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에 도전하는 공동체- 9호 예수살이공동체 ‘산위의 마을’ 박기호 지도신부

시대에 도전하는 공동체

공동체 역사로 보는 치유와 대안의 삶

박기호 (예수살이공동체 ‘산위의 마을’ 지도신부)

예수살이공동체에는 청년들의 공동생활 공간인 ‘밀알의 집’이 있다. 각자 직장과 학교에 다니지만, 함께 모여 기도하며 소비와 지출에 대한 반성적 생1318155868_00405246201_20111010활을 공유하면서 20년 동안 운영되고 있다. 함께 하는 더부네들의 동기와 목적이야 어떻든 불편한 생활 속에서 함께 사는 기술을 훈련하는 생활은 평생 큰 궤적으로 남을 것이다. 요즘은 OB팀을 중심으로 좀 더 적극적으로 생활을 공유하는 도시공동체를 추구하는 논의도 일어나고 있다 한다.

왜 공동체인가를 또 묻는다

 예수살이공동체 운동은 소비문화 시대에 소유로부터의 자유,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기쁨, 세상의 평화를 위한 투신으로 살아가자는 실천신앙 운동이다. 도시생활에서 소비문화로부터의 주체적 삶을 추구하는 ‘무브먼트(Movement community)’와 농촌에서 소유의 공동생활체로 살아가는 ‘쉘터(Shelter: Living community)’라는 두 방향에서 진행되고 있다.

20세기 초부터 한국 사회에서는 동광원, 신앙촌, 예수원, 야마기시즘 등 공동생활 공동체가 탄생하고, 4H 클럽, 가나안농군학교 등 의식화 교육 성격의 운동이 있었다. 대부분은 크리스챤 공동체이다. 진실한 신앙의 삶을 확보하려는데 그 목적의식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물론 경제, 자녀교육, 문화적 동기들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필자는 ‘산위의 마을’에 사는데 방문자들은 “이건 현실도피적인 것 아닌가?”라고 묻기도 한다. ‘현실 도피’란 규정은 대단히 정확한 표현이다. 우리 ‘산위의 마을’처럼 공동소유와 자급노동으로 살아가는 공동체를 ‘쉘터(Shelter)’라고 부른다. 피난처라는 뜻인데 공동체를 뜻하는 ‘커뮤니티(Community)’라는 언어의 프리즘(Spectrum)이 너무 다양해서 공동생활 공동체(Living community)를 쉘터라 한다.

무소유의 공동생활 공동체는 세계 곳곳에 현존하며, 오랜 역사를 이어왔고, 영화·예술·문학작품 등을 통해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종교영성이 그 중심을 견인해 오고 있어서 종교집단이라는 다소 부정적 인상이 강하다. 우리 가족들은 모두 도시생활이라는 현실로부터 도피해 왔다는 사실을 부정해 본 적이 없다. 대신에 반문한다. “도피는 누가 하는가? 살고 싶은 사람만이 도망가는 것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으려는가?”

우리는 오늘의 현실이 사람 사는 환경이 아닌 죽음의 악령이 포박하고 있는 삶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정말 살고 싶은 마음과 의욕으로 도망을 결단하고 피난 항구를 찾아온 것이다. 창세기의 창조는 인간의 욕망과 탐욕으로 실패했고, 하느님께서는 두 번째 창조를 하시는데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피난 방주를 만들어 피하도록 하셨다. 현실도피는 노아의 방주를 추구하는 투철한 생명의 보존 방식이며 새로운 창조질서다. 그런데 우리를 현실도피로 보는 당신들이 사는 삶은 무엇이 만족스러워 도피하지 않는가? 이 현실이 살만한 세상이거나 개조 가능한 세계로 보는가? 성공이란 다른 누군가의 좌절을 전제하고, 내가 행복하기 위해 타인의 행복을 침해하는 제로섬 게임 같은 자본과 상품주의 구조들, 공존과 공동승리와 경축이 불가능한 삶을 어떻게 예찬할 수 있는가? 우리는 나 자신의 건강과 삶과 내 자녀의 운명을 도시의 삶에 맡길 수가 없다. 도망자들이다! 도피마저 온전한 삶이 못 되는 현실이다.

n-refugees-628x314

공동체는 피난처, 우리는 도피자들이다

 개인도 사회도 생명체이고 인격체다. 사람에게는 위기를 피하고 안전함을 추구하고 상처를 치유하는데 필요한 센서가 탑재되어 있다. 자신의 삶이 상처와 아픔과 고통과 고난으로 둘러싸여 있을 때, 스스로 치유와 대안의 삶을 모색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 창조질서다. 공동체가 나타났다는 것은 단순한 군집의 생활이 아니라 한 시대환경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이면으로 갖는다. 사상의 출현은 시대 현상에 대한 대안과 진로를 의미하는데, 공동체는 그 대안을 삶으로 실현하는 현상인 것이다. 그래서 새로 등장하는 공동체를 보면 시대의 문제를 볼 수 있고, 시대의 징표를 보면 어떤 대안적 삶이 나타날 것인지를 가늠할 수 있게 된다.

가령 가톨릭 전통의 수도원이 나타난 영성운동에서도 그 시대상을 알 수 있다. 4세기 그리스도교가 종교자유를 넘어 국교화되고 입교자가 몰려올 때 성 안토니오는 사막을 찾아갔다. 하느님은 사막으로 쫓겨나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로마 사회가 사치와 환락에 빠져 있던 6세기에는 ‘기도하고 노동하라’는 성 베네딕도의 수도원 운동이 일어났다. 13세기 교회가 위용을 과시하는 성전 건축에 열을 올리면서 부를 숭배하게 되자 성 프란치스코의 청빈운동이 일어났다. 18세기 산업화에 청소년들이 노동으로 희생될 때 요한 보스코의 살레시오 운동이 일어났다. 수도원은 교회와 시대의 부정성에 역류하는 영성운동의 결과로 파악된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도미니코, 대 데레사 등의 활동 배경에는 정신세계가 깊이 속앓이하는 시대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존하는 쉘터로서 공동체의 태동과 삶도 이상, 투신, 생활구조의 차원에서 수도원 수도자 운동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당대의 심각한 사회와 시대 문제를 삶으로써 극복하고자 하는 대안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중세 이후 근대 현대에 이르는 대표적인 경우들로 한정해서 쉘터 태동의 시대 배경을 집어내 살펴볼까 한다.

시대의 병고는 영성운동을 낳고

 현존 쉘터공동체의 대표적 위치에 있는 ‘아미쉬(Amish)’, ‘메노나이트(Mennonites)’, ‘후터라이트(Hutterite)’ 등 크리스챤 공동체들은 ‘신앙의 박해’라는 상황에 뿌리를 둔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수도사제였던 마르틴 루터의 신앙개혁 운동에 의해 로마 가톨릭에 승리하고 개신교단을 탄생시켰다. 루터를 이어받은 칼뱅은 집정관 출신으로서 새로운 권력이 되었다. 같은 시기 재세례파(Anabaptist)가 등장한다.

그들은 “우리가 신앙개혁운동을 일으킨 것은 로마 교회로부터 권력을 나눠 갖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진실한 제자로 살고자 하는 데 있다!”면서 “예수의 진실한 제자가 되지 못한 이유는 유아세례로 신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예수를 자신의 순수 의식으로 영접하고 평생으로 따를 결단이 섰음을 서원하는 것이 세례가 되는 것이니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암만’ ‘메논’ ‘제논’ ‘후터’ 등 개종한 가톨릭 사제들 중심으로 교회사에 모두 등장한다. 그들은 신도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고 ‘재세례파’라고 부르는 이 신도들의 세력은 커졌다.

이에 원죄교리를 어겼다는 이유로 칼뱅주의자들의 박해가 시작되어 3천 명이 넘는 신도들이 화형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박해를 피해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게 된 동기이다. 이들의 후예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펜실베이니아 중심으로 둥지를 틀고 신앙공동체 생활을 하게 되니 이들을 ‘청교도(淸敎徒)’라 불렀다. 오늘날까지 2천여 공동체 마을을 유지하며 생활하고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아미쉬 공동체’는 암만을 추종하는 후계자들 마을이며 ‘부르더 호프 공동체’는 후터파 출신이 세웠다.

이후 공동체들은 사회변동의 차원에서 관찰하자. 19세기 말 공동체들은 모두 빵 문제(경제) 해결의 대안에서 일어났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농민의 노동력을 공장지대로 끌어들였지만 저임금으로 인해 가족의 생계를 이어갈 수 없게 했다. 19세기 초에는 사상가 3걸(三傑)이 태어났는데, 영국의 존 러스킨(1819~1900), 미국의 헨리 조지(1839~1897), 그리고 러시아의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1828~1910)이다.

존 러스킨, 헨리 조지, 톨스토이

 존 러스킨은 “국가가 경제 제도를 갖는 목적은 경제능력과 기회가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마태오복음 20장의 ‘포도원 주인의 비유’를 통해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라는 책을 냈다. 영국에서 유학하던 청년 간디는 이 책을 읽고 ‘나를 감동시킨 가장 훌륭한 책’이라고 수필집에 기록했다. 헨리 조지는 “토지는 하느님의 것이며 인간은 한 평의 땅도 늘릴 수 없는 신의 창조물이기에 사유화할 수 없다”는 사상으로 토지의 공유화(地公主義)를 주장했다. 지공주의란 말 그대로 땅과 하늘, 햇빛과 공기, 물은 공공재라는 ‘토지공개념’이다. 따라서 토지는 소유할 수 없고 토지 위에서 생산한 것만 개인이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은 국가에 임대료를 내고(세금) 사용권만 갖고 이용료가 곧 국가 운영기금이 된다는 진술을 『진보와 빈곤』이란 저술로 제시했다.

당대 세계의 최고 문호로서 신학자였고 농민운동가였으며 공동체주의자였던 톨스토이는 이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자신의 공동체주의로 실천했다. 그는 “노동을 했는데도 가족이 굶주린 것은 노동력을 착취당했기 때문이다. 농민들끼리 모여 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자급하여 살면 충분하다”면서 자신부터 저택과 농장이 있는 ‘야스나야 폴랴나’를 톨스토이즘 구현자 공동체에 내어놓았다. 톨스토이의 문학적 저명성만큼이나 농민공동체 운동의 반향은 커서, 세계 각국의 문인들이 톨스토이를 본받아 공동체 운동에 투신했다. 일본의 ‘아타라시키 무라(新しき村)’ 마을은 당시 톨스토이에 심취했던 문인 무샤노코지 사네아쓰 선생에 의해 설립된 공동체다.

경제문제를 공동체로 극복하고자 시도된 공동체들은 모두 풍요롭게 성공했고 자립했으며 20세기 중반까지 공동체 이념의 주류가 되었다.

공동체는 시대의 징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산업화의 주류가 된 미국 사회에서는 1960년대를 중심으로 두 가지 공동체 사상이 등장한다. 첫째는 전통적 권위주의와 위선으로 지배하는 권력에 맞서 자유와 선, 평화를 추구하는 ‘히피’ 운동이다. 히피들은 통킹만 포격 사건으로 발발된 월남전이 미국 정부의 조작으로 일으켜진 불의한 침략전쟁임을 폭로하면서 반전운동에 앞장섰다. 존 바에즈, 비틀즈의 존 레넌 등이 활동했고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도 히피공동체 출신이다. 현재도 히피공동체는 여러 마을을 이루고 2천여 명의 가족들이 살고 있다.

둘째는 명상운동이었다. 산업화 사회는 성공하였는데 인간이 보이지 않는, 인간 상실의 현상이 문제로 상정되었다. 국가주의와 분업화된 노동의 비인간화 문제가 이미 찰리 채플린의 문화운동에서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960년대 미국의 대학사회에서 교수와 지성인들을 중심으로 기술문명에 압도되는 인간성을 되찾기 위한 명상운동이 공동체 주류를 이루었다. 미국에 초대된 인도의 라즈니쉬, 크리슈나무르티 등의 이름과 지도력이 유명해진 시기이다. 명상공동체 운동은 지금도 경제발전을 이룬 국가들에서 세력이 줄어들지 않고 있다. 국가주의, 군비경쟁, 전쟁, 산업사회화에 거슬러 인간성을 되찾기 위한 평화의 삶 공동체 운동이다.

1980년대에 이르러 대기오염과 지구온난화, 지구와 환경 위기의 문제가 화두가 되었다. 존재론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성찰과 동시에 개인주의 집단, 인종과 국가 중심주의 등 이기적 태도가 지성의 비판 대상이 되고 가치 중심적 세계관에 대한 공감이 일어나면서 환경 운동, 생태주의 운동의 형태로 등장했다. 대학은 생태학, 환경학 관련 학과가 늘어났으며 생태문제에 대한 기초적 이해는 현대인의 필수 교양이 되었다. 그린피스 활동, 스코틀랜드 핀드혼과 인도의 오르빌 등의 공동체들이 이때 탄생한 것이다. 이 무렵 탄생한 공동체들은 재래식 화장실과 태양열 이용 시설 같은 특징도 있었다.

1990년대 이르러 이미 폐지된 금본위제도 위에 미 달러가 기축통화로 세계 교역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경제의 핵심이 제조 상품에서 금융으로 전환되면서, 주식에서 선물과 펀드 등 금융상품으로 세계 경제를 투기판으로 만들고 부동산 거품을 조장하고 신자유주의 체제를 강요했다. 산업구조는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를 기반으로 삼고 편의성, 개별성, 기술성이라는 상품주의 소비문화 구조가 현대 인류의 삶을 완벽하게 지배하게 되었다. 농업은 대량의 토지를 소유한 미국이나 호주 등 농업 국가만의 산업이 되고, 주변국들은 수입소비국으로 전락했다.

섭생의 음식에서 생활방식까지 모든 것이 세계화된 삶으로 육신과 정신, 생활과 노동, 교육과 의료, 문화와 예술 모든 분야가 거대한 구조에 가맹하게 만들어 좀비의 삶을 강요했다. 새로운 엔클로저 운동(enclosure movement, 농지 사유화)조차 생각할 수 없이 지배당한 인간의 삶은 온전히 파괴되어버렸다. 이에 대한 치유와 대안의 삶이 ‘작은 삶, 소박한 자급 농업, 자급자생 의료, 대안교육’을 추구하는 것이다. 도시를 떠나 변방에서 노동이 있는 작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 오늘의 공동체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kakaotalk_20171114_221448088

대가족 제도의 복구: 인간복지의 길

 공동체의 발생과 그 시대 배경을 간략히 살펴보았는데, 정리하면 16세기 칼뱅주의 종교박해에 의한 재세례파 공동체 등장, 18세기 자본가 세력의 지배와 착취에 따른 경제자립을 추구하는 농민공동체, 1960년대 국가주의 침탈과 산업주의에 저항하여 등장한 자유 평화주의 히피운동과 명상공동체, 1980년대 지구환경 문제의 대두로 생태주의 공동체, 1990년대 이후 투기자본 등 금융 산업의 전횡으로 지배하는 세계화 시대에는 ‘작은 삶’을 추구하는 공동체가 등장했다는 점을 보았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시대변동에 따라 나타날 공동체 운동의 화두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인간복지’를 추구하는 공동체 운동으로 전망한다. 사회복지 말고 인간복지! 출생에서 육아, 교육, 의료, 노동·직업, 결혼, 노후, 품격있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건강한 생로병사로 살아갈 수 있는 해법은 가정에 있고 대가족 제도를 복구하지 않고는 방법이 없다. 국가가 노인들에게 많은 돈을 지원해 줄 수는 있지만 돌봐줄 사람이 없는 시대가 이미 왔다. ‘연변 아줌마’들 없이는 대한민국 요양병원 운영은 불가능하게 된 현실이다. 가장 작은 기초공동체인 가정을 복구시키지 않으면 대안이 없다.

이제 돈이 아니라 건강하게 사람답게 사는 삶을 출생부터의 목표로 삼게 되는 시대가 왔다. 인간복지의 절대적 조건은 대가족제도의 복구다. 무슨 수로 대가족제도를 부활시킬 것인가? 불가능하다. 공동체가 아니고선 인간복지의 가장 확실한 장치인 대가족제도를 부활시킬 방법이 없다. 공동체가 가장 빠른 길이다.

우리는 고학력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학교에 가고 공부했는가? 공부한다는 것은 같은 사물을 지혜롭게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식별하며, 배우지 않고 할 수 있는 일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기술과 생산 능력을 배워서 평생 의식주를 해결하는 힘을 갖는 데 있다. 그리고 공부하지 못한 이웃 사람도 살아가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돕는 데 있다. 이것이 인간답게 사는 길이라면 이것만으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현 시대인으로서 나와 내 가정, 우리 사회의 인간적 삶을 복원하는 대안과 치유의 길은 공동체 의식과 영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공동체 세계관을 새롭게 탑재해야 하고 공존의 삶을 찾아야 한다.


박기호. 서울대교구 사회사목부 소속으로 예수살이공동체 ‘산위의 마을’ 지도신부로 있다.

image1, image4 http://blog.daum.net/mysook777/18100488

image2 https://www.huffingtonpost.com/angelo-martelli/refugees-and-migrants-fro_b_12315854.html

image3 가톨릭 신문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