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째려보기 – 평등하기는 하지만 불평등하다.

신영숙

일제강점기의 여성교회사

  평등하기는 하지만 불평등하다

1910년대부터 1945년에 이르는 일제강점기는 우리 민족이 식민지 지배의 억압 속에 있었지만, 천주교회가 합법적으로 교회체계를 세우고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할 수 있게 된 때이기도 했다. 1920년 가톨릭 서울교구는 법인 자격을 획득하고, 뮈텔 주교가 부임하여 독립된 교회체계를 갖추고 본격적인 선교 활동에 들어갔다. 특히 외국인 수녀들뿐 아니라 조선인 수녀들이 배출됨으로써 가톨릭 여성들의 신앙은 생활 속에서 실천적으로 발전해 나갔다.

어둠 속에서도 희망의 서광이

나라는 망했어도 교회는 골격을 키우며 세력을 확보하는 아이러니한 세상이 되었다. 어지럽고 험난한 세상에 여성은 이중의 굴레를 짊어졌다

가톨릭 여성의 혼인과 가족, 신앙생활을 살펴보려면 교회의 혼인 ․ 가족관, 여성인식 등을 먼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1907년 교회는 사람은 천주를 모상으로 창조되었으므로 그 영혼은 천주와 같으며 모든 인간은 평등한 영적 존재라고 말했다. “아내는 남편의 종도 상전도 아닌, 동무처럼 남편과 평등한 존재라고, 즉 기본적으로 남녀는 평등하다.”고 하였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급변한 사회에 맞춰 1918년 말 교황 베네딕도 15세가 새 교회법을 반포하였다. 아주 새로운 내용은 아니지만 신자와 비신자간의 혼인 금지가 풀렸고, 혼인과 가정에서의 여성 신앙생활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22년에 반포된 󰡔한국교회지침서󰡕에서 교회는 결혼은 일생에 한번, 심신을 서로 교환하는 신성한 약속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당시 급증하는 이혼을 우려하면서 아직도 계속되는 조혼의 사회적 폐단으로, 첫째 부부의 불화, 둘째 공상과 번민, 셋째 어린이가 어린이를 낳는 것 같은 건강상의 위험, 넷째 직업도 얻기 전에 식구를 부양해야 하는 문제 등을 지적하며 잘못된 조혼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1932. 2)

동시에 로마 성청의 성의회에서는 성교육과 우생학 또는 혼인과 개인의 권리에 대한 자연법, 신법 등 교회법을 제시하였다. 즉, 교황 비오 11세의 ‘정결한 혼인에 관한 회칙’을 통해 혼인에 관한 새로운 사상 배격, 산아제한, 피임 등의 문제에 관한 현대적 이론의 오류를 지적하는 한편, 혼인은 종교상의 계약이므로 이탈리아 민법과 교회법이 함께 협력하자는 교회의 입장을 강조하였다.

교회는 성스러운 혼배 성사를 행하고 가정의 기초를 공고히 하기 위해 되도록 신자끼리 혼인하기를 적극 권장하였다. 배우자와 자녀의 신앙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신자끼리 결혼해야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만약 마음이 약한 신자 아내가 비신자 남편의 강요에 눌리면 신앙은 파멸하고, 자녀는 종교 교육을 받지 못하게 된다고 경고하였다. 남녀 차별은 있어서는 안 되고, 부부 동거의 원칙을 지키는 동시에 여성에게만 엄격한 정조 관념을 요구하지 말고 여성이 남성에게도 정조의 의무를 요구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남성의 외도와 축첩은 허용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다.

법 따로 현실 따로

  삼종지의를 잘 지키면 불화가 없다. 입을 너무 많이 놀리면 세상이 시끄럽고 가장이 골이 아프다. 고로 여성이여, 입을 다물라

남녀가 평등하다는 교회의 기본적인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교회 현실에서조차 남녀에 대한 인식이나 역할 분담은 매우 차별적이었다. 이 시기 교회 남성지도자들은 “옛적부터 우리나라는 남성은 높고 여성은 낮은 것으로 간주하였다. 여성의 삼종지의를 당연시하여 가정불화는 오히려 지금보다 적었다. 서양문명을 받으며 여성도 남성같이 사회 활동을 하고, 귀함도 같다고 한다. 늙은 시모와 젊은 며느리의 의견이 서로 달라 시끄러워질 수밖에 없다. 이제 여성이 남성을 학대하는 사회가 되었다.”며 급변하는 남녀 관계를 개탄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여존남비의 세상이 진보한 것인가’ 라며 “남성도 사람이오, 여성도 사람이로되 남성은 여성이 아니오, 여성은 남성이 될 수 없다…외모, 완력 차이를 인정하고 남녀 할 일이 엄연히 따로 있다… 여성도 남성 같이 사회에 나가 활동하되 꼭 같은 양식으로 꼭 같은 방면에 활동하지 못할 것이다. 각각의 특색을 살려 해야 한다. 남성은 영원히 남성적이라야 하고 여성은 영원히 여성적이라야 하겠다… 가장을 머리로, 안해는 가장에 절대 복종하고 가장은 안해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천주교회보, 1929. 8)고 하기도 하였다.

남성은 여성에 대해 지배하거나 군림하기보다는 사랑하라는 것을 강조하였지만, 여성은 남성 가장에게 복종하여야 하는 것이 여성다움이며, 가장 이상적인 남녀 관계라는 주장이었다. 여전히 종래의 성역할을 분명히 구분하는 것이었다.

또한 1929년 「천주교회보」에는 늘 그랬듯이 성모 존경의 도덕적 의의를 밝히고, 천주의 모친, 인류의 모친으로서의 당시의 여성상, 여성 역할을 기대하였다. 교회 여성은 가정과 교회에서 현모양처의 역할을 요구받았고, 그 모델은 다름 아닌 성모마리아였다. 때문에 여성신자는 교회 안팎에서 성모와 같은 존재로서 그 소임을 요청받았으며, 대부분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1940년대 전시 체제기 가정의 살림살이가 더욱 어려워짐에 따라 가족의 붕괴, 사회의 불안과 혼란은 가중되어 갔다. 그러나 교회는 언제까지나 부부의 견고한 사랑과 이해만이 가정을 지키고, 사회를 유지, 안정시킬 수 있다는 신념을 지속적으로 천명하였다. “전쟁에 나가기 전에는 한 번 기도하며 도움을 청하고, 바다에 배 타러 가기 전에는 두 번 청하고, 혼배하기 전에는 세 번 청하라… 혼배의 중요성과 영혼의 아름다움으로 결혼 상대의 성질, 수계범절의 열성, 덕행 등을 문벌, 재산, 지식 등의 조건보다 먼저 봐야 한다.”(경향잡지, 923. 1940. 6)고 역설하였다.

이처럼 교회는 무엇보다 혼배성사로 이루어진 원만한 가정을 중시하여, 1943년 6『경향잡지』사설은 “가장이 머리이지만 그렇다고 안해는 여종이 아니다. 안해는 부드러운 마음의 가슴으로 사랑과 존경의 존재이다. 각각의 개성과 성격, 수단이 다르므로 서로 너무 간섭 말라. 서로 의논하여 처리하고, 섭섭함, 야속함이 없도록 하라. 안해가 입을 경계해야 하지만 머리와 심장은 모두 중요하여 각각의 위치를 존중하고, 본분을 지켜라.”고 부부의 다른 위치와 역할을 계속 지도하였다. 결국 일제 시기 혼인과 가정에서의 여성에 대한 교회 인식은 일제 식민지 여성정책과도 맞물려 좀 더 근대(서구)적인 현모양처상을 장려하는 것으로 가부장제가 변형되어 가는 과정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5월호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