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째려보기 – 여성교육에 헌신한 수녀들

신영숙

여성교육에 헌신한 수녀들

수녀들 교직에 앞장서다

가톨릭 여성교육은 수녀들의 헌신적인 활동에 힘입은 바 크다. 처음 여학교 교사는 주로 수녀원에서 파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고, 교구는 계속 수녀 교사 양성에 힘썼다. 자격증을 가진 일반 여교사들이 수녀보다 3배의 높은 월급을 받음으로써 학교 운영에 큰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수녀와 교사 양성은 거의 같은 비중으로 중시되었고, 한국인 수녀 교사 양성이 특별히 강조되었다.

샬트르성바오로 수녀회는 1899년 중림동 약현본당에서 가명학교를 설립한 것으로 수녀 교사 활동을 시작하였다(<약현 100년사>, 1992). 가명보통학교는 1925년에 인가를 얻어 재학생 남녀 385명, 수녀원 기숙사생 25명이었으며, 1936년에도 학급 수 12개를 유지하며, 남녀를 분리하여 교육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였다.

또한 1906년 9월에 설립된 계성보통학교는 1909년 남자부 계성과 따로 여학교 계명으로 분리되었다. 1918년에도 여학생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였으나, 1922년에는 계성에 남학생 172명, 계명에는 여학생이 230명이나 되었다(<계성초등학교 110년사>, 1994, 90-95쪽). 이처럼 여학생이 더 많았던 이유는 일반 여학교가 그만큼 부족했고, 수녀들의 여학생 지도에 대한 헌신과 열성이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1912년 프랑스 수녀 2명이 대구 효성여학교 교사로 부임한 후 교세와 교육열의 확장에 따라 전국 곳곳에 성바오로회 수녀가 파견돼 신설 본당과 학교를 설립하였다(<바오로 뜰 안의 애환 85년>, 229쪽). 1925년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들은 10여개 본당 학교에 수녀들을 여선생으로 파견했는데, 당시 가밀라 원장 수녀는 고아들도 거절할 만큼 재정 상황의 악화를 견뎌야 했다. 더욱이 수녀들은 폐결핵으로 쓰러지기도 하였으며, 장티푸스로 2명의 수녀가 사망하는 등 열악한 조건 속에 험난한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1920년대 중반에는 미국의 메리놀수녀회, 독일의 성베네딕토회 수녀들이 들어와 여성 교육에 기여했다.

한국인 수녀들도 ‘착한교사’가 되어 갔다

선교사들은 한국인 수녀와 교사를 양성하여 그들이 다시 한국인 여성 교육을 담당케 하는 방법에 고심했다. 성바오로회 수녀들은 한국의 처녀들에게 그들의 의무를 알고 이웃 사랑을 위해 스스로를 기꺼이 바칠 수 있는 지도자가 되도록 열심히 교육하였다. 또한 수녀회에서 구체적으로 내세운 여성교육의 목표는 한마디로 “한국의 소박한 여성들을 외국인들 앞에 내세워도 손색이 없는 예모 있고 정숙한 여성으로 키우는 데 세심한 주의를 다하는”데 있었다(<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50년사>, 64-65쪽). 이는 서구 기독교의 교육 목표와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1913년 계성의 교장 장발은 수녀들에게 감화력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여성의 정서 교육에서 수녀의 활동은 중요한 것이었다. 신입생들의 1/3 정도가 신자였는데, 수녀들의 지도로 2/3로 증가하였다. 이 학교는 성모 기숙사도 있어서 지방의 우수한 학생들이 왔고, 졸업 후 프랑스 유학도 기대할 수 있었다(<계성초등학교 110년사>, 33-35쪽). 그러나 교과목에는 오히려 당시 절실히 요구되는 경제난 타개를 위한 실업 교육이 더 많이 들어 있었다. 실제로 이론 수업과 함께 실습, 작업 등을 통해 학교 재정에도 충당하고 졸업 후에는 가족 생계 보충에 도움이 되는 실제적인 효과를 노린 때문이었다.

1918년 9월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에 한국인 수녀 1명이 파견된 후 수녀원에서 자극 받고 양성된 한국인 수녀들은 그나마 민족 교육에 기여하였다. 성바오로회 한국인 수녀들은 1923년 의주뿐만 아니라 평양, 진남포, 황해도 장연 등에서 완벽하게 학교를 운영함으로써 성과를 이루고, 도처에서 여학교를 위한 수녀를 요구하였으나 감당하기 어려웠다(서울교구연보 II, 197-199쪽). 1924년 성바오로수도회 한국인 지도신부는 수녀들에게 자선을 역설하며 매일 수녀원을 방문하여 국사, 한문, 한글, 수학도 지도하고, “그저 착하게” 살라고 가르쳤다. 그의 가르침을 따라 수녀들은 착한 교사로 헌신하였으나(<바오로뜰안의 애환 85년>, 229-230쪽), 여성교육의 수요에 비해 여교사는 늘 부족했다.

1923년 5월 메리놀회는 평양교구설정을 준비를 위해 의주에 왔고, 1925년 10월에는 수녀들이 입국했다. 그들은 한국인 수녀 2명과 함께 1926년 평북 영유에 수녀원을 신축하고, 여자기예학원을 설치해 15세 전후 소녀들에게 자수를 지도했다. 동시에 한국인 수녀 양성을 계획하여 1930년 영유 수녀원 지하에 한국인 처녀 3명과 중국인 교사 2명을 모아 공동생활을 시작하였다.(성모수녀회 50년사, 40-42). 1931년에도 5, 6명의 처녀들이 공동생활을 하며, 한국인 수녀회 탄생을 기도하였다. 당시 첫 입회자 5명은 모두 평양 성모학교 재학생이었다(상동, 50).

수녀들은 1930년대 이후 보육원, 영아원 등을 설립하여 사회구제 사업을 통한 여성교육에 기여했다. 예컨대 1935년 12월 송정 본당의 성모자애보육원 설립이나, 예수 성심시녀회의 모체가 된 영천군 화산면 용평리의 ‘삼덕당’(천주교대구교구, 교구사연대표, 1984), 1936년 4월 왜관의 소화여자학원, 1944년 1월 대구의 샬트르수녀회 분원 설치와 백백합 보육원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 일제의 전시 동원체제에 따라 충량지순한 ‘황국’ 여성 육성을 표방하며 여성교육이 더욱 왜곡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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