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로 떠나는 아시아 여행 – 깊은 생각은 지혜의 샘

황경훈(아시아평화연대센터장)

깊은 생각은 지혜의 샘

무덥던 날씨가 입추를 지나자 거짓말처럼 가을이 되어버렸습니다.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겠지만 이렇게 칼로 무를 자른 듯이 단 하룻밤 만에 ‘무더위’라는 말이 무색하도록 서늘해진 적이 있었나 싶습니다. 이마에 부딪히는 바람도 선들선들한 것이 영락없는 가을 같은데, 8월도 한참 남은 날짜를 헤아리면 아마도 우주 운행이 절기에 맞추어 자로 잰 듯이 그렇게 자리를 찾아갔다기보다는 돌발적인 태풍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과학이 한참 발달한 21세기 현재도 그렇지만 미래에도 날씨의 변화에 대해 100% “예보”한다는 것은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추측해봅니다. 모든 종교의 상징물 가운데 하늘은 그 어느 것에도 견주지 못할 정도로 중요해서, 중국이나 고대 우리나라에서도 왕만이 제천의식을 주재할 수 있었다고 하지요. 또 하늘의 뜻, 곧 천명(天命)을 알고 이를 실천하는 것을 인간의 도리로 여기고 삶의 지표로 삼은 것은 조선 시대 성리학에 와서 본격화되었다고 하지만 그보다도 훨씬 오래 전부터 민간에서 전승되어 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하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고, 또 그것이 무엇이냐가 사람들을 어렵게 만들지요. 옛 선인들은 사람의 마음이 하늘의 마음이라고 여기고 군주에게 백성의 마음을 읽으라고 충고했다고 합니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는 말은 사람 속의 깊이가 우주와 같이 깊다고도 새길 수 있겠지만, ‘천지인’을 하나로 보는 전통적인 우주관과도 일치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너무 얘기가 무거워지니 이 대목에서 사람의 뜻을 어떻게 해야 잘 알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러 TV 광고가 말하듯이 ‘놀라운(incredible) 인도’로 여행을 떠나보도록 하겠습니다.

막내 공주의 지혜

옛날 인도의 한 나라에 지혜롭고 훌륭하게 다스리는 왕이 살았다. 백성은 누구나 왕을 사랑했다. 어느 날 왕은 네 딸을 불러 모아놓고 자신이 장기간 외유를 떠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만 하느님께로부터 가르침을 얻고 싶구나. 그래서 몇 달을 기도로 보내야겠다. 내가 없는 동안 너희 넷이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 놀라서 한사코 안 된다며 도리질을 하는 딸들을 다독이며 왕은 말을 이었다. “내가 없어도 너희는 잘 해낼 거다. 그럼 떠나기 전에 너희에게 선물을 하나씩 주마. 너희가 받은 선물을 가지고 다스림이 무엇을 뜻하는지 배울 수 있도록 내 기도하마.” 이렇게 말한 왕은 딸들의 손바닥에 볍씨 하나씩을 올려놔 주고 길을 떠났다.

맏딸은 그 즉시 자기 방으로 갔다. 방안에 들어가자마자 금실로 볍씨를 묶은 다음 수정 상자 안에 넣었다. 그리고는 날마다 수정 상자를 꺼내 들고 낟알을 바라보곤 했다. 둘째 딸도 자기 방으로 가서 낟알을 나무 상자에 넣은 다음 상자를 침대 밑 안전한 자리에 두었다. 사고방식이 매우 실용적인 셋째 딸은 낟알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이건 다른 쌀알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고 판단하고서 밖에다 던져 버렸다. 막내딸은 낟알을 들고 자기 방에 들어가서 그 선물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에 한 달이 가고 한 해가 다 갈 즈음에 막내딸은 드디어 선물의 의미를 깨달았다.

몇 달이 몇 해로 바뀌면서, 네 딸은 아버님이 없는 가운데에서도 그럭저럭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이 돌아왔다. 수염은 길 대로 길었고, 두 눈동자는 다년간의 기도로 얻은 지혜로 번뜩이고 있었다. 왕은 딸들을 맞아 일일이 인사를 나누면서 남기고 간 선물을 어떻게 했는지 물었다. 맏딸은 수정 상자를 들고 왔고, 침대 밑에 보관해둔 낟알을 꺼내왔으며 셋째 딸은 부엌으로 가서 쌀알 하나를 들고 와 아버지에게 내밀었다. 왕은 미소를 머금고 쌀알을 받을 때마나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끝으로 막내딸이 아버지 앞으로 걸어와 아뢰었다. “저한테는 아버님께서 주고 가신 낟알은 없사옵니다.”

그걸 어떻게 했느냐고 다그치듯 묻자 막내딸은 “아버님, 저는 낟알을 두고 무려 일 년 가까이 생각하다가 겨우 아버님 선물의 의미를 알아냈사옵니다. 저는 그 낟알이 볍씨임을 깨달은지라 들에다 심었습니다. 벼가 금방 자라서 저는 거기에서 다른 볍씨들을 수확했습니다. 다음에는 그 볍씨들을 모조리 심어서 또다시 수확을 거두었고요. 아버님, 저는 이런 일을 계속 했사옵니다. 오셔서 그 결실을 직접 보시옵소서.”

왕이 막내딸을 따라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니, 거두어들인 엄청난 볏가리가 까마득하게 멀리까지 늘어서 있었다. 자신의 작은 나라 백성을 모두 먹이기에 충분한 분량이었다.

왕은 막내딸에게로 걸어가서 황금 왕관을 벗어 딸의 머리에다 씌워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너는 다스림이 무엇인지 알아냈구나.”

그날부터 막내딸은 나라를 다스렸다. 그녀는 나라를 오래도록 다스렸으며, 지혜롭게 다스렸고 훌륭하게 다스렸다.

(출처: 『진짜 이야기를 찾아서』 (성바오로출판사, 1993))

인도는 여러모로 관심을 끄는 나라이고 실제로도 매우 다양한 민족과 언어와 삶의 양식이 갖가지 모양과 빛깔로 제멋대로 섞여 있어 때로는 경탄을 자아내기도 하고 또 때로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도 합니다. 이들의 전통 가운데 하나가 삶에서 자기 몫을 다했다고 생각하면 생을 산속에서 마감하기 위해 산으로 가는 풍습이 있다는군요. 오늘 이야기에서 왕은 그것과는 조금 다르게 ‘기도하러’ 산에 들어가지만, 아예 거기 눌러앉아 마지막 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겠습니다. 이야기는 마태오 복음의 ‘달란트의 비유’ 이야기와 매우 닮았음을 성서를 가까이 하는 독자들은 금방 알아채셨을 것입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달란트라는 돈이 아니라 볍씨를 모두에게 하나씩 주었다는 것 정도인데, 유대도 아시아 땅이어서 그런지 인도와 통하는 게 있는 듯이 보이네요. 볍씨를 받아 든 네 딸의 태도가 재미있는데, 다 각자의 개성과 생각과 삶의 태도에서 나오는 대로 행동하는 것 같습니다. 심미적인 첫째 딸은 관상용으로, 보수적인 둘째는 역시 안전이 최고이니 침대 밑에, 과단성에 실용적 사고까지 갖춘 셋째는 그냥 버려버리는데, 막내딸은 어쩌지 못하고 ‘고민’하다가 세월을 다 보내지요.

“감히 내 카톡을 씹어!” 곧바로 카톡에 답하지 않으면 드는 생각, 독자 여러분도 한 번쯤은 경험했을 정도로 ‘즉자성’의 첨단시대에 사는 이 인스턴트 문화에서 가장 성공했을 사람을 꼽으라면, 아마도 셋째 딸이 아닐까 합니다. 한 달 아니 일 년이 걸려서 내린 결정이 비록 지혜라고 하더라도 지금 이 시대에는, ‘이거 그냥 볍씨 한 톨이네’ 하고 던져버리고 아버지가 왔을 때 아무 쌀 한 톨을 들고 왔던 순발력이야말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성공하는’ 인간상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여러분이 왕에게 그 볍씨를 받았으면 어떻게 했을까 한번 생각해보시지요. 어떻게 하실래요?

막내딸이 볍씨를 받아 심어 훨씬 더 많은 수확하였다는 결론은 매우 생태적이고 교훈적이지만 너무 뻔해서 재미없으니 거기까지는 가지 말고, 아버지가 볍씨를 준 의미를 깨닫기 위해 ‘곰곰이, 요모조모로 생각하는 사이 한 주일, 한 달, 일 년이 다 갔다’는 대목에서 멈춰서 잠시 얘기를 더 해보지요. 어찌 보면 앞의 셋째에 비해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태도요 미련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일 년이 좀 과장이라면 몇 개월 정도 고민했다고 해도 매우 긴 시간 동안 한 문제를 가지고 곱씹고 되씹고, 재삼재사 생각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앉아서 생각했다면 엉덩이가 짓무르거나 아무 말도 안 하고 생각만 했다면 입에서 군내가 요란했을 충분한 시간이 지난 끝에 ‘깨달음’에 이른다고 이야기는 전합니다. 뭐 진리나 종교 얘기가 주제도 아니니 여기서 깨달음도 뺍시다. 깨달음 전에 막내는 아버지의 뜻이 그럴 것이라고 ‘알아냈다’고 말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다른 말로 하면, ‘바로 그것’이라고 ‘결단’을 내렸다는 것이라고 새길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알아냄과 결단의 과정에서 여러 생각, 이를테면 아버지가 평소에 신하나 백성을 어떻게 대했고 다스렸는지, 벼 같은 주요 식량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했고, 그 나라의 식량 상황은 어떤지 등등 한마디로 ‘자료’를 모을 수 있을 만큼 모으고 자료들과의 연관성을 캐내고 그 바탕 위에서 드디어 ‘판단’을 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과정에서 막내는 최선을 다해 아버지의 처지에서 생각에 생각을 더 하다가 마침내는 아버지와 하나가 되어 그러한 판단을 하게 됐다고 생각한다면, 단지 자료를 모으고 이리저리 생각하는 것이 선불교에서 말하는 지적 ‘알음 알이’라고 치부하는 태도는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입니다. 생각이 깊어지면 마음도 함께 따라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저 깊은 산 속에서 기도나 수련하는 수도자나 스님이 복잡한 도시의 우리와 하나로 이어져 있을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건 그냥 제 생각이니 참고하시라는 말씀으로 인사를 드리면서 알록달록 단풍이 우거지는 10월에 뵙겠습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9월호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