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마실 – 가부장제로부터 성과 사랑을 해방하라

백소영

가부장제로부터 성과 사랑을 해방하라

간음하지 말라 ․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제도적 감정, 그와 그녀의 사랑의 온도 차이

‘여자들은 사랑에 빠지면 자신을 버리고 남자들은 사랑에 빠지면 자신을 확장시킨다!’ 근대계몽사상가 루소의 말이다. 실제로 대부분 남자들은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면 정신을 차린다. 열심히 공부하고 직업세계에서 살아남으려 최선을 다한다. 자식과 아내를 건사하기위한 몸부림이다. 반면 여자들은 사랑에 빠지면 보통 일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은 일을 포기하게 되는 상황이 많다. 루소는 이것을 남성과 여성의 본성이라고 설명했지만, 사실 이는 제도적 감정이다. 외부환경의 조건 때문에 형성된 제도적 감정을 본성이라 착각하는 것뿐이다. 때문에 신자로서 우리는 우리가 갖는 제도적 감정을 하느님이 지어놓으신 인간의 본래 모습에 비추어 점검해야 하며, 그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모습과 다르다면 이를 극복하고 본래적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성서 안의 가부장주의

‘간음하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성서에 쓰인 하나님의 계명이라 해도 이 금지조항을 ‘축자영감적으로 읽기’는 불가능하다. 현대의 신자들 중에 이 성서본문을 읽으며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고 쓰여 있으니 이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이웃의 남편은 탐해도 된다’고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엄격한 가부장제 문화를 가졌던 전통사회의 문서에서는 화자(話者)나 청중이 모두 남자였다. 이를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현대적 상황에 맞게 적용할 수 있을 일이다. 때문에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십계명을 살펴본다는 것은 오히려 계시로서의 보편복음을 찾기 위한 노력이다. 이를 위해 먼저 ‘가부장들’이라는 특수그룹의 편견을 벗겨 내는 작업이 필요할 뿐이다.

‘남성 화자가 쓴 성서의 맥락(context)에 가부장제의 전제나 규범이 반영되어 있다’는 말은 성서를 계시한 하느님이 유한하다고 말하는 게 결코 아니다. 다만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성서를 쓴 남성 저자들이 자신의 전제나 시대 권력의 욕망과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여성 응시와 통제의 역사

생명 탄생의 과학적 원리를 몰랐던 원시공동체에서 출산 능력을 가진 여성은 두렵고 경이로운 존재였다. 여자만 아이를 낳고 모유를 제공할 수 있다는 생물학적 능력은 공동체의 존속이 여성에게 달려 있다는 말 아니겠나! 하여 원시공동체의 남자들은 모성을 경외하고 찬양했다. 가부장제 이전의 사회에는 생명을 잉태하게 하고 보호하는 여신들이 참 많은데 이는 원시 남자들의 여성 응시를 반영한다.

그러나 기원전 3천년 전후로 가부장제가 확립되면서부터, 남성들의 여성 응시가 급격히 달라졌다. 지위나 잉여 재산 등 배타적으로 누리는 것들이 생겨나자 남자들은 이를 영속시키고자 욕망했다. 자신의 후손에게 부와 권력을 물려주고자 했던 남자들은 가부장제를 만들어냈고, 남성의 소유를 유지하는 차원에서 여성의 성을 통제했다. 제일 시급한 과제는 아마도 여성을 열등한 성으로 확립시키는 것이었으리라. 가부장제 문화권에서는 이후 열등한 성으로 그려내는 글과 담론이 넘쳐났다. 구약성서에도 남자아이를 낳은 것보다 여자아이를 낳은 게 더 부정하다고 말하지 않던가. 가부장제 사회 안에서는 모성을 상당히 폭력적으로 통제해왔다. 내 아기의 엄마여야 되는 모성이 간음한다면 가부장은 생살여탈권까지 있었다. 이는 동․서양 차이가 없이 가부장적 사회의 공통된 규범이었다.

하지만 근대법이 확립되면서 더는 폭력적으로 여성의 성을 통제하기 힘들게 되었다. 유럽의 계몽주의적 남성지식인들이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고 이야기했을 때, 사실 만인은 바로 본인들, 즉 제3계급인 부르주아 남성들이었지 여성은 포함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 자체가 보편적 선언이다 보니 여성들도 곧 참정권, 교육기회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만인이라며? 그럼 우리도 권리를 주장할 수 있지 않은가?’

결국 이성과 합리성이 중심가치인 근현대 사회에서 존재론적으로 여성을 열등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어렵게 되자, 가부장제는 기능적 위계를 통해 여성의 성 통제를 이어가려 했다. 특히 ‘남성과 여성은 존재론적으로는 평등하지만 기능적으로는 위계적’이라 선포하며 창조질서로서의 성 분업을 주장한 현대 기독교 윤리담론은 가장 전형적이다. 이 말은 하느님이 인간 존재를 평등하게 지으신 게 맞지만 기능면에서 남자는 그리스도와 같이 머리의 역할을 담당하고 아내는 교회처럼 몸의 역할을 담당한다는 이야기이다. 소위 ‘부드러운’ 가부장제의 탄생이다. 죽기까지 아내를 사랑하는 온유한 남편이라는 이상은 부드럽기 그지없지만, 그가 아내의 머리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결혼제도는 여전히 신적 질서로 받아들여졌고 이를 유지하고 보호하기 위하여 간통은 어떤 형태로든 처벌되어야 했다. 근대법에서 정의하는 간음과 간통은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자신의 배우자 이외의 남자 또는 여자와 합의의 정교관계를 맺는 것이다. 배우자를 법적으로 보호하고, 가정의 제도적 안정성을 강조하는 것이 핵심이다. 십계명에서 소유권의 선포가 일방향인 남성주체였다면, 근대법은 쌍방향이라는 부분만 차이가 있을 뿐 사실은 계속해서 소유권의 선포를 담고 있다. ‘결혼한 부부는 서로 소유관계가 있는 사람이다. 남의 소유권을 침범하지 말라’는 법적 확립이 되는 것이다. 전통적 가부장제가 그 폭력성으로 인하여 적과 동지가 분명했다면, 근현대에 등장한 부드러운 가부장제는 낭만적이고 윤리적인 언어로 포장되어 그 구조를 파악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소비 자본주의적 응시와 합류적 사랑

가부장제에서 경멸의 대상, 위험, 혹은 열등의 기호였던 여성은 근현대로 오면서 다시 찬양의 대상으로 변모했다. 원시공동체의 여성 찬양이 주로 모성에 집중해 있었다면, 현대의 여성 찬양은 ‘낭만적 사랑의 대상’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었다. 다분히 여성의 몸에 대한 긍정적 응시이다. 사실 현대 이전의 기독교 전통에서 여성의 육체는 고매한 인격이나 신앙을 가진 남성 수도자를 타락에 빠뜨리는 ‘위험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런데 개신교 설교자들은 아내의 육체성을 아름답게 그리며 이를 신앙적으로 정당화했다.

이것은 근대 가정제도의 기초가 되는 ‘낭만적 사랑(romantic love)’이 전개된 상황과 맞물린다. 낭만적 사랑은 본디 12세기 서구 궁정의 특수문화로 등장한 ‘혼외의 감정’이었다. 그러던 것이 19~20세기 보편적 감정이 된 것은 근현대 사회의 변화된 환경조건이 크게 작용한 까닭이다. 로맨스 대상의 여자는 하늘하늘 여린 육체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감수성의, 남자 없이는 뭐든지 서툴며 늘 헤매고 불안정한, 그래서 남자가 도와주고 지켜주고 보호해줘야 하는 여자이다. 인류 역사상 낭만적 사랑의 대상이 노동하는 여자였던 적은 없다. 그것이 중세의 귀족여성이든 근현대의 레이디이든 그녀들은 노동의 의무로부터 자유로운 여성들이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이처럼 ‘사랑스러운 여성’이 근현대 사회에 와서 차고 넘치게 되었을까?

산업화 이후 생산방식에 획기적 혁명이 일어남으로써 인류의 반, 즉 남자들만 일해도 먹고 살 수 있는 노동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근대 초기의 여성들에게는 분명 좋은 조건이었고 삶의 향상이었다. 일하지 않아도 되는 여성의 ‘대량 생산’은 신분제의 붕괴와 맞물려 비로소 그녀들을 로맨틱 대상으로 여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랑받는 일’이 주된 사명이 된 여성들에게 소비자본주의적 사회는 상품가치로서의 여성의 몸을 강조했다. 한 여성학자는 여성들을 비탄에 빠뜨린 인류 근대사회의 발명품으로 전신거울, 텔레비전(혹은 영화), 체중계, 사진기를 꼽은 적이 있다. ‘육체문화’를 양산하는 산업과 상업은 이러한 문명적 도구들을 통해 자기 몸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라 부추기면서 자신의 몸을 잘 관리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소비를 하라고 종용한다. 인류 최초로 아기를 닮지 않은 팔등신 미녀 인형 ‘바비’는 끊임없이 옷과 장신구를 사주어야 하며, 바비에 걸맞는 완벽한 미남 켄 역시 구비해야하는 상품들이 많다. 바비와 켄을 가지고 놀면서 아이들은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이기 위해 화장을 하고 몸을 만들어야 함을 학습하고 내면화한다. 드라마나 영화, 광고 영상에 차고 넘치는 사람들은 다 ‘인형녀’ ‘인형남’이다. 본디 인형(人形)이란 사람의 모양으로 만든 장난감인데, 이제는 사람이 인형을 닮으려고 안달이다.

이런 육체문화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사랑이 등장해 점차 낭만적 사랑을 대체하고 있다. 낭만적 사랑의 목적이었던 결혼은 더 이상 필수적 ‘해피엔딩’이 아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삶의 조건이 낭만적 사랑을 즐길 만큼 한가하지도 안전하지도 않다는 사회현실은 이 새로운 사랑의 확산을 더욱 부추긴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결혼제도가 개개인에게 깊은 의미를 주었지만, 21세기는 무한경쟁이 삶의 조건이 되었다. 경쟁력 있는 사람은 이제 개인이다. 가족이 있다는 것, 내가 돌볼 누군가 있다는 것은 내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불리한 삶의 조건인 세상이다.

이런 조건에서 등장한 21세기적 사랑이 소위 ‘합류적 사랑(confluent love)’인 거다. 성과 사랑은 본능이기에 사라지지는 않는다. 다만 사회적 조건에 따라 변형될 뿐이다. 이제는 많은 젊은이가 상대방과 같이 지낼 수 있는 동안만 사랑하다가 상황이 바뀌면 쿨하게 헤어지는 사랑의 형태를 지향하고 있다. 짧고 한시적인 사랑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육체적으로 끌리는 성적 매력뿐이다. 이 사랑은 사람들이 지닌 여러 가지 인성적 매력들이 탈각된 상태로, 오로지 육체성만이 중요한 요소로 찬미된다. 이제는 점점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성적 부분만을 강조하는 사회, 상대방을 인격으로 보는 게 아니라 성적 대상으로만 응시하게 되는 사회에 도달한 것이다.

관계적 자아의 회복, 응시의 시선에서 의미의 시선으로

이런 사회에서, 이런 사랑을 보며 우리는 오늘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해야 할까? 예수께서는 ‘간음하지 마라. ……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했다.’(마태 5,27-28)라며 응시의 문제를 지적하셨다. 즉 대상화의 시선, 상대방을 인격체나 인간으로 보지 않고 음욕을 품은 것 자체가 간음이라고 말씀하셨다. 간음은 행위의 문제라기보다는 관계성의 문제이고, 응시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 가르침을 십계명의 6계명, 9계명과 연관하여 말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이 여자든 남자든 육체나 육욕의 대상이 아닌 전인격체로서, 관계적인 대상으로 대해지기를 바라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메를로-퐁티(M. Merleau-Ponty)라는 철학자는 ‘인간은 관계 안에서 마치 주름처럼 겹쳐 있는 존재’라고 말했다. 대상화해서 보고 육체로 응시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간음하지 말라, 사람을 탐내지 말라’는 이야기는 소유의 선포나 가부장적 언어 혹은 소비 자본주의로 포장되어 있는 몸을 상품화한 그런 언어라기보다는, 사람을 응시의 대상으로 여기지 말고 의미의 대상으로 여기라는 하느님의 가르침이 아닐까?

‘간음하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라는 금지어로 되어 있는 명령에 내포되어 있는 하나님의 계시, 보편적 뜻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절대로 상대방을 소유하려고 하지 마라. 그의 어떤 부분을 대상화해서 바라보지 마라. 진정한 의미의 관계성 안에서 네가 변하고 내가 변하는 그 혁명을 시작하라! 수천 년 전 십계명이 오늘날에도 유효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것이 아닐까?

백소영

뭐든 만드는 걸 좋아하는 여자. 기독교사회윤리학을 전공한 탓에 ‘아이 키우기’도 ‘신앙생활하기’도 사적(私的)일 수 없어 쓴 신간이 <세상을 욕망하는 경건한 신자들>이다. 달랑 아들 하나 키우지만 ‘엄마 되기, 힐링과 킬링 사이’라는 글을 쓸만큼 치열하게 살고 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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