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째려보기 – 일제강점기, 우리의 마리아는 어떻게 살았을까?

신영숙

일제강점기 한국가톨릭의 교회 여성 일제강점기 한국 가톨릭 여성사 1

교회사 째려보기’는 한국천주교회의 지난 역사 속에서 교회가 잘한 부분, 혹은 잘못 판단한 부분 등을 정직하게 되짚어보는 코너로 처음 만나는 시대는 ‘일제강점기’, 그 중에서도 ‘여성사’에 대한 부분이다.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일제강점기 천주교회 여성사를 통해 시대와 상황 속에서 당당히 한 부분을 맡고 있던 이들에 대한 재평가의 시간이 될 것이다.

신영숙

영어영문학을 전공, 교직 생활을 하다 사학과 석사, 박사과정을 거쳤다. 대학에서는 한국사 강의와 여성사연구를 해왔으며, 현재 이화여대 이화사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지내고 있다. 균형 있는 삶을 중시하여 성당에서의 봉사(?) 활동은 물론 독서, 연극, 영화, 음악 등도 즐긴다. 얼마 전, 노년 준비를 위해 ‘시(詩) 공부’를 시작했다.

한국가톨릭에서 여성신자는 양적으로 우세하다. 2011년 말 현재 가톨릭 신자는 전체 인구의 10% 정도에 해당하는 530만여 명으로 남녀 비율은 41.5% 대 58.5%이다. 80세 이상에서는 25% 대 75%까지 격차가 벌어져 한국교회 현실의 일면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여성신자 수가 남성을 능가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오랫동안 가부장제와 밀착해온 교회에서 영향력은 결코 수량에 비례하지 않는다. 진정한 신앙인으로 참삶을 살아가는, 또는 예수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노력은 신자라면 누구나 행할 것이다.

1953년 광주에서 시작된 레지오마리애를 통한 교회 안에서 여성신자의 책임이나 역할은 일제강점기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할 것이다. 2000년 9월 한국가톨릭 주교회의의 평신도사도직위원회에 여성신자의 대내외 활동을 위한 여성소위원회의 발족은 교회여성에게 상당히 고무적이기도 하다. 이처럼 교회여성 사회는 나름대로 발전을 이뤄왔다. 하지만 흔히 역사는 대외적인 면, 주로 남성, 특히 지도층 남성 위주의 역사들이 공식 기록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가톨릭여성사도 마찬가지다. 하여 이 난에서는 근대사회로의 진입에 식민지를 경험한 일제강점기 여성신자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오늘의 교회 여성의 모습과 위상은 물론 여성신자와 관련된 교회 내 역사도 자연스레 가늠해 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1. 일제강점기 한국가톨릭의 교회 여성

일제강점기 한국 천주교회는 많은 제약이 있었다. 일제의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천주교는 현실 사회와는 전혀 동떨어진 호교를 위한 영적 구원 선교에만 치중하다시피 하였다. 조선 후기 천주교의 박해는 종교 자유가 허용된 20세기 초까지 영향을 미쳤고, 신자 증가 역시 미약했다. 1900-1904년 연평균 신자 증가율이 천주교 10.19%, 장로교 14.95%, 감리교 12.58%였는데, 1905-1909년에는 천주교 2.24%, 장로교 43.77%, 감리교 49.75%로 크게 비교되었다. 더욱이 천주교만 보아도 개화기(1885-1910)의 증가율 6.98%에 비해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1-1919년의 2.10%는 분명 크게 둔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1915년 일제는 포교규칙을 제정, 교회 활동을 규제하기 시작하였다. 예컨대 공소 회장 임명조차 총독부에 보고해야 했고, 총독부는 회장을 해임할 권리까지 가졌다. 일제의 종교탄압정책에 맞물린 이 시기 교세의 침체는 당연하다 할 것이다. 동시에 프랑스 등 해외 지원도 축소되었고 교회가 식민지 피지배 민족의 현실적 고통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교세는 계속 약화되었다. 신자는 1912년에 52,109명, 1913년 53,618명, 1914년 55,602명으로 그다지 증가하지 않았다. 이처럼 교회가 침체한 이유는 첫째, 정치적 주권의 상실 ․ 둘째, 경제적 곤궁 ․ 셋째, 사회 활동보다 복음주의에 주력한 교회에 대한 일반 대중의 불신 그리고 거의 외국선교사 중심의 교계 운영 등이 지적된다.

그러나 1911년 서울대목구와 대구대목구가 분리되고 1920년 원산교목구, 1927년 평양지목구, 1928년 의란(연해주)지목구와 연길지목구, 1937년 대구대목구에서 광주지목구와 전주지목구, 1939년 춘천지목구, 1940년에는 원산대목구에서 함흥대목구가 분리 설정되어 총 9개 교구로 외형적인 발전은 가능했다. 반면 실제 교회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외국인 주교나 신부들이 일제에 순응하는 교회제도와 구령만을 강조하는 선교사업 위주로 정작 교인들의 현세 삶의 어려움과 민족의 문화를 무시함으로써, 결국 조선인 신자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기는커녕 현세에 대한 무관심과 서구문화의 우월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고 의타심을 키우기까지 하였다. 최근 한국천주교회의 과거사 반성 분위기들이 교회사와 민족사 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 즉 ‘민족사 안에서 교회가 자신의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점들에 대한 고백과 참회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등의 주장들은 그런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일제강점기 많은 한국인 신자들은 민족과 교회를 분리하지 않았고, 오히려 참다운 천주교 정신은 민족의 어려움을 결코 외면하는 데 있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민족사회의 현실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신자로서의 역할을 일정하게 감당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안중근의 뒤를 이은 안명근과 105인 사건, 대구와 서울 용산 신학교 학생들의 3.1운동, 그리고 간도에서의 무장 활동 등에 천주교인들이 적지 않게 참여한 것이다. 천주교 여성들 중에도 개인적으로 3.1만세 운동에 참여하거나 군자금 모금, 무장독립 등에 참여한 예가 없지 않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이 민족운동 단체를 만들고 조직적으로 교회 이름을 내세우며 활동한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교회여성들은 선교를 위한 후원과 봉사 단체 활동 등을 제외한 민족이나 여성운동 등 사회활동을 위한 조직은 거의 만들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첫째, 천주교의 대표적인 지도자들이 일제 식민지에 대한 저항이나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의식 등이 별로 없었다. 둘째, 교회 안에 단체를 세울 때는 본당 신부의 승인이 필요하였지만 정치적 의도를 가진 것이라고 판단되면 일체 용인되지 않았다. 셋째, 천주교의 여성 교육은 보통학교 교육 정도에 그쳐 여성단체를 이끌 만한 여성 지도자 배출이 어려웠던 탓도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교회여성들은 우선 여성수도회 중심의 의료 ․ 교육 ․ 사회사업을 통해 불우하고 가난한 계층이 보다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가능한 한 민족의식의 고취와 민중의 계몽으로 개화 문명의 저변을 확대해 나가는 활동 등을 펼쳤다. 동시에 평신도 여성들은 이같은 시련과 고통의 암울한 시기에 성모마리아의 신심을 본받아 신앙을 지키며 가정, 사회, 민족의 버팀목 역할을 해냈다. 분명히 이 시기 천주교 여성들의 삶과 신앙이 가족은 물론 겨레를 지켜내고, 세월을 견디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이후부터는 일제강점기 여성신자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결혼과 가족생활, 교육 및 문화생활, 교회 활동 등을 통해 살펴볼 것이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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