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로 떠나는 아시아 여행 –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결혼

황경훈 아시아 평화 연대 센터장

지구온난화다 기상이변이다 해서 점점 봄이 우리 곁에 머무는 시간이 짧아져서 더욱 더 가는 시간이 아깝게만 느껴지는 5월입니다. 조건이 허락한다면, 오늘 하루 시간을 조금 내어 봄 볕 아래서 햇빛에 몸을 맡기고 그것이 만들어 내는 풍경에 잠시 잠겨보는 사치도 한번쯤은 눈감아 줄 것만 같은 계절인 듯합니다.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 등 가정의 달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여러 행사가 달력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네요. 그러고 보니 가뜩이나 호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부모나 직장인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달이기도 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가족과 가정을 생각나게 하는 달이니 오늘은 가정을 꾸려나가는 과정이나 절차가 있다면 그 중에서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결혼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마침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나 준비했으니,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겠지만 한번 ‘앙코르와트’의 나라 캄보디아로 여행을 떠나 보시지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결혼

캄보디아에는 사회복지 체계가 잘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늙어 홀로 지내는 삶은 참으로 끔찍하다. 가족 없는 노인은 외로움, 박탈감, 병마뿐 아니라 예기치 않은 때 이른 죽음도 맞게 된다.

나는 61살의 신체 건강한 사제이므로 내가 허약하다거나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나와 함께 일하는 청각장애인들은 내가 좀 쓸쓸해 보이는 모양인지 늘 내 앞날을 걱정한다. 이들은 끊임없이 나에게 자기네 누나나 숙모 또는 친구에 대해 말하면서 꼭 결혼해야 한다고 한다.

캄보디아에는 가톨릭 신자가 겨우 5000명밖에 없기 때문에 가톨릭교회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사제의 구실 또한 그렇다. 독신의 전통에 대해 설명할 때, 나는 주로 불교 승려 (캄보디아의 인구 중 95퍼센트가 불교인이다)의 예를 든다. 이곳 불교 승려도 결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을 더욱 더 철저히 종교적 삶에 투신할 수 있다. 그러나 나를 걱정하는 이들에게 승려의 예도 별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최근에 나는 캄보디아 남부지역의 청각장애인을 모아 이들에게 직업훈련을 시키는 일을 하고 있었다. 한번은 30살 난 귀머거리 여인이 재봉질을 배우고 싶다는 바람에 대해 얘기하더니, 화제를 바꿔 결혼 얘기를 꺼내면서 자기가 3개월 안에 결혼한다는 것이었다. 주의 깊게 듣고 난 뒤 속으로 기도하면서 그녀와 남편 될 사람이 결혼에 성공하기를 빌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내게 자기 삼촌의 전화번호를 주었고 나는 그에게 전화해서 언제 재봉교실이 열리는지 그녀가 알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한 주 뒤에 그녀가 프놈펜에 있는 내 사무실에 나타나서는 왜 그녀 삼촌에게 전화하지 않았느냐며 내게 화를 냈다. 나는 그녀가 수화를 통해 한 말을 도저히 믿기 어려워 좀 더 확실히 이해하기 위해 우리 귀머거리 영어 선생인 저스틴을 불렀다. 저스틴은 내가 이해했다고 생각한 것을 확인해 주었다. 그녀가 세워 놓은 세 달 안에 결혼할 상대가 바로 나였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석 달 안에 결혼할 것이라는 얘기는 있었지만, 나와 결혼한다고 말한 적은 결코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다른 사람과 결혼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당시 내가 귀 기울여 그녀 얘기를 들어준 것을 그녀가 결혼 승낙으로 받아들였고, 이제 그녀는 결혼 채비를 하기 위해 다시 온 것이 분명했다.

저스틴과 나는 30분 동안 그녀 옆에 앉아서 사제로서 내가 결혼할 수 없다는 것과 그럼에도 계속 친구로 지낼 수 있다는 점을 차근차근 알아듣게 설명해주었다. 이곳에서 사랑이 결혼하는 데에 그리 큰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분명 나는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것이다. 그녀는 나이 서른에 이르자 결혼해야 한다는 문화적 압박을 겪고 있었고 따라서 귀머거리 여인과 ‘부자’ 외국인의 결혼은 그녀의 최고의 꿈을 성취하는 것이었음이 분명했다.

우리는 뒤에도 여전히 친구로 지내기로 했지만, 그녀가 실망했으며 왜 나처럼 ‘늙은’ 남자가 그를 돌봐 주겠다는 사람의 이런 좋은 제안을 거절했는지 크게 혼란스러워 한다는 것을 이해한다.

실화. 찰리 디트미어, 프놈펜, 캄보디아.

(출처: Once Upon a Time in Asia: Stories of Harmony and Peace, ed. by James Kroeger (Claretian Publication, 2006)

이 나라에 와서 선교 활동을 하던 한 사제가 실제 겪은 일이라고 합니다. 당시 캄보디아에 가톨릭 신자가 5000명밖에 안되었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약 2만 명쯤 된다고 하더군요. 뭐 그렇더라도 전체 인구의 0.2-3% 정도 된다니 숫자에 큰 의미는 없는 듯도 합니다. 또 사제를 비롯해 그리스도교들은 공식 선교사로 활동하기가 여의치 않아 주로 시민단체 이름으로 의료, 빈민구호, 교육 등의 분야에서 활동한다고 합니다.

이야기에서도 나오지만 캄보디아는 불교의 나라여서 거의 모든 국민이 불교문화에 따라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합니다. 프랑스 식민지를 앞세워 들어온 가톨릭이 베트남을 거쳐 이 나라에 들어온 지도 이미 수세기가 지났지만, 아직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은 아마도 불교의 압도적 영향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토착화’라는 말이 의미를 가지려면 교회가 다수 민족인 크메르족의 불교문화에 뿌리를 내려야 할 텐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은 듯합니다. 마치 오늘 우리 이야기에서 디트미어 신부가 사제가 왜 독신이어야 하는가를 결혼하자고 졸라대는 여인에게 설명하는 데 애를 먹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아주 난감해 하는 사제와 그 앞에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한 채 ‘삐쳐있는’ 여인이 만들어내는 풍경이 매우 곤란한 상황임에도, 한편으로는 재미있어서 민망스럽게도 자꾸 웃음이 나오려고 합니다.

이야기를 더 진전시키기 위해 좀 엉뚱한 생각을 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미 지나온 과거사가 돼 버리긴 했지만, 만일 그때 디트미어 신부가 그 여인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결혼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현행 교회법대로라면 이 신부는 정직되거나 면직되어 성사집전을 비롯한 여러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성직자 독신 제도는 11세기에 이르러서야 가톨릭교회에 도입되었다고 하고, 또 성서에서 보듯이 예수님과 사도들, 특히 바오로는 개인의 성정이나 조건에 따라 독신을 권고했지 지켜야할 계율이나 명령을 내려 신자들이 이를 억지로 받아들이게 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주교나 사제의 독신이 교회의 ‘전통’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이 전부인양 단언하는 것은 한 번 더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더욱이 사제의 존재 이유가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봉사에 있다면 그 방식은 다양할 수 있고, 그러니만큼 결혼을 해서도 그 소명을 수행할 수 있다는 주장에도 귀가 솔깃해 옵니다.

만일 그것이 인정된다면, 앞에서 제기한 그 ‘엉뚱한 질문’으로 돌아가서, 디트미어 신부가 그 여인과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도 사제직을 수행할 수 있게 되겠지요. 물론 성공회나 동방정교회라면 ‘만일’이라는 가정법을 전제하지 않고도 당장이라도 가능한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결혼은 해도 후회하고 하지 않아도 후회한다’는 말이 있듯이, 디티미어 신부가 결혼한다고 해서 꼭 행복하고 사제직을 더 잘 수행하리라고 단언하기는 어렵겠지요. 그럼에도 가정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빠르게 변하고 그러한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교회의 활동이 절실히 요구된다는 점에서 실제로 가정생활을 몸소 경험하고 있는 것이 장점이 될 수는 있다고도 여겨집니다.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2010년 인구주택총조사 결과)에 따르면, 혼자 사는 ‘나 홀로 가족’이 4가구 중 1가구를 차지한다고 하니, 이제 가족이나 가정의 개념도 달라져야 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편모나 편부 가정뿐 아니라 할아버지나 할머니 한분이 키우는 아이들 가정이 넘쳐나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 교회에서 말하는 ‘성 가정’의 이미지나 개념도 이제는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때가 아닌가, 너무 안일한 생각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아주 인간적인 견지에서 ‘청년기에 가출하여 부모보다 일찍 죽은’ 예수님의 가정이 과연 온전한 가정이었는지, 그게 아니라면 왜 ‘성 가정’이라 하는지도 한번 깊이 생각해봐야 하겠지만, 여기서는 그 문제보다는 우리 교회에서 흔하게 말하는 ‘성 가정’이 앞서 말한 나 홀로 가정이 다수인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자기만의 세계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성찰이 필요한 때는 아닌지 함께 생각해보자는 제안이자 초대로 받아들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캄보디아 얘기로 시작해서인지 거기 날씨처럼 따듯한 변화의 훈풍이 불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말을 해놓고 보니 다음 달은 벌써 매미가 우는 여름이네요. 환절기 건강 유의하시고 장미가 만발하는 6월에 뵙겠습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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