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로 떠나는 아시아 여행 – 가난한 아이들의 슬픔

황경훈 아시아 평화 연대 센터장

가난한 아이들의 슬픔

우연히도 이번 달은 여러 대학이 자리 잡고 있는 필리핀의 교육도시 케손에 와서 이 글을 씁니다. 오늘 들려드리려는 이야기가 케손시에서 벌어진 참상에 관한 것이기 때문만은 아니지만, 이왕 이곳에 온 김에 제 경험과 느낌도 담아서 얘기를 풀어나가면 더 낫지 싶어서 이 이야기를 골랐습니다. 먼저 이야기를 듣고 생각해 볼 것들을 나누어 보지요.

거리 아이들의 참상

우리는 이른 아침 작은 관 5개를 준비해 케손시청으로 가서 여러 깃발이 펄럭이고 있는 깃대 발치에 내려놓았다. 수많은 사람의 물결이 밀물과 썰물처럼 하루 종일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이들의 시체는 이미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우리는 시장에게 성명서를 보내 시장이 아이들을 묻을 때까지, 시에서 가족들에게 새로 이주할 장소를 마련해 줄 때까지, 또 이 다섯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철거를 허가한 시청 관리를 구속할 때까지, 시청에 계속 머무를 것이라고 했다. 철거는 정부주도로 이뤄진 도로정화 사업의 하나였다.

철거반은 아이 중에 홍역으로 앓고 있고 한 아이가 바로 얼마 전에 죽었으며, 아이들의 부모들이 집을 철거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있음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철거반은 철거를 강행했고 아이들은 그날 밤을 길거리에 있는 손수레에서 보내야 했다. 아침에 아이들은 싸늘한 시체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시청에서 시위를 하고 있는 우리는 사방에서 몰려 든 많은 군중과 언론의 지지를 받았다. 이들은 우리와 거의 하루 종일을 함께 했고 언론도 이 문제와 관련해 우리를 여러 차례 인터뷰했다. 낮은 음의 북소리가 하루 종일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마치 시장에게 “하느님이 보고 계시고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을 일깨워 주려는 듯, 크지 않지만 분명한 음조로 전해지고 있었다. 시장은 마침내 우리의 요구사항에 동의했다. 우리는 아이들을 해지기 전까지 매장해야 한다는 데 마음이 바쁜 나머지 세부사항까지 논의하지는 못했다. 우리의 실수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시장에게서 서면으로 확인받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시청에서 내준 트럭 뒤에 올라타고 포터스 필드라는 묘지로 향했다. 차가 적색 신호등에 걸려 멈춰선 사이 아이들의 시체에서 살 썩는 냄새가 풍겨왔다. 죽은 아이 가운데에는 6살짜리가 가장 큰 아이였고 서너 살, 심지어 11개월밖에 안된 아이도 있었다. 우리는 묘지의 무덤을 지나 가장 지저분하고 외떨어져 있는 구석으로 걸어갔다. 그곳은 쓰레기를 버리는 장소와 가까운 벽 근처였다. 가족들이 마지막으로 관 뚜껑을 열자 한 절름발이 소녀가 죽은 동생을 보고 울면서 소리쳤다. “마리아, 마리아 왜 가버린 거야! 같이 놀기로 한 게 얼마나 많은데…….” 해가 지려하자 가족들은 관을 벽에 밀어 넣었고 묘지 일꾼들은 무심하게 아이들의 관을 봉해버렸다.

다음날 우리는 시장과 계속 협상을 벌였다. 그는 적대적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미안해하지도 않았다. 시장은 케손시 안에 새 이주 장소를 마련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어디라고 분명히 밝히지는 않았다. 시장은 그 철거 문제를 조사할 대책반 구성에 대해 말했지만, 역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겠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실제로 시장이 한 것이라고는 아이들을 묘지에 묻도록 조처한 것밖에 없었다.

시장은 언제나 깨끗하게 차려입고 있었고 향수 냄새를 풍겼다. 사람들은 아이들의 죽음에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은 채로 기진맥진 했지만, 계속해서 시위를 했다. 이들 중 어떤 부모가 딸아이의 머리를 따주고 알록달록한 리본을 달아주려 열심인 것이 보였다. 우리 중 누군가 그것을 보고 흐느껴 울었다. 사랑스러운 머릿결을 가진 그 아이들이 차가운 무덤 속에 있는 것을 생각하면서.

협상이 수개월 동안 계속되자 사람들은 점점 관심을 잃어 갔고 하나 둘 시위에서 현장을 떠났다. 지금도 여전히 믿기 어려운 것은 우리가 모든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시 철거반에 의해 죽은 아이들에 대한 아무런 보상도 없었으며, 더욱이 아무도 이 일로 형사상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해피엔딩을 좋아하지만 이곳 필리핀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이 다섯 아이의 죽음처럼 불행하게 끝나는 일이 허다하다.

실화. 데니스 머피, 마닐라, 필리핀.

한 10년 전에 이 이야기를 쓴 데니스 머피를 인터뷰하기 위해 만난 적이 있습니다. 너무도 바빠서 지붕이 있는 트럭 비슷한 차 뒤에 함께 타고 가면서 대담을 했는데, 그날도 위와 비슷한 ‘사건 현장’으로 가는 중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데니스는 한 때 메리놀회에 적을 두었던 선교사이자 ‘아시아 빈민운동의 대부’라고 불릴 만큼 오랫동안 도시빈민과 함께 살아왔던 실천가였기에 꼭 인터뷰를 하려고 했던 것이었지요. 한데 소음과 더위 등으로 제대로 대담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이 이야기를 보니 케손시청에 나부끼던 여러 깃발들이 뇌리에 여전히 남아 있어서 제게는 더 실감이 나네요.

섭씨 30-40도를 오가는 날씨가 갑자기 10도씨 아래로 내려가면 필리핀 같은 동남아시아 기후에서는 매우 춥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아이들은 ‘동사(凍死)아닌 동사’를 당한 셈입니다. 죽은 아이들은 사실 ‘거리의 아이들’이 아니라 철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밖에서 자야했던, 불행한 아이들이지만, 거리로 내몰리는 아이들의 이유가 거의 가난에 있기 때문에 크게 봐서 그렇게 불러도 지나침이 들지는 않습니다. 맥도날드 같은 패스트푸드점 주위에 몰려다니면서 구걸하고, 돈이 좀 모이면 안으로 들어가 사먹고 또 구걸하고…… 이런 아이들이 필리핀에는 아직도 넘쳐나는 것 같습니다. 어느 책 제목처럼 ‘왜 이다지도 가난한가’라는 말을 뇌까리게 하는 장면을 여전히 목격하게 됩니다.

데니스는 이야기 가운데 시위현장에서 들려오는 북소리를 마치 “하느님이 보고 계시고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을 시장이 알아듣고 피해자의 처지에서 무엇인가 하기를 바랐지만, 시장은 아마도 북소리를 듣지 못했거나 들었어도 데니스의 바람에는 아랑곳없이 무심하게 지나갔던 모양입니다. ‘적대적이지 않지만 미안해하지도 않는’ 시장에게 중요한 것은 아마도 그 ‘사건’을 조용하게 마무리 짓는 것이지, 피해자 입장에서 문제를 풀다가 자신의 정치적 생명에 지장을 줄 위험을 무릅쓰려 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아이들을 매장해야 한다는 절박한 상황 때문인지, 노련하고 경험 많은 데니스도 아무런 서면 확인도 없이 구두로만 시장과 합의하는 좀 어이없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어떻게 보면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더 잘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향수 냄새를 폴폴 풍기는 시장이 책상에서 서면으로만 대하는 아이들의 죽음은 아마도 그에게 충격이나 놀람은 고사하고 작은 파문조차 일으키지도 않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의 인간성이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에다가 사악하기가 유별나서라기보다는, ‘직접 경험’하지 않은 일은 좀처럼 자기 일처럼 여겨지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 여기저기를 가서 보면서 깨달은 것 가운데 하나는 가난의 참상을 직접 체험해야만, 가난한 사람에 대한 연민과 연대감이 더욱 오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라 위대하다고 하지만, 생각은 곧 잊혀지고 다른 생각에 자리를 내주면 곧 익숙해져서 그대로 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에 비해 오감으로 오는 체험은 생각을 더욱 분명한 기억으로 각인시키는 게 아닌가, 그래서 어찌 보면 느낌과 생각은 둘이 아니라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네요.

그런데 이 참상을 통해서 데니스가 ‘무고한 아이들의 죽음에 언제까지 하느님은 보고만 계실 것인가’ 하는 물음에 어떤 답을 얻었는지 궁금해집니다. 하느님이 정의롭다면 왜 이 세상에는 이 같은 불의가 끊이지 않는 것인가 또한 하느님은 왜 그에 대해 침묵하는가 하는 질문은 아시아를 비롯한 ‘제3세계’에서는 정말로 절박한 절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만일 그 침묵에 시원한 어떤 ‘정답’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경우는 다르기는 하지만, 지난번 남아시아에 휩쓴 쓰나미에 희생된 이들에게 한국의 한 개신교 목사님이 그랬다지요. 이들이 하느님을 믿지 않은 사탄의 자식들이라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말이지요. 아마도 이 둘은 정도만 다를 뿐이지 ‘인간의 뜻에다 하느님을 짜 맞추는’ 데에서는 오십보백보가 아닐까요? 비교의 대상이 적당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더욱 경계해야 할 것은 이런 의인론(依人論)적인 태도라고 보이는데 독자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리스도교에서 믿고 있는 ‘인격신’은 자칫 인간이 자기 뜻대로, 맘대로 해석해서 ‘만들어지는 신’에 처할 위험을 처음부터 갖고 태어난 것은 아닌가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모상’대로 인간이 창조됐고, 그리하여 하느님 또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순간부터 그 위험은 운명처럼 따라 다니기에, 하늘의 뜻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데 있어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고서, 그런 ‘교감적 성찰’이 없이는 어렵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우리의 우물에서 마시련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우리의 하늘에서 배우련다’는 말도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노력해 나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독자 분들에게 물음을 돌리며 인사를 대신합니다.

황경훈

온고지신(溫故知新)이 복잡한 현실을 살아가는 지혜라고 생각하고 부지런히 옛것과 새것을 공부하는데 열정을 쏟고 있다. 우리신학연구소 창립 때부터 현재까지 평신도 신학을 생각하며, 아시아 NGO 청년들과 함께 희망을 만들며 살고자 애쓴다. 현재 우리신학연구소 아시아신학연대센터 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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