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째려보기 – 주체적이었으나 주체적이지 못한

신영숙

여성의 신앙이 선교로 이어지다

  초기 박해를 벗어나 일정하게 자유를 얻게 된 일제강점기 교회 여성들의 활동은 이전보다 활발해져 갔다. 여성을 선교대상으로 삼은 교회활동은 주로 자녀교육에 관심을 갖고 장학회를 운영한다거나, 자선 및 애긍을 앞세운 이웃 사랑, 즉 고아원, 양로원 등의 구제사업, 또는 의료와 교육사업 등으로 자연스럽게 전교되기를 기대하였다. 아울러 교회의 여성에 대한 편견이나 교회법과 교회 조직 등에서 상당한 제한점이 있었다 해도 여성들은 자신들의 신앙심을 북돋우고, 봉사와 선교를 열성적으로 할 수 있게 노력하였다. 즉 본당과 공소에서 여성신자들의 헌신적인 활동이 이 시기 교회 성장에 밑거름이 된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예컨대 남성 가장을 따라 교인이 된 후 여성이 더 열심히 선교 활동에 뛰어들거나 딸이 먼저 믿은 후 가족들을 입교시키는 건 물론, 시부모 봉양을 잘 하는 며느리, 또는 남편과 같이 전 재산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병자를 알뜰히 보살펴 치유를 가능케 하고 종부성사와 대세 등을 통해 가족뿐만 아니라 주변 외인들을 교회로 이끄는 전교활동이 여성신자들의 큰 몫이 되었다.

남성교우들의 활동이 주로 기록된 것이긴 하지만, 당시 서울교구연보(한국교회사연구소 역편, 1987)에 의하면,‘1916년에 가장인 박 씨가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아내는 거부하다가, 5번째 입교 권유 끝에 교리 공부를 시작하여 20일 만에 영세와 견진을 받아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 영리한 그녀는 더 열심히 이웃 친지들에게 전교하였다’. 선교의 대상이었던 여성들이 이제 선교에 앞장섰다는 것을 보여준다.‘1932년 안성의 신영세자 처녀는 외교인 부모에 의해 외교인과 결혼을 하게 되자 부모에게 순명하면서도 대담하게 시부모를 찾아가 두 가지 소원을 약속받았다. 자신이 천주교인인 것과 결혼 후에도 자유롭게 교인으로 활동할 수 있음을 보장하라는 것이었다. 그 결과 교회에 대해 이미 알고 있던 약혼자가 결혼 전에 영세를 하게 된 것은 큰 기쁨이었다’.

며느리 열전

1917년 간도에서는 부부가 함께 영세하였으나, 남편이 배교한 뒤 아내에게도 배교를 강요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아내는 남편의 협박, 매질에 굴하지 않고, 죽게 되는 한이 있어도 하느님을 배반할 수 없다고 3년간 투쟁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지켜냈다. 또한 대구 달성군 대명동 강 요한의 아내 제 가타리나 는 시부에게 효성하여, 수성면소에서 표창을 받았다. 진주가 고향인 그의 남편이 일본으로 일찍 가버린 후 품팔이 생활을 하며 8년째 시부를 모셨다. 그는 시부의 종양을 입으로 빨아 완치시키기도 하고, 시부를 인도하여 미사 첨례도 같이 하였다. 결국 남편이 감복하여 돌아와 회개한 뒤 대구신학교에 식복사로 지내면서 아버지와 부인에게도 잘하였다고 한다.

1919년 간도에서는 20명이 넘는 임씨 일가의 병든 며느리가 마을의 한 신자의 열성적인 기도와 보살핌으로 병세가 호전되었으나, 그가 되돌아가자 다시 격렬한 통증이 일어난 사실을 안 시부와 남편이 비록 자신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지만 다른 가족들의 입교를 허락하였다. 그 가족 10명이 이듬해 봄에 영세를 하고 가을부터는 그의 집을 공소로 사용케 하였다. 그밖에도 평남 영유의 부인회장 한 데레사는 입교 후 병자의 위로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대세를 주어 영혼을 구원토록 한 사람이 400명이나 되었다. 대구의 최 부인은 과부로 외아들마저 별세한 후 경주에서 1927년부터 1년간 열심히 활동한 결과 어린아이 45명, 어른 8명에게 대세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동시에 천주교회보(1928. 6)에는 영세 후 3개월 만에 별세한 박막다르나 윤산이 대구 본성정에 1000원을 기보하였다는 소식이 나오고, 또 경기도 시흥의 유씨는 그의 딸이 주일학교 다닐 때, 가장인 교우 이 씨가 사업에 실패하자 자녀를 버리고 유랑하는 이웃의 일가를 돌봐 주었다. 유 씨는 교우들에게 좁쌀 한말씩을 수합하여 그 자녀를 보살폈던 것이다. 1929년 6월에도 수원 압실 공소 주인 조 마리아 부인도 이웃 30여호에 백미와 소미(좁쌀) 합 7승씩을 분급해 동리의 빈궁한 집에 나눠주었다.

한편 경성사범 연습과 여학생 이 마리아는 예수교 가정에 태어나 예수교 학교에서 성경 공부와 부흥회에도 열심히 참석한 개신교도였다. 그러나 우연히 친구 따라 성당에 와 본 그는 “예수교 생활과 천주교 생활을 비교해 보면 저편은 경쾌하고 자유롭고 또 사회화하는 데 비하여, 이편은 무겁고 철측적이고 순종교적이어서 더 큰 희생과 노력을 요구한다. … 그러나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부패하고 얼마나 타락의 길로 미끄러지며 사회라는 것이 얼마나 구령사정에 위험한지 생각하여 보면 진종교의 궤도는 반드시 이러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며 천주교로 개종하였다(별 71호, 1933. 5).

(당시 개신교 신자가 훨씬 많던 압록강 유역 의주에서도 개신교 가장의 가족이 천주교인이며, 가장 자신이 당장은 천주교인이 될 수 없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신부를 찾아가라고 하고, 의주와 신의주에서 1923년 41명이 개종하였다. 개신교가 활발한 평양 등 서북지역에서 선교사업의 활력소가 된 것이다. 그 외에도 생업을 위해 개신교 예배당에서 일하던 관리인이 병으로 죽게 되자 영세를 받음으로써, 예배당에서 개신교인들과 천주교인들이 함께 한 예도 있다. 그러나 그의 아내와 자녀들이 예비자로 입교한 예가 특별히 기록되었다.)

1930년에 서울 교구에서 순교자 유해를 확인하지 못해 안타까워하던 중 최양업 신부의 부친인 복자 최경환 방지거의 노 며느리 송 아가다(1838-1930)가 생존해 있음을 확인, 그를 통해 시부의 무덤을 91년 만에 확인, 이장하는 행사를 1930년 5월26일에 거행했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후 송 아가다가 선종하였다고 한다. 그의 독실한 신앙의 표징이라 할 것이다.

뒷방에서 꽃 핀 교회의 버팀목

이처럼 당시 교회여성들은 남성에게 의존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입장에서 자신의 신앙을 오롯이 하여 가족과 이웃을 교회로 이끄는 선교활동을 수행하였다. 교회 안에서의 지위나 선교 활동에서의 어려움은 개선되지 않았지만, 대충 2/3의 다수를 차지하는 교회 여성들의 굳센 신앙은 교회의 확고한 버팀목이 되어 갔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교회 여성이 마태복음 23장 23절에서 그 어떤 율법보다 더 강조된‘자비 정의 신의’라는 교회 정신을 실천하기에는 아직 미약했다. 교회여성은 단지 성모마리아의 순종과 자비, 봉사에만 충실했을 뿐, 식민지 한국 사회의 변화나 시대의 요구에는 주체적으로 대응해가지 못했던 것이다.

신영숙

영어영문학을 전공, 교직 생활을 하다 사학과 석사, 박사과정을 거쳤다. 대학에서 한국사 강의와 여성사연구를 해왔으며, 현재 이화여대 이화사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지내고 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6월호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