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구원의 약속 <선지자의 밤>-2호 문화비평

거짓 구원의 약속 <선지자의 밤>

광신도를 통해 본 한국 개신교의 민낯 <퇴마 :무녀굴>과 <선지자의 밤> Part II

 

황진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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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선지자의 밤>은 2014년 부천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소개된 뒤, 2015년에 소규모로 개봉한 독립영화이다. <선지자의 밤>에도 <퇴마> 와 마찬가지로 개신교 광신도가 외딴 곳에 교회를 짓고 여성을 납치하는 사건이 주요하게 다루어진다. 남자는 종말의 계시를 받은 광신도로, 주인공 여주(이미소)를 “선지자의 여종”로 삼기 위해 납치한다. 영화 속 인물들은 1992년에 실제로 있었던 휴거 사건과 관련이 있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 종말론은 1992년 다미선교회 사건을 비롯해 상당한 역사적 연혁을 지닌다. 영화는 1992년 휴거 사건을 환기시키면서, 그동안 휴거와 종말론에 대하여 우리 사회가 진지한 담론을 거의 나누지 못하였음을 일깨운다. 아울러 과거 휴거사건을 현재 주인공이 처한 사건과 겹쳐놓으면서, 시한부종말론의 파괴적인 속성이 오늘날 ‘희망’을 내세우며 이루어지는 행위들, 가령 힐링, 상담, 보험 등의 허구적인 속성과 궤를 같이 한다는 비판을 수행한다.

‘희망의 전화’ 상담원, ‘어린 선지자’

여주(이미소)는 ‘다시 일어서는 희망의 전화’ 에서 일하는 우수 상담원이다. 전화로 상담을 요청해오는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해고나 가족의 중병으로 파산직전에 놓인 사람들이다. 여주는 친절한 응대로 절박한 처지에 놓인 민원인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꼼꼼히 짚어주고, 이 들의 불안을 위로한다. 여주는 이직률이 높은 이 직장에서 사명감으로 일하는 보기 드문 인물이다.

휴가를 앞둔 여주에게 한 소년이 찾아와 자기 아버지를 아느냐고 묻는다. 여주에게 상담을 받았던 소년의 아버지는 얼마 전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여주는 모른다고 딱 잡아뗀다. 여주는 소년을 피하고 따돌리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여주는 자신에게 상담 받은 사람들의 개인정보를 푼돈을 받고 브로커에게 팔아넘기고 있었다. 브로커는 이 정보를 사채업자에게 넘기고, 사채업자들은 돈이 궁한 이들에게 접근하여 사채를 쓰게 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들은 사채를 갚지 못한다. 사채업자들은 빚을 갚을 길을 알려주겠다며, 죽음의 거래를 제안한다. 서류 조작으로 가짜 고용관계를 만들고, 사측의 이름으로 보험을 들게 한다. 이들은 고의로 교통사고를 일으켜서 채무자를 죽게 하고, 회사 앞으로 보험금이 나오면 유족에게 약간의 돈을 집어주며 끝낸다. 소년의 아버지는 여주가 건당 2만에 팔아넘긴 개인정보로 인해 사채업자들에게 죽임을 당한 희생자이다.

여주가 소년을 피해 다니는 사이, 중헌(김영필)이 여주를 뒤쫓는다. 그는 여주를 납치하여 자신의 거처로 데려간다. 남자는 여주를 묶어놓고 이상한 소리를 해댄다. 주님과 약속했다고. 우리는 구원을 받을 거라고. 우리들의 초막을 내가 다시 세울 거라고. 천년 왕국이 곧 시작된다고. 여주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다. 1992년 어린 여주(신수연)는 어머니와 함께 전주의 감람산 기도원에 들어갔다. 그곳은 곧 세상이 종말을 맞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휴거가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는 곳이었다. 여주의 동생을 잃고 상심한 엄마는 휴거를 통해 곧 아들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기도에 몰입한다. 여주는 엄마의 간절한 신앙에 화답하기 위하여 ‘거짓 환상’을 들려준다. 목사는 여주의 종교적 환상을 사람들 앞에서 말하게 한다. 천국을 간증하는 여주의 말에 사람들은 구원을 믿으며 기뻐한다. 여주는 그곳에서 예수님의 계시와 징표를 전하는 ‘어린 선지자’가 되어, 사람들이 듣기 원하는 말을 들려주며 위로하는 여종이었다. 중헌도 그 무렵 여주에게 위로를 받았던 사람들 중 하나이다. 그는 민주화 운동에서 패퇴한 채 도망쳐 온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운동 진영으로 끌어들인 애인의 분신으로, 충격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다. 여주는 상처받은 중헌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이는 예수님의 손길이라며 위로한다.

휴거의 시각이 다가오자, 신도들은 더욱 열렬히 기도하였다. 광신의 열기가 그득한 그곳에서, 오직 한사람만이 휴거를 의심하며 현실적인 판단에 의해 움직였다. 그는 바로 이곳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인 목사이다. 목사는 사람들이 기도에 빠져 있는 틈을 타, 흰옷을 벗어두고 그곳을 빠져나온다. 이를 본 여주는 중헌에게 목사를 따라가도록 시킨다. 그리고 문밖에서 휴거의 시각이 지났을 때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목격하였다. 휴거가 일어나지 않고, 목사는 도망친 것을 알았을 때 사람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희망이 붕괴된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분노의 대상이 필요했다. 목사의 거짓 구원의 약속에 동조했던 ‘어린 선지자’ 여주의 엄마에게 사람들이 분노가 쏟아졌다. 영화는 상황을 자세히 보여주지 않지만, 여주는 그때 엄마를 잃고 외롭게 살아가면서 자살시도를 하는 등 힘겹게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순간 목사를 뒤쫓았던 중헌은 그곳의 최후를 목격하지 못하고, 종말이 유예되었다는 생각에 계속되는 종말의 계시에 집착하면서 이십여 년을 살아온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기도와 믿음이 부족하여 휴거가 불발되었다는 생각에 더욱 맹목적인 믿음에 매달려온 것이다.

휴거와 시한부 종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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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0월 28일 휴거사건은 사소한 해프닝이 아니었다. 당시 다미선교회에는 173개의 교회와 8천여 명의 신도가 속해 있었다. 이외에도 92년에 휴거설을 주장한 교회들은 더 많았다. 하느님의 성회(9월 28일), 다베라선교회(10월 10일) 등의 교단을 합쳐 전국의 250여 교회의 2만여 명이 당시 시한부 종말론을 믿고 있었다. 이들은 생업이나 학업을 팽개치고 가족을 떠나 교회로 모여들었다. 전북의 다미선교회 소속의 기도원에서는 1년 동안 어린이를 포함한 10여명의 신도들이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영화는 이 공동체를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인다.) 경찰은 종말론에 빠져 가출을 하거나 재산을 헌납한 사람들에 대한 신고가 잇따르자, 1992년 9월에 다미선교회 이장림 목사가 34억 원의 헌금을 가로챈 것을 알아내어 사기 및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대표목사가 구속된 상태에서도 신도들은 휴거의 예언을 믿으며 기도에 매달렸다. 1992년 10월 28일 밤, 전국 166개 교회에 흰옷을 입은 신도들이 집결하여 기도하였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휴거가 불발되었음을 알았을 때 신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오실 예수님 기다렸는데 에러가 났으면 또 오실 예수님 기다리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라고 답하며 여전히 휴거에 미련을 보인 사람도 있었지만, 상당수의 신도들은 큰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들 중 몇몇은 교회의 기물을 부수며 소란을 피우거나 지부 목사에게 항의하며 몸싸움을 벌이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집단 자살 같은 극단적인 행동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신도들은 허탈한 표정으로 귀가하였다. 이들은 결국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이들이 겪은 심리적·신앙적 외상은 상당히 컸다. 교회는 해체되었고 신도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 중 일부는 아예 신앙을 버린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다른 교회를 찾았다. 하지만 어느 교회에서도 그들을 위로하거나 보듬지 못했다. 오히려 교단을 어지럽힌 사이비 시한부 종말론자라는 꼬리표와 함께 배척과 조롱을 당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어쩌면 중헌처럼 고립된 채 자신의 온 마음을 쏟았던 시한부 종말론에 대한 믿음을 철회하지 못하고 계속 유예시키면서 수십 년을 이어간 사람도 있었을지 모른다.

이장림 목사는 징역 2년을 선고받고 1년 만에 석방되었다. 그가 숨겨둔 채권의 상환일이 휴거의 날짜 이후였다는 것은 정작 그가 휴거를 믿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그는 석방된 뒤 시한부 종말론에 대한 믿음을 철회하였다. 다른 목회자들도 시한부 종말론을 버리고 일반 교단으로 흡수되었다. 이 사건이 한국 개신교단에 미친 영향은 상당히 컸다. 어떤 연구자들은 이 사건을 한국 개신교가 사회적 신망을 잃고 교세가 감소된 계기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후 한국교회는 대부분 시한부 종말론을 금기시하였다. 하지만 시한부 종말론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1999년, 2012년, 2015년 등을 종말의 시기로 잡는 교단이 꾸준히 출몰하였다. 이처럼 시한부 종말론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종말론이 기독교와 유대교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적인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정통 신학에서는 종말은 반드시 오지만, 인간은 그 때를 알지 못한다고 본다. 또한 종말에 대해 공포와 재앙처럼 말하거나, 특정 교회에서 속해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때를 알지 못하고 찾아올 종말에 대비하여 믿음과 소망을 굳건히 하며, 보편적인 구원을 희구하는 것이 정통 신학의 논리이다.

하지만 시한부 종말론에서는 종말의 날짜가 제시되곤 한다. 이들은 성경의 문구를 해석하여 날짜를 추출하거나, 그 날짜에 대한 직통계시를 받았다고 말한다. 성경의 문구에서 종말의 날짜를 추출하는 것은 성경의 예언을 상징적 묵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것은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과 관련이 있다. 성서 비평학의 관점에서는 성서도 일종의 텍스트이다. 오래전에 인간에 의해 쓰인 후, 긴 세월 동안 옮겨지고 수정되고 가필되고 편집되어 온 역사적인 산물로 본다. 성경은 그것이 쓰인 고대사회의 의식이나 기록자의 정신세계를 반영한다고 보기 때문에, 비평적 해석이 가능하다. 한편 성경은 성령에 의해 쓰였기 때문에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다고 보는 근본주의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이를 축자영감설이라 부르는데, 시한부 종말론은 성경의 내용을 절대적으로 맹신하고,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축자영감설에 바탕을 둔다.

자유주의 신학과 성서 비평학이 대두되었던 19세기 이후 축자영감설은 전 세계적으로 크게 퇴조하였지만, 한국 개신교에서는 축자영감설이 여전히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한국 개신교는 태생부터 축자영감설을 신봉하는 미국의 근본주의 신학에서 출발하였다. 19세기 미국에서 조선으로 선교사가 파송되었을 때, 미국의 개신교계는 자유주의 신학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하필 당시 소수에 불과했던 근본주의 신학을 지닌 선교사에 의해 한국에 개신교가 전파됨으로써, 한국의 개신교는 근본주의 신학으로 출발하였다. ‘장로교의 대부’ 혹은 ‘한국 교회의 아버지’라 추앙되는 길선주 목사는 대표적인 시한부종말론 신앙의 소유자였다. 그는 한국 교회 시한부종말론의 최초 주창자이기도 하다. 길 목사는 ‘말세론’ 강의를 통해 말세의 징조를 29가지의 내증과 6가지의 외증으로 열거하며 긴박감을 조성하고 신도들에게 종말사상을 고취시키면서 장로교 부흥을 이끌었다. 이후로도 한국 개신교단은 미국의 근본주의 교단의 문헌을 그대로 번역하여 들여와 지속적인 영향을 받아왔다.

한국 개신교의 경우 규모가 큰 교단에서도 근본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성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천년왕국의 도래를 철저히 신봉한다. 신흥교단 뿐만 아니라, 기성 교단에서도 종종 시한부종말론이 주장되기도 했지만, 이에 대해서는 신학적인 논쟁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오히려 1992년 휴거사건 사건 이후 한국 개신교단에서는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하는 것을 이단이나 사이비의 징표로 간주하면서, 정작 종말신학 자체에 대하여 깊이 있게 탐구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토양을 지닌 한국 개신교에서 시한부종말론이 주기적으로 출몰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와 시한부 종말론이 공유하는 희망이라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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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1992년 휴거사건을 환기시키면서, 그것을 부채와 보험과 상담이라는 신자유주의적 풍경과 겹쳐 놓는다. 여주는 현재 ‘희망의 전화’ 상담원이자, 과거 ‘어린 선지자’였다. 둘 다 희망과 구원을 전하는 메신저 역할이다. 그러나 현재 여주는 두 명의 남자에 의해 신변의 위협을 받고 있다. 한명은 여주가 개인정보를 팔아넘겨 죽은 사람의 아들이고, 다른 한 명은 여주가 설파했던 구원의 메시지에 영혼이 결박된 사람이다. 즉 여주가 현재 겪는 곤경은 ‘거짓 희망과 구원의 약속’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파산자를 위한 희망의 전화 상담원이 개인정보 유출로 파산자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설정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여주가 개인정보를 건당 2만원에 팔아넘겼을 때, 이러한 결과가 초래되리라고 생각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고리는 연결 되어 있다. 사채업자가 사채를 쓸 절박한 고객을 찾기 위해 ‘희망의 전화’에 마수를 뻗히는 것은 자연스럽다. 지겹게 날아드는 스팸 대출 광고를 떠올려보라. 이 광고들은 절박한 한 사람의 고객을 낚기 위해,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뿌려진다. 사채업자의 입장에서는 이처럼 비효율적인 광고대신 대출이 꼭 필요한 사람들의 정보를 빼내어 접촉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정보가 밀집되어 있는 곳이 어디일까. 당연히 파산 상담을 하는 곳이다. 여주는 상담자들에게 ‘천사’처럼 희망을 상담해주고서, 이들의 정보를 ‘악마’들에게 팔아넘겼다. 희망을 위해 찾아 온 그곳이 악의 입장에서도 가장 마수를 뻗히기 쉬운 곳이다. 이를테면 천사와 악마는 같은 고객을 필요로 한다. 교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만약 진짜 악마가 있다면, 가장 절박하게 영혼의 안식을 찾는 사람들이 깃드는 교회에 마수를 뻗힐 것이다. 거짓되거나 부주의한 목회자라면 신도들의 영혼을 악마에게 인도하는 일이 쉽게 일어날 것이다. 온갖 사이비 교단에 대한 문제가 발생하는 기전도 이렇지 않을까.

어린 여주가 있었던 감람산 기도원에는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고픈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죽음 아들을 만나고 싶고, 죽은 애인이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간절하게 기도한다. 교회는 그들에게 필요한 위로와 구원의 말을 들려준다. 삶에 있어서 아무런 희망을 찾을 수 없는 그들에게 종말과 휴거의 메시지는 역설적으로 가장 확실한 희망이다. 어린 여주는 그들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을 해줌으로써 그들을 위로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거짓 선지자 노릇이 이들을 더 큰 절망과 파국으로 이끌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거짓 희망을 전하는 천사는 악마와 다름이 없다. 중헌은 어린 여주가 남발한 구원의 메시지에 결박된 채, 변제되지 못한 말빚을 받으러 여주에게 온 것이다.

부채를 다루는 금융과 종교는 상당한 유사점을 지닌다. 둘 다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하나는 신용으로, 다른 하나는 신앙으로 읽지만 본질은 같다. 둘은 믿음의 체계로서, 믿음이 붕괴되면 급격히 파산한다. 실물 혹은 현세에서 파생되었고 여전히 연관되어 있지만, 나름의 자율성을 지닌다. 금융과 종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다루는데, 그 본질은 시간이다. 둘 모두에서 직선적인 시간의 흐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자를 낳는 것은 시간이요, 그 시간은 신에 속한다는 이유로 중세교회가 고리대금업을 금지한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금융과 종교는 모두 부채와 죄의식을 인간의 존재론으로 삼는다. 죄지은 자이자 빚진 자인 우리는 큰 빚의 탕감을 원한다. 그것이 곧 구원이다.

이처럼 금융과 종교는 유사점을 지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유사한 금융상품은 보험이다. 보험과 종교는 모두 죽음을 적극적으로 사유하며 현재의 삶 속으로 끌어들인다. 사실 언젠가 죽는다거나 언젠가 종말이 온다는 것이 보험과 종교의 존재이유이다. 영화에서 소년의 아버지가 사채업자들에 의해 보험사기에 동원되어 사망하게 된 것은 신자유주의 금융화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빚을 진 그는 자식에게 빚을 물려주기 싫어서, 거짓 고용관계와 함께 보험 계약서를 쓰고 죽는다. 회사가 왜 그의 사망으로 보험금을 받는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 회사는 그에게 거짓 고용관계를 맺은 뒤, 노동자의 사망이 회사에게 인적 손실을 입힌다는 의미에서 보험을 들고 그가 사망했을 때 보험금을 탄다. 그는 노동자가 되어 착취당하는 길이 봉쇄된 상태에서, 가상의 노동자이자 인적 자원이라는 형태로 죽는다. 즉 그는 살아서는 한 푼의 돈도 벌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죽어서는 회사의 인적 자원의 손실로 계산되어 보험금으로 화한다. 노동은 사라지고 부채만이 창궐한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 체제에서 지극히 금융화된 죽음을 맞은 것이다.

영화는 가장 끔찍한 신자유주의적 죽음을 보여주며, 이러한 불행이 ‘희망의 전화’와 ‘보험’이라는 가장 신자유주의적인 위로의 프로세스를 통과한 결과임을 환기시킨다. 이것은 또한 여주를 매개로 ‘종교적 구원’과 겹쳐진다. 상담, 힐링, 보험 등 신자유주의적인 장치들과 종교적 구원은 모두 ‘희망’을 화두로 삼는다. 영화는 신자유주의적 희망의 담론이 시한부 종말론이 남발한 구원의 약속과 마찬가지로 무책임한 허구임을 적절하게 까발린다.

혁명의 상실과 메시아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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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살펴보았듯이 한국 개신교에서 시한부 종말론이 자주 출몰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왜 하필 1992년에 절정을 이룬 것일까. 개신교 내부에서는 교회가 성장주의에 빠져 신학의 내실을 기하지 못했고, 번영신학을 내세우면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살피지 못한 탓이라는 반성을 내놓기도 했지만, 이것은 교회 내부에서만 원인을 찾을 일은 아니다. 가령 1995년 일본의 옴진리교 사건을 일본사회가 맞은 대변화의 징후로 읽는 시선이 유효하듯이, 1992년 한국의 휴거 사건 역시 당시 한국사회가 맞은 변곡의 지점으로 읽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한국에서 1992년은 대단히 흥미로운 해이다. 1991년 강경대 열사 사망으로 시작되어 끓어올랐던 분신정국이 어이없게도 정원식 총리서리의 계란세례와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으로 잦아들었다. 1980년대를 들끓게 했던 저항의 에너지가 1991년을 기점으로 사그라진 것이다. 그해 연말에 소련이 붕괴되었다. 우리가 흔히 80년대라 불렀던 저항의 시대는 1991년을 끝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1992년을 기점으로 90년대 문화의 시대가 열렸다. 1992년은 서태지가 데뷔를 한 해이고,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이 번역 출간된 해이다. 요컨대 1992년은 80년대에 사회변혁을 꿈꾸며, 사회주의의 세례를 받았던 운동권 세력이 ‘멘붕’에 빠진 채, 대중문화와 소비자본주의의 밀물을 맞은 때이다. 걔 중에는 발 빠르게 문화이론이나 환경, 여성운동 등으로 옮겨간 사람들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믿어왔던 가치가 붕괴된 폐허에서 소비자본주의의 밀물을 맞으며 ‘최후의 인간’으로 부식되어갔다.

<선지자의 밤>은 중헌이란 캐릭터를 통해 1992년 휴거사건을 운동권에 몸담았던 사람이 당시에 느꼈을 가치의 붕괴와 연결시킨다. 그는 자신이 운동권으로 끌어들인 애인이 분신하자, 운동진영을 떠나 장막교회로 찾아든다. 그가 애인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며, 휴거를 통해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패퇴한 운동권이 왜 하필 시한부 종말론에 빠져들었는지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하다.

유대-기독교에서 종말론은 메시아의 재림을 통해 현세가 종말을 고하고 천년왕국이 도래할 것을 믿고 예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메시아의 재림과 천년왕국의 도래는 사실 사회주의 혁명론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역사철학이 가리키는 공산주의 사회는 아직 오지 않은 유토피아라는 점에서 천년왕국과 비슷하다. 또한 그것을 가능케 하는 혁명의 도래는 메시아의 재림과 유사하다. 실제로 유대철학과 마르크스주의를 결합한 벤야민, 아감벤, 바디유 등의 좌파 메시아주의 사상이 존재한다. 이들은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 혁명의 가능성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들에 의해 탐구되고 있다. 또한 21세기 이후 문학이나 대중문화에서 묵시록이나 파국에 대한 성찰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종말론은 기독교 내부가 아니라 오히려 바깥에서 더 많이 논의되고 있는 실정이다.

중헌은 패퇴한 운동권으로서, 자신이 믿어온 혁명의 사상과 구조가 유사한 종말론에 빠져든다. 장막성전에서 ‘어린 선지자’를 통해 성령의 손길을 느낀 그는 휴거의 약속에 빠져든다. 휴거의 시각이 지나고 목사가 사라진 뒤에도, 그는 자신의 믿음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휴거의 불발을 부인하면서 기도와 간구로 계속 종말의 계시를 기다린다. 그는 스스로 직통계시를 받은 선지자라고 느끼며, 구원의 동반자가 될 여주를 납치한다. 하지만 여주에 의해 자신의 믿음이 헛된 것임을 확인받자 그는 견딜 수 없어한다. 그런 그에게 여주는 다시금 구원의 말을 해준다. 영화의 결말부에서 더 이상 구원을 믿을 수 없게 된 중헌에게 여주가 마지막으로 건네는 구원의 말들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영화가 거짓 구원에 대해 실컷 까발려놓고 다시 어설픈 봉합을 하려는 것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윤리적 주체로서 서로의 구원자가 될 것

영화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여주의 윤리적 변화이다. 납치되었다가 풀려나온 여주는 어린 시절 자신의 행위를 떠올리고 다시 중헌의 외딴 교회를 찾는다. 어린 시절 자신의 행위로 인해 아직도 맹신의 늪에 빠져있는 중헌에게 책임을 느끼기 때문에 돌아간 것이다. 젊은 여성이 자신을 납치한 자이자 어떤 돌출행동을 할지 알 수 없는 광신도에게 돌아가는 것은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영화의 초반에 여주는 자신을 찾아온 소년에게 계속 모른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불찰로 아버지를 잃은 소년의 집을 찾아간다. 책임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주는 어린 시절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거짓 구원의 약속을 팔았고, 지금도 희망의 상담을 하면서 개인정보를 팔아왔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의 폐해를 확인한 후에는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고자 한다. 여주는 자신을 죽이려 찾아온 소년의 칼에 중헌이 죽는 끔찍한 장면을 목격한다. 그러나 윤리적 주체인 여주는 소년을 신고하지 않는다. 그리고 소년을 다시 찾아가 “미안해”라고 사과한다.

자신이 행위를 책임지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던 여주가 다시 중헌에게 구원의 말을 해주고, 소년에게 사과하는 것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이는 모든 구원의 희망이 사라진 뒤에도, 우리에겐 여전히 위로가 필요하며, 이러한 책임과 위로가 진정한 구원일 수 있음을 역설하는 것이다. 영화는 마지막에 ‘희망의 전화’ 사무실에 울려 퍼지는 여주의 목소리를 담는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서로에게 구원자가 될 수 있다” 영화의 주제가 여기에 담겨있다.

흔히 ‘종교는 아편’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종교가 얄팍한 위안으로 현실을 인식할 수 없게 만드는 부정적인 것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하지만 아편은 굉장히 중요한 치료약이기도 하다. 강력한 진통작용이 있어서, 암성통증 등 반드시 아편을 써야 할 곳이 있다. 종교 역시 그런 것이 아닐까. 환각과 중독을 일으켜 사람을 폐인으로 몰고 가는 마약으로서가 아니라, 극심한 고통이 있는 곳에 드라마틱한 진통효과를 발휘하는 치료제로 기능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종교적 구원과 위로를 매우 섬세하게 적용하고 활용할 수 있는 분별을 갖추어야 한다. 이러한 분별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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