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째려보기 – 가톨릭 여성단체들은 무엇을 하엿나

신영숙

  가톨릭여성단체들은 무엇을 하였나

담벼락을 넘은 목소리

초기 교회 강완숙에서부터 여성회장이 전교 사업에 발 벗고 나섰던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대세 주기, 병자 또는 냉담자 방문, 연금 희사와 모금, 교회 행사 준비 등 온갖 구진 일을 마다않고 교회 활동에 앞장섰다. 회장이 활동한다는 것은 바로 여성단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1927-1928년 활발했던 교회 여성단체 활동은 당시 여성단체 근우회운동 등이 식민지 한국사회에서 활발했던 사회분위기에 힘입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서울교구연보와 천주교 회보에 따르면 교회 여성단체들은 주로 성모성심회, 성모부인회, 안나회, 부인친애회, 천주교부인회, 성모성심부인회, 자모회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으나 활동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즉 부인야학을 설립, 운영하기도 하고 소년 소녀들의 작품전시회를 개최하는가 하면, 부인 견학단을 조직하여 자신들의 의식 고양과 교양 활동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밖에도 1928년 가톨릭부인회는 본당 신부의 본명 첨례의 축하회, 기념품 증정 등에서부터 청년 자제 육성을 위한 개량서당을 운영, 공미조합을 시행하는 등 교우 남녀들이 힘을 모아 자신들의 지역과 교회 발전에 힘쓴 경우도 적지 않다(회보 19호, 28. 10).

재미있는 사실로는 1927년 여성명도회의 회원 자격에 1명의 무식한 예비자를 가르쳐야 하는 것을 명기하기도 하였으며(서울교구연보 (II), 228), 단체 조직은 문산과 진주 성모부인회 등에서 알 수 있듯 창립총회 당시 회원 수십 명에 회장, 회계, 서기, 간사 등으로 구성되었다(회보, 10호, 28. 1).

여성단체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활동은 전교였다. 일례로 1923년에 창립된 평양성모회의 평양부인 전교 상황을 보면, 1932년 현재 회원 50여명에 대인 영세자 135명, 대인 대세자 167, 영해 대세자 1033, 냉담자 회주 115, 외인귀화 영해 12명이라는 큰 성과를 거둔 경우가 있다(회보 59호, 32. 2). 또한 1928년 3월 장연본당 경애유치원 후원회의 창립총회에는 참석자 500여명에 회원이 280명으로, 장연의 일반 유지 부인이 망라되었다. 회장 김승애 외 부회장, 총무 등 임원만도 28명으로 높은 참여를 보여준다(별, 28. 4).

1930년 11월에는 대구성모회 소년부 주최의 소년소녀 작품전시회, 청년부의 토론회 개최 등은 성모회유치원 운영의 모범을 보인(회보 44호, 30. 11)것이었으며. 1931년 평양 본당 여자청년회 주최 부활축하음악회 개최, 함남 문천 공소의 소년소녀회 창립(회보, 31. 5) 등에서도 여성들의 활약을 알 수 있다.

한편 루가 2,36-38 여성 예언자 안나의 이름을 딴 여성단체들이 다수인 것도 주목할 만하다. 1928년 8월 26일 장연의 안나회 정기총회에는 60여명이 출석하여 안건 ‘매주일 교리 학습, 공미(公米) 선전, 회비 수합과 저축’ 등을 논의하고 회장, 부회장, 총무, 서기, 간사 등 임원을 선출하였다. 진남포 본당 안나 부인회 회원 70여명은 한 달에 두 번 고해 성체하고, 회원 한사람이 1년에 냉담자 외 외인 1명을 반드시 회두, 귀화할 것을 주요 활동으로 우선시하였다. 또한 가난한 병자나 상가에 치료비와 장례비 후원 등 애긍과 봉사를 통하여 전교에 큰 도움을 주었다. 경성부 혜화동 본당 안나회는 교회 창립 100주년 축하 행사로 1931년 9월 27일 「사랑의 예수」 성극을 공연하였으며, 백주년기념병원 건립에 26원의 수익금 전액을 희사하기도 하였다(별, 52호, 31. 10).

천주교 교회의 든든한 머릿돌

2003년 만났던 안나회 회원의 구술을 통하면, 1888년에 설정되고 1907년에 설립된 강원도 횡성 풍수원 성당의 안나회는 창립 후 회원이 많을 때는 70여명이나 되었다. 처음에 동정녀 생활을 하는 몇 명 여성으로 출발하여, 회칙이 만들어진 것은 근 20여년이 지나서였는데(원주교구 주보 <들빛> 1300호(2003. 7. 21)-1305호(9. 1) 1935-1936년경에는 매주 1회 모여 성경 읽기와 문답으로 교리 공부를 하고, 당시 입회금 쌀 5, 6 되를 모아 무의무탁한 이웃을 돕는 일이 주된 활동이었다.

이외에도 본당 마당의 풀을 뽑고, 제대상을 닦는 등 간단한 청소에서부터 신부님을 모시고 공소 가는 일 등 교회의 크고 작은 일들에 이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당시에는 영성체를 위한 제병도 안나회원의 집에서 직접 만들었을 만큼 안나회의 활동이 다양했다. 풍수원 본당에 수녀가 온 것이 1999년경이라고 하니 그간의 활동이 얼마나 막중한지 짐작이 된다.

2003년 현재 안나회 회원은 약 30명 정도로 이제는 70-80세가 되었지만 매달 1000원의 회비를 내고 첫 금요일 월례회를 하며 가을에 한번 교무금을 바치는 활동은 이어지고 있다. 물론 기도 생활과 연도는 여전히 안나회 활동의 중심이다.

이렇듯 일제강점기 교회 여성단체들은 작은 공소에서부터 해외에까지 교회 발전에 빛을 발하였다. 문경 공평리나 강경의 군산공소 등 공소에서도 모범을 보인 여성신자들은 성모성심회 등 단체를 만들어 함께 작농하며 공소나 유치원을 관리, 운영하였다. 국내 후원까지 마다하지 않은 하와이 소데레사회 등이 그 예라 하겠다.

하지만 교회여성 단체 활동은 1920년대부터 30년대, 그리고 40년대에도 전교를 목적으로 하는 구체적인 개별 여성들의 활동과 내용상 큰 차이는 없다. 그러나 대체로 교회의 여러 행사를 주선하고 모금과 봉사 활동 등을 보다 조직적으로 함으로써 교회는 물론 학교 등 시설을 후원할 수 있었다. 또한 그 같은 조직적 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신앙과 교양을 쌓아가는 데도 효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 큰 성과라 하겠다. 이에는 보다 더 헌신적인 부인(여성) 회장 등의 노력이 있어 가능하였고, 이같은 여성들의 신앙과 전교 생활은 1930년대 후반 일제가 전시 체제로 돌입한 이후 크게 달라진 교회 사정과는 달리 여전히 제 몫을 다함으로써 신자들의 신앙생활과 천주교 교회를 떠받쳐 주는 초석이 되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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