지만 개인 피정자가 20명가량 있었다. 아름다운 자연, 깨끗한 시설, 맛있는 음식, 영성 지도자의 동반이 있는 이곳은 너무나 바쁜 일상에 지친 도시 사람에게 쉼과 힘을 준다. 교회가 오늘날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서비스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우리는 감리교회의 요청으로 6월에 이곳에서 피정을 인도하게 되었다.

란타우섬에는 트라피스트 수도원도 있는데 다음에 가보기로 한다. 갈 때는 쾌속정을 탔지만, 돌아올 때는 보통 배를 선택했다. 시간은 20분 더 걸렸지만, 요금은 절반이다.

펑차오섬을 지날 때 그 뒤로 홍콩 디즈니랜드 휴양지가 보인다. 멀리서 봐도 동화에 나오는 것처럼 멋진 건물이다. 배가 물살을 가르며 홍콩섬을 향해 나아갈수록 수많은 여객선과 화물선이 오간다. 스모그에 덮인 홍콩섬이 눈 앞에 펼쳐진다.

배가 센트랄의 선착장에 닿기 전에 중산기념공원을 지난다. 하카인 손중산, 즉 쑨원(孫文)은 홍콩의 성공회 학교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교를 접했고, 미국인 선교사가 세운 회중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쑨원은 혁명을 그리스도교의 구원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했고, 그의 개종을 혁명이라는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오늘날 젊은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고 목적의식을 심어줄 혁명은 어떤 것일까? 다시 빌딩의 숲, 인파 속으로 스며들면서 나는 질문한다.


신한열. 떼제공동체 수사.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다가 1988년 프랑스 떼제로 가서 1992년 공동체의 수사로 종신서약을 했다. 프랑스 떼제에서 젊은이들의 국제 모임을 진행하는데, 올해는 8월 홍콩에서 열릴 동아시아 젊은이 모임을 준비하기 위해 동아시아 지역을 순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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