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영성과 성모신심을 간직한 -10호 아시아에 뿌리내린 가톨릭

아시아에 뿌리내린 가톨릭

 

순교영성과 성모신심을 간직한

베트남교회

1960년대 베트남전쟁, 이른바 월남전으로 우리와 깊은 인연이 있는 베트남은 민족이 남북으로 대치해 전쟁을 치른 근현대사뿐만 아니라 기원전 부족국가 시대부터 중국과의 관계 속에서 흥망성쇠를 겪으며 뿌리를 내린 불교와 유교문화마저도 우리와 비슷하다. 게다가 티엔쭈어자오(Thiên Chúa giáo, 天主敎) 혹은 꽁자오(Công giáo, 公敎) 등으로 불리는 베트남교회는 순교영성과 성모신심이 강한 신앙의 모습을 보인다. 베트남교회에는 1625년부터 1886년까지 약 260년간 박해를 겪어 30만 명 이상이 순교했으며, 117명의 순교성인이 있다. 또한 베트남 전통에서는 부모공경의 유교사상과 ‘터매(tho Mau)’라는 어머니 숭배사상이 오랫동안 자리했는데, 이는 각별한 성모신심으로도 이어졌다. 박해시기에 성모께서 발현해 신자들을 위로한 라방성지와 짜끼우성지는 각각 교황청과 베트남교회가 공인한 성모발현지로 신자들의 순례가 끊이지 않는다.
1975년 공산주의 국가로 통일되면서 종교활동에 많은 통제와 억압을 겪었지만, 신앙의 열정으로 뜨거운 베트남교회의 역사를 살펴보자.

예수회 선교사들의 교회 개척 시기

로드 신부 1)
베트남교회는 박해시기 민간 야사(野史)에 따라 이냐시오라는 프랑스 선교사가 비밀리에 전교를 시작했다는 1533년을 공식적인 복음화의 시작으로 여긴다. 하지만 본격적인 복음선포는 1615년 예수회 선교사들의 활동에서 시작한다. 당시 베트남은 명나라를 축출한 후레왕조(Nhà Hậu Lê, 後黎朝)가 통치했으나, 정치적 실권을 쥔 응우옌(Nguyễn, 阮)과 찐(Trịnh, 鄭)이라는 두 가문이 각각 남북을 나누어 다스렸다. 가톨릭 선교는 일본에서 추방된 예수회 선교사 부조미(Francesco Buzomi)와 카르발로(Diego Carvalho)가 다낭에 정착하면서 남부에서 먼저 시작하였다. noname011

1627년에는 프랑스인 예수회 선교사 알렉상드르 드 로드(Alexandre de Rhodes) 신부가 북부에서도 선교를 시작했다. 로드 신부는 당시 지식인과 엘리트층이 쓰던 한자 대신 라틴어를 활용한 현재의 베트남 문자를 창안하고, 『베트남어-라틴어-포르투갈어』 사전을 편찬하는 등 학술적 업적을 남기도 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서구문명과 과학사상을 전파하며 베트남의 근대화를 돕고, 새로 창안한 문자로 베트남 사람들의 문맹률을 낮추며 교리를 가르쳤다. 하지만 유일신을 믿는 가톨릭 신앙은 공자와 조상제사를 중시하는 베트남의 유교전통과 갈등을 빚었다. 베트남인의 풍습과 관습, 전통신앙을 존중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공자나 조상숭배 예식을 사회·문화적인 것으로 생각해 미신적 요소를 배제한 후 참여하도록 허락했다. 하지만 가톨릭 신앙이 베트남의 풍속과 윤리를 해친다는 편견 때문에 일찌감치 선교활동은 금지되었다.
1625년에는 남부에서 천주교를 믿거나 집에 십자고상, 성화, 성상을 두는 것을 금지하였고, 1628년에는 북부에서도 유럽인 선교사와 접촉하는 것을 금하는 명이 내려졌다. 1630년에는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장례를 치른 죄로 신자 한 명이 참수형에 처해졌고, 1644년에는 로드를 돕던 교리교사가 참수되었고, 로드 신부도 체포되어 강제추방되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북베트남에서는 1663년, 남베트남에서는 1665년에 모두 추방되었는데, 이 시기에 신자 수는 약 10만 명에 이른 것으로 전해진다.

파리외방전교회의 진출과 대규모 박해의 시작

베트남에서 영구추방된 로드 신부는 유럽으로 돌아가서도 베트남교회 설립과 선교사 파견을 교황청에 청원했으며, 베트남교회를 위한 선교활동을 계속 지원했다. 1659년 교황청은 베트남에 2개의 대목구를 설정하고 프랑스인 라 모트(Lambert de la Motte) 주교와 팔루(François pallu) 주교를 각각 감목대리로 보냈다. 두 주교는 베트남으로 선교를 가는 도중에, 1664년 시암(현 태국)의 수도 아유타야에 공동체를 조직하면서 현지인 성직자 양성과 현지 문화에 따른 토착화를 원칙으로 하는 파리외방전교회(M.E.P.)의 사목지침을 마련하기도 했다.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은 가톨릭 선교가 금지된 베트남 정세 때문에 어려움이 컸는데, 기존에 활동하던 예수회와 다른 선교방식, 감목대리의 수위권 확립과 관련한 불화 등으로도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선교활동은 계속 확장되어 라 모트 주교는 1668년에 베트남 현지인 사제 4명을 처음으로 서품하고, 1670년 아시아 최초의 방인수녀회인 ‘성 십자가 사랑의 수녀회’를 설립했다. 베트남교회는 1677년에 3개의 대목구로 확장되고, 주교와 외국인 선교사, 현지인 사제들과 수녀들, 헌신적인 평신도 교리교사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체계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했다. 특히 1771년부터 서당쫑의 감목대리를 맡은 피뇨(Pigneau de Béhaine, Bá Đa Lộc, 百多祿) 주교는 후에 쟈롱(Gia Long, 嘉隆) 황제가 된 응우옌푹안(Nguyễn Phúc Ánh , 阮福暎)이 황제가 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베트남에서 가톨릭 신앙이 확장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하지만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가 폐교되고 베트남 선교 인력도 계속 감소하면서, 19세기에 접어들어 베트남 선교활동은 차츰 약화되었다.
마르샹 신부의 순교화 2)

한편 베트남을 통일하고 왕위에 올라 비엣남(Việt Nam, 越南)으로 국호를 바꾼 쟈롱 황제는 처음에는 피뇨 주교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가톨릭 선교를 허용하며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그가 정권을 잡도록 도왔던 프랑스가 동아시아 진출을 엿보기 시작하자 선교사들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했다. 쟈롱 황제의 뒤를 이은 민망 황제(Minh Mạng, 明命)는 완고한 유교주의자로 쇄국정책을 고수하며 중국식 중앙집noname014

권적 체제를 강화했다. 쟈롱 황제의 등극에 큰 역할을 했던 레반주옛(Lê Văn Duyệt, 黎文悅) 장군은 가톨릭에 적대적인 민망 황제에게 맞서 선교사들을 옹호했지만, 그가 사망하자 민망 황제는 본격적으로 선교사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1833년 레반주옛 장군의 양아들인 레반코이(Lê Văn Khôi, 黎文𠐤)가 민망 황제를 몰아내려고 무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때 프랑스 선교사인 마르샹(Joseph Marchand)과 가톨릭 신자들이 반란군 측에 함께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58명의 천주교 신자가 처형당했다.
1848년부터 1869년까지 거의 매년 천주교를 금하는 황제의 칙령이 내려졌고, 이 금령(禁令)으로 인해 선교사와 신자들이 처형되었다. 아시아 진출을 호시탐탐 노리던 프랑스 해군함대는 구금된 선교사와 천주교 신자들을 석방하고 선교사들의 안전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라고 계속 압박을 가했다. 프랑스는 1857년 몽티니(Charles de Montigny) 사절단을 보내 베트남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유와 프랑스와의 무역과 외교를 요구했으나, 베트남 왕실이 이를 거부하자 1858년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군을 꾸려 다낭을 점령했다. 다낭이 함락되면서부터 천주교 박해가 대대적으로 시작되었다. 1858년부터 1885년에 10만 명 이상의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당했다. 그런 와중에도 천주교 신자는 크게 늘어 18세기 초에 35만 명이던 신자 수는 1885년에 68만 명으로 2배 가까이 늘어났고 대목구도 8개로 늘어났다.

프랑스 식민통치와 베트남 독립운동

프랑스는 1885년 베트남을 점령하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세웠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코친차이나(남부), 안남(중부), 통킹(북부)으로 분할해 통치했고, 1893년에는 라오스까지 합병해 오늘날의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통치했다.
프랑스 식민통치 기간에 가톨릭교회는 선교의 자유를 누리며 급속도로 발전했다. 곳곳에 크고 화려한 성당이 건축되고, 신학교, 수도원 등 다양한 교회시설 건축이 이뤄졌다. 선교사들은 특히 학교교육에 큰 관심을 보여 여러 학교를 설립했다. 1933년에는 응우옌바똥(Nguyễn Bá Tòng) 신부가 베트남인 첫 번째 주교로 서품되었다.

19세기 말에 지어진 호찌민시 노트르담성당 3)
제2차 세계대전으로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지배가 약화되자 일본은 1940년 중일전쟁을 빌미로 베트남에 주noname01564둔하고, 응우옌 왕조는 일본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모색했다. 이와는 별도로 1941년에는 호찌민(Hồ Chí Minh, 胡志明)이 이끄는 베트민(베트남독립동맹회, Viet Minh, 越盟)이 결성되었다.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패배하고 항복하자, 호찌민은 8월 혁명(전국적인 민중 봉기)을 일으켜 베트남 독립을 선포해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수립하고 주석에 올랐다. 베트남교회는 민족의 독립을 축하하며 함께 기뻐했지만, 다수의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교회가 프랑스 식민권력에 부역했다는 반감이 컸다.

 

민족분단 시기 교회의 딜레마

소련과 중국의 공산화 이후 동남아시아까지 공산화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미국과 베트남을 다시 지배하려는 프랑스는 베트남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일본 군대의 무장해제를 빌미삼아 연합군을 베트남에 주둔시켰다. 당시 베트남 남부에는 프랑스에 우호적인 코친차이나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46년 베트남 남부에 다시 주둔한 프랑스가 하이퐁을 공격하면서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났다. 소련과 중국은 베트민이 이끄는 베트남민주공화국(이하 북베트남)만을, 미국과 영국은 프랑스가 지원하는 남부 코친차이나공화국과 그 후신인 베트남국(이하 남베트남)만을 각각 국가로 인정했다. 소련과 중국 공산당의 지원을 받은 베트민과 미국의 도움을 받은 프랑스 군대는 8년에 걸친 인도차이나 전쟁을 치렀다.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교황청은 강력한 반공주의 정책을 표방했는데, 1949년 7월 칙령을 발표해 어떤 식으로든 공산당을 지지하거나 협력하는 신도들은 파문을 면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에 1950년 11월, 베트남 가톨릭주교회의는 성명을 내어 가톨릭 신자들이 공산당이나 베트민(越盟)의 운동에 가담하거나 협력하는 것을 금지했다. 인도차이나 전쟁은 베트남의 독립에 반대하는 프랑스에 맞선 전쟁이었는데, 이를 공산당에 대한 협력으로 보는 교회지침 때문에 민족의 독립을 갈망하는 신자들은 매우 곤혹스러웠다.noname012342534623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 군대가 패전하면서 전쟁은 끝났지만, 그해 7월 제네바 협정을 통해 베트남은 북위 17도를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이에 북베트남은 사회주의를 따르고, 남베트남에는 친서방 정권이 세워졌다. 제네바 협정에 따라 남과 북에 있는 주민들에게 거주지 선택권을 주면서, 북베트남에 살던 65만 명의 신자들과 대다수 사제, 수도자가 남베트남으로 이주했다. 남베트남으로 내려온 이들이 대부분 가톨릭 신자다 보니, 북베트남 정부에서는 천주교가 민족과 나라를 배신하는 종교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각인되었다. 북베트남 정부는 가톨릭 신자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완전한 종교자유를 약속했지만 이들의 탈주를 막지는 못했다. 설득이 소용없자 조직적으로 남부로 탈출하려는 이들을 체포해 재판에 넘기거나 처형하기도 했다.

북베트남 정부는 1955~1956년에 농지개혁을 단행했는데, 대부분 농민이던 가톨릭 신자들은 큰 타격을 받았다. 부농들이 인민재판으로 10만 명 이상 사형을 당하고, 강제 농업농장이 만들어지면서 이에 저항하는 농민들은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교회도 모든 재산과 토지를 몰수당했고, 성당 안에서 미사는 드릴 수 있었지만 교리교육이나 신자 방문 같은 선교활동은 금지되었다. 1955년 북베트남 정부는 중국교회처럼 ‘애국천주교통일위원회’를 설립해 교회를 분열시키려 했으나, 주교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와 달리 남베트남 교회는 북에서 내려온 신자들로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가톨릭 학교 설립도 많이 늘어났고, 의료와 사회복지 영역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특히 남베트남의 지도자인 응오딘지엠(Ngô Ðình Diệm, 吳廷琰)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 상당수가 가톨릭 신자라서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도 커졌다. 남베트남의 정치인과 교회지도자들은 철저한 반공주의 노선을 걸었다.
1960년, 요한 23세 교황은 베트남에 교계제도를 세워 3개 관구에 17개 교구를 설정했다. 북부 하노이관구에 9개 교구, 중부 후에관구에 3개 교구, 남부 사이공관구에 5개 교구를 세웠고, 모두 베트남인 주교를 교구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분단 시기 동안 북베트남 교회는 외부 세계와 거의 단절되었다.

베트남전쟁과 공산화 통일

가톨릭의 영향이 강하던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이 독재정치를 하고 국민 대다수가 믿던 불교를 탄압하면서, 정부에 저항하는 무쟁투쟁이 본격화되었다. 1960년 결성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이 남베트남에서 세력을 확장했고, 응오딘지엠은 1963년 군사쿠데타로 실각해 처형되었다.
베트남이 공산화되는 것을 우려한 미국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베트남전쟁을 공식화했다. 미국은 엄청난 폭탄을 북베트남에 투하하고 막강한 군대를 동원했으나, 베트남군의 끈질긴 저항과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한 반전 여론에 밀려 결국 1973년 파리협정을 맺고 철군하였다. 10여 년에 걸친 전쟁을 치른 후 북베트남의 총공세로 다낭과 사이공이 차례로 함락됨으로써 베트남은 결국 1975년 공산당이 통치하는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으로 통일되었다.

베트남에서 탈출한 보트피플 5)
공산화된 베트남 정부는 서방과의 통상금지 정책을 하며 고립정책을 시작했다. 더군다나 1978년 캄보디아를 공격해 크메르루주(캄보디아 공산당)를 몰아내고 10년간 캄보디아를 지배하면서 중국과도 긴장이 고조되어 베트남 정부는 오로지 소련에만 의지하게 되었다. 이런 고립 상황으로 인해 베트남은 곧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는다. 정치적 억압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베트남 국민들은 결국 대규모 탈출을 시도하였다. 1975년부터 1990년 사이 베트남을 떠난 ‘보트피플’의 수는 약 90~100만 명에 이른다.

공산화로 통일되면서 분단시기에 견고한 반공주의 태도를 보였던 가톨릭교회의 수난은 더 심해졌다. 통일정부는 반투안(P.X.Nguyễn Vãn Thuận) 대주교가 남베트남 정권과 관계가 있었고, 민족해방(통일)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이공대교구장으로 인정하지 않고 구금하다가 1991년 추방했다. 제네바 협정 이후 남으로 내려왔던 신자들은 수용소에 억류되어,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에 적합하도록 집중 개조학습을 받아야 했다. 많은 이들이 수용소에서 죽거나 병들며 고통당했다. 북베트남에서 그러했듯 남베트남 교회가 운영하던 학교341나 병원, 사회복지 시설 등은 모두 국가에 귀속되었고, 교회활동과 종교서적은 금지되었다. 신학생 선발 인원과 자격에 대해서도 정부가 2년마다 입학허가를 하고, 1975년에는 교황사절과 모든 외국인 선교사를 추방했다. 정부의 통제에 반발하는 이들은 정부승인 없이 몰래 서품을 받고 ‘불법적인’ 지하교회 사제로 비밀리에 활동해야 했다.

베트남 정부와 공산당은 가톨릭교회가 ‘모든 외국으로부터의 종속에서 자유로운 독립교회’가 되도록 요구하며, 사회주의를 위해 봉사하도록 요구했다. 1980년 베트남 주교들은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던 두 개의 주교회의를 통합해 ‘베트남가톨릭주교회의’를 결성했다. 베트남 주교회의는 1980년 공개서한을 통해 과거 역사에서 식민세력과 함께했던 ‘어둠’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했다. 1983년에는 베트남 공산당의 주도로 전국 ‘애국천주교통일위원회’가 설립되었다. 198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박해시기 순교한 안드레아 둥락 사제 등 117명의 순교성인을 로마에서 시성했다. 이때 베트남 정부는%e3%85%82436%ec%a3%a0

‘식민주의자들의 주구(走狗)’를 시성한다며 공식대표단의 시성식 참석을 불허했다.

도이머이 정책과 종교 자유 확대

베트남 공산당은 경제적 어려움이 커지자 1986년 사회주의 계획경제 모델을 버리고 시장경제의 많은 요소를 포함한 개혁정책 ‘도이머이(Đổi Mới, 𣌒𡤓)’로 전환했다. 그리고 1989년 베트남 군대를 캄보디아에서 철수시키면서, 1991년 중국과 국교도 정상화했다. 1994년에는 미국이 베트남의 경제봉쇄 조치를 해제하고, 1995년에는 수교하면서 적대관계를 청산했다.

이런 개방 움직임은 가톨릭교회가 다시 활동을 재개할 기회가 되었다. 붕괴하기 직전의 낡은 성당을 대신할 많은 성당이 지어졌고, 교회단체와 신자들이 정권의 묵인하에 자선활동 등을 시작했다. 선교의 자유는 얻지 못했지만, 종교의 자유는 점차 확대되었다. 1999년 8월, 베트남교회는 라방 성모 발현 200주년을 맞아 전국 차원의 성대한 기념식을 거행했다.

오늘의 베트남교회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라 종교의 자유가 없었지만 문화적으로 불교와 유교의 영향이 크고, 실용주의적 종교정책을 펴면서 제한적으로 종교활동이 허용되고 있다. 베트남의 종교는 불교가 70% 정도를 차지하고 그리스도교가 약 8%, 까오다이교(Đạo Cao Đài, 道高台, 세계 5대 종교 신앙을 절충한 혼합종교)와 호아하오교(Đạo Hòa Hảo, 道和好, 불교에 바탕을 둔 신흥종교) 등의 신흥종교도 있다.

2016년 교황청 통계(2014년 말 기준)에 따르면 베트남교회 신자 수는 약 671만 명으로 전체 인구 중 7.4%를 차지한다. 베트남교회는 하노이, 후에, 사이공 등 총 3개 관구 26개 교구에 2,979개 본당이 있어 공산권 국가임에도 필리핀교회만큼이나 성당이 많다. 사제성소자 수는 많지만, 정부가 신학생 선발과 사제서품 승인 등을 통제해 크게 늘지 않는다. 그래도 3,601명의 교구사제와 1,320명의 수도사제가 있고, 남자 수도자 2,644명, 여자 수도자 16,884명으로 동남아시아 국가 중 수도자의 수가 가장 많다. 수도회마다 성소자도 많다.

베트남교회는 교회와 민족 간의 화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베트남주교회의는 2010년 교계설정 50주년을 맞은 특별성년을 보내면서 공개적인 발표를 통해 또다시 ‘참회’와 ‘사과’를 언급했다. 45677%e3%85%91

또 공산국가인 베트남교회는 주교임명 과정에서 정부와 교황청이 협상을 거친다. 최종적으로는 교황이 주교를 임명하지만, 베트남 정부가 바티칸에 제출되는 주교 후보자 명부에 대한 동의권을 행사하고 바티칸의 결정을 확인하는 것이다. 주교임명을 두고 교황청과 갈등하는 중국교회에도 이 방식이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도이머이’가 도입된 이후 개방 분위기가 강해지면서, 교회는 제한적인 종교정책을 완화해줄 것을 정부에 계속 요청하고 있고, 사회주의 정권이 압류한 교회 토지와 기초 시설을 되돌려달라는 요구도 하고 있다. 공산정권 치하에서 투옥되었다가 추방되었던 반투안 추기경은 올해 5월 가경자로 선포되었고 현재 시복 추진 중이다. 베트남교회는 정부가 직접 개입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쉽지 않은 교육, 의료나 사회복지 등 사회적 영역에서의 참여를 조금씩 확대하고 있다.

베트남은 경제성장이 급속도로 이루어졌지만, 그에 따라 빈부격차가 심해지면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 요청이 높아지고 있다. 이에 교회는 노숙자와 장애인, 빈민, 경제발전의 여파로 이혼과 마약중독이 늘면서 버려지는 아이들을 보호하고 돌보는 활동을 하고 있다. 베트남 사회는 정부의 산아제한 정책과 남아선호의 유교문화, 성개방 풍조로 인해 낙태문제가 유난히 심각하여, 이에 대한 교회의 생명운동도 확산되고 있다.

 


 

[사진 출처]

* 본문에 실린 사진들은 공유라이선스 CCL(Creative Commons License) 저작물로 저자와 출처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알렉상드르 드 로드 신부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Derhodes.jpg.

2) 마르샹 신부의 순교화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Martyrdom_of_Joseph_Marchand.jpg.

3) 호치민시 노틀담성당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Bas%C3%ADlica_de_Nuestra_Se%C3%B1ora,_Ciudad_Ho_Chi_Minh,_Vietnam,_2013-08-14,_DD_04.JPG.

4) 남쪽으로 오라는 선전포스터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306-ppb-225-2012-001-pr.jpg.

5) 베트남에서 탈출한 보트피플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35_Vietnamese_boat_people_2.JPEG.

6) 라방 성모발현성지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Tượng_Đức_Mẹ_La_Vang.JPG.

7) 반 투안 추기경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Phanxicô Xaviê Nguyễn Văn Thuận.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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