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째려보기 – 여성은 교회에서 무엇을 배웠나?

신영숙

선교의 일환이 된 여성 교육

일제강점기 가톨릭교회의 여성 교육에 대한 관심과 실천적 활동은 당시 시대적 요청에 부합되는 것이었을 뿐 아니라 선교를 위한 필수불가결의 중요한 것이었다. 1887년 용산에 ‘예수성심신학원’이 최초로 개설되었다. 같은 해 7월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수녀 4명이 입국하여 교구 일을 돕기 시작하면서 여성 교육도 실시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외세의 각종 침탈에 위기감을 느끼며 부국강병의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 이른바 서구화, 근대화를 위한 신식 교육이 시급한 과제로 부상하고 있었다. 여성 교육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를 테면 교회도 남녀 평등을 사회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무엇보다 여성 교육을 강조하게 되었다.

당시 가장 활발하게 여성교육이 실시된 곳은 개신교였다. 천주교 여성 교육도 그에 못지않은 열성과 의욕으로 추진되었으나, 실제 여성 교육의 객관적 조건은 매우 열악하였다. 학부모들은 여전히 경제적 빈곤과 여성을 차별하는 봉건 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하였고, 교인 중에서도 여성 교육에 무관심하거나 냉담한 사람이 적지 않았던 데다 교회는 늘 재정적 부담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당시 천주교회가 소명의식에 지나지 않더라도 여성교육에 대해 남성교육에 뒤지지 않는 주의와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개신교가 도시 중심으로 여성 인재 양성을 목표로 하였다면, 천주교는 농촌 지역에서 문맹 타파 등 기초 교육을 중심으로 하였다. 동시에 교회가 세운 여학교들은 외교인 여학생들을 위한 복음 전파의 수단이 되었을 정도로 전교는 언제나 교회의 기본적인 목표였다. 예컨대 1913년, 가장 먼저 세워진 제물포 여학교는 100명도 넘는 어린 외교인 여학생들에게 천주교 여성교육의 효과를 크게 기대한 것이었다(서울교구연보 II, 116쪽). 결국 천주교 여성교육의 목표는 한마디로 성모 마리아를 모범으로, 사회와 가정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여성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현실적으로는 남녀 성역할 분담에 맞는 근대적 생활 방식을 열심히 배워 가정을 경영하고, 자녀를 교육할 수 있는 현모양처 여성이었으며, 종교적으로는 당연히 선교에 앞장 서는 여성이었다. 이를 위해 약간의 실업 교육도 권장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민족의 어머니’라는 마리아와도 같은 여성을 표방하였다.

여성 활동영역의 족쇄, 마리아

이 같은 여성교육은 여학교 이름에서도 잘 드러난다. 해성, 신성, 계성, 효성 등 한결같이 ‘별빛처럼 반짝이는 성모님’을 닮은 여성을 의미한다. 특히 해성이란 이름은 ‘성모님의 바다에 빛나는 별’과 같이 그 은총을 넓고 환하게 비춘다는 취지에서 가장 많이 쓰였다. 결국 교회의 여성교육은 무엇보다 마리아와 같은 믿음과 순종의 여성을 지향하는 것으로, 그것이야말로 당시 일제가 강요한 근대화, 식민지 체제에 순응하는 현모양처 여성교육 정책에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여성 자신을 위한 여성교육이란 교육의 주체 문제나 식민지 사회의 민족 문제 등에서 어떤 조정을 할 수 있었는지 짚어봐야 할 부분이 적지 않다.

교육 내용은 가장 기본이 되는 문자 해독에서부터 수예 재봉은 물론 수리, 역사, 미술, 음악에 이르기까지 실용과 정서 교육을 함께 하여 생활에 필요한 전인 교육을 향하였으며, 그것은 곧 하느님의 자녀로 나아가게 하는 길로 이해되는 교육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자녀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한 어머니 교육도 강조되었다. ‘자녀교육은 곱게 입히고 맛난 것 먹이는 것만이 아니다. 장래를 위해 어릴 때 천주를 공경하게 하도록 하는 정신 교육’이 부모의 책임으로 역설되었다(가정란, ‘자정 많으신 할머님과 어머님들에게’, <천주교회보> 5호, 1927년 8월). 이와 함께 젖먹이는 방법이나 회수, 양과 시간 등도 자녀 양육의 합리적인 기초 교육으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또한 정읍의 신부 베셀은 “어진 부모와 착한 선생은 천주의 자녀 된 의무에 복종하며 사람 된 책임을 실행케 하기 위해 교육의 방법, 상벌의 필요, 가정과 학교의 연락 등을 중시하라”(‘자녀교육에 대하여’, 천주교회보 24호, 1929년 3월)고 가르쳤으며, 거제의 김바오로 신부는 “1. 자녀의 영혼과 육신의 교육이 절대 필요함. 2. 과불급의 사랑은 없음만 같지 못하다. 벌할 때와 상줄 때를 잘 분별하라. 3. 자녀 간 차별을 두는 것, 즉 여아를 차별하는 것은 비가톨릭적 행위이다. 이는 무심함이며 미혹함이며 인도에서 벗어남이다. 4. 방종하여 가사를 모르는 자녀의 산업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모는 적당한 시기의 자녀의 독립 생활을 생각하라. 5. 자녀의 결혼기를 천백가지 무력한 핑계 하에 연기하는 것은 폐단이다. 적당한 시기에 혼인시켜 이혼, 정사, 자살 등의 불합리, 비도덕을 예방하라”는 등 구체적인 제안도 하였다(‘남의 부모 된 이와 장차 될 여러분에게’, 회보 41-42호, 1930년 8월, 9월). 이 같은 교회의 자녀교육에 대한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상당히 유효한 것으로 볼 만하다.

여성교육은 주로 교회의 부설 학교가 담당하였지만, 수녀회나 여성단체를 비롯한 교회 소속 단체의 후원이 큰 몫을 차지하였다. 교회와 단체는 주일 학교, 유치원은 물론 나이든 여성을 위한 야학도 많이 설립하였다. 때로 강습소, 학원 등의 이름으로도 불린 이들 야학은 총독부의 정식 인가를 받지 않은 3개월, 또는 6개월 정도의 단기 과정의 기초 교육을 주로 하는 곳이었다. 이들은 종래 민간 설립의 개량 서당과도 같이 교회 청년회와 여성단체 등의 적극적인 협조로 운영되었다. 교회단체들은 교육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모금도 하고, 수예, 자수 등 작품전시회, 바자회도 개최했다. 대구성모회가 지원하는 대구해성여자야학을 비롯, 해성여자야학은 전국 여러 곳에 설립되었다. 이런 곳에서 가난한 농촌 지역의 여성들은 부족한 대로 배움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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