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믿고, 믿고 알고 –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이장섭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프란치스코 교종이 한국을 떠난 지 40여 일 후에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열린 ‘교황 방한 이후, 한국 천주교회를 말한다’ 세미나에 참석했다. 교종은 짧은 방한 동안 한국 사회의 어두운 그늘과 한국 천주교회의 현실을 정확히 진단하고 꼭꼭 집어 드러내 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세월호 유가족들의 손을 잡아주며 ‘고통에는 중립적일 수 없다’는 것을 몸소 보여줌으로써 한국 천주교회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였다. 그 원력에 힘입어 정의구현사제단은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대통령의 회개, 약속 이행 등을 촉구하는 전국 사제·수도자 단식기도회’를 시작하였으나 열흘 후인 9월 4일 “곡기를 끊고 드린 간절한 기도를 이제는 더 큰 ‘들불의 기도’로 만들기 위해 순례를 잠시 중단하고자 한다”며 천막을 철거했다. 염수정 추기경은 8월 26일 기자간담회에서,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주장하며 농성 중인 유가족도 어느 선에서 양보하고 정치권의 타협을 도우라고 말해 프란치스코 교종과 다른 행보를 보였다. 당시 여야 지도부는 유가족의 뜻과 배치되는 세월호 특별법 협상을 성사시켰다가 유가족과 야당 의원들의 반발에 부딪혀 협상안이 무산되던 상황이었다.

우리신학연구소의 세미나는 이렇게 교종 프란치스코 방한 이후 한국 사회가 급격히 프란치스코 효과를 잃어가고 있을 때 열렸다. 교종이 방문하기 전부터 일부에서는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등 떳떳하지 못한 선거를 치르고 당선된 박근혜 정부의 정당성만 입증할 뿐이라든가, 대중들의 관심과 인기를 한 몸에 담고 나타난 슈퍼스타가 방한했다가 상징성만 남기고 돌아가 버리면 오히려 한국교회의 보수화가 가중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없지 않았다. 세미나 장소는 그런 우려를 입증이라도 하듯이 듬성듬성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프란치스코 교종 방한 전에 불었던 ‘복음의 기쁨 열풍’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슈퍼스타 교종을 내세워 여기저기서 성행하던 강연회와 현장을 찾아다니던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할까? 이번 세미나의 주제야말로 프란치스코 교종의 관심이 몰려있을 만한 내용이 아닌가?

‘쇄신의 법칙: 제도적 리더십과 교회’라는 주제로 첫 번째 강의를 한 박상훈 신부의 눈빛에서도 교종 방한 전과 방한 후의 차이를 찾아보게 된다. 그는 지난 3월에 서강대에서 열린 ‘복음의 기쁨’ 세미나에서 『타임』지의 올해의 인물로 선정된 프란치스코 교종에 관해 설명하면서 제도 종교의 비판자 가운데 한 사람인 로버트 솔로몬의 글을 인용했었다.

“종교는 일차적으로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소속의 문제이다. 믿음은 잘해봐야 이차적이다. 세계의 주요 종교들의 신앙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에서 주장하는 기본적인 믿음, 신학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나는 그런 이해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주류 종교들에서 주장하는 믿음이란 사실상 이해 가능성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믿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떤 모임의 회원이 될 수 있는 그룹 멤버십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영성은 적어도 믿음의 문제는 아니다. 영성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이고, 타인들과 이 세계와 서로 교류하고 함께 사는 한 방식이다.”

사실 프란치스코 교종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같은 종교를 가진 집단이 지녀야 할 자부심과 소속감은 강했지만, 교종이 강조한 가난의 영성을 받아들일 채비는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교회 리더십의 가르침은 정통 교리의 주입으로, 사목은 질서를 유지하는 것으로, 봉사는 교회 재정을 보호하는 것으로 좁혀져 왔다. ‘인간’과 ‘인격’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할 자리에 ‘돈’과 ‘인정 욕구’가 들어와 있었다. 그러니 교회 리더십이 바뀌지 않고는 프란치스코 교종의 영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는 박 신부의 말이 설득력이 있다.

‘물신의 시대, 봉헌생활이 가야 할 길’에 대해 두 번째 강의를 한 강신숙 수녀의 발언도 비슷했다. 강 수녀는 교종의 말을 인용하여 “수도자들이 받는 진짜 유혹은 예언자가 되는 일 없이 예언직을 수행하려는 것에 있다.”고 지적한다. 수도자들이 너무 오랫동안 자기 시대의 현실과 동떨어진 ‘거룩함’으로, 타자의 고통에 동참할 줄 모르는 관상가로 살아오지 않았는지 되물으며, 이제 수도자들은 자신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거룩함과 관상의 진정한 의미를 어디서 발견하고 회복해야 하는지 재조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미 ‘본당 수녀의 정체성과 사명’이란 글에서 수도회 카리스마가 제도에 밀착하고 편승해서 오는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는 강 수녀는 이제야말로 수도자들이 겉치레와 위선, 순진한 미성숙, 집단에 숨은 두려움, 개인주의를 허물고 물에 빠진 이웃들을 구조하는 해난구조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교종의 눈으로 본 한국 가톨릭교회의 현실과 개혁 과제’에 대해 김항섭 교수가 강의했다. 그 역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한갓 ‘사교 모임’이 되어 “정신적 웰빙, 사목적 웰빙에 대한 유혹”에 빠져들게 되고, 마침내 중산층의 교회로 자리매김하게 된 현실을 지적했다. 정의평화위원회 전국위원회가 공식 활동으로 각 본당에서 진행하고 있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천주교 선언’ 서명운동이 마치 교회의 계급을 둘로 나누는 것 같은 아픔을 주는 것도 그리스도교 공동체, 예수의 정신으로 하나 되지 못한 한국 천주교회의 빈약한 영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셈이다.

이어진 토론 시간에 마이크를 잡은 세월호 희생자 고 박성호 군의 어머니 정혜숙 씨는 팽목항과 광화문, 청운동에서 노숙하는 유가족들에게 다가오던 사제나 수녀, 신자들이 매번 같은 얼굴이었으며, 주교나 추기경, 총회장 등 교회 지도자들과 만날 때는 자신들의 손을 맞잡고 울어주던 분들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느꼈다고 고백했다. 광화문 광장에서 극우 단체에 조롱당하고 ‘대수천’이라는 천주교인 집단에 멸시당하며 광야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그녀는 ‘세월호 사건’을 통해서 많은 분이 무지와 착각에서 깨어나 자기들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고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발견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권했다.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해 울지 말고 여러분 자신들을 위해 울라.”고.

세미나의 강의와 질의응답에서 드러난 것처럼 한국 천주교회는 높은 쇄신의 요구에 직면해 있다. 오늘의 쇄신 요구는 ‘Ecclesia semper reformanda'(항상 쇄신하는 교회)의 상투적인 격언을 되새기며 간과해 버릴 수 없다. 이미 많은 사람이 프란치스코 교종의 방한을 통해 그가 보여준 겸손과 따뜻함과 직설적인 가르침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종을 통해 발견한 예수의 영성을 본받고자 하는 욕구는 많으나 정작 이런 욕구를 이끌어 줄 영성과 리더십이 보이지 않는다. 행여 그런 영성이 배양될 현실 속의 토양이 미흡하거나 교회가 그런 토양을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의 정신이 없이는 아무도 버틸 수 없는 우리 사회 곳곳의 고난의 현장들을 교회가 피해버린다면 우리가 어디서 예수의 영성을 배울 것인가? 어떤 갈망으로 교회 쇄신의 실마리를 찾을 것인가?

이번 세미나에서 교회의 각 신원이 어떻게 자신의 성숙과 교회의 쇄신을 이뤄낼지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한 참석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걸맞게 교회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교회 자정 운동의 한 방법으로 일제강점기 한국 천주교회가 잘못한 부분을 사죄하는 고백 운동부터 시작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교회 쇄신에 대한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공간과 제도가 필요하다는 공감대도 형성되었다. 비록 마땅한 해법이나 대안이 도출되지는 못했지만,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 문제인지 고민하는 목소리에 참석자들의 마음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런 문제의식의 양성을 통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고민하고 토론하며 주님이 가신 길을 찾아야 한다. 어쩌면 한국 교회는 예수님이 가신 길에서 멀리 벗어나 있는지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을 찾아 물어야 한다. “쿼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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