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로 떠나는 아시아 여행 – 하느님의 법과 인간의 믿음

황경훈 아시아 평화 연대 센터장

하느님의 법과 인간의 믿음

눈이 부시도록 푸른 저 쪽빛 하늘을 올려다보노라면, 왜 시인 고은이 동해를 대불(大佛)이라고 했는지 좀 이해가 갈 듯도 합니다. 정작 비행기에서 바라다 보이는 하늘은 공기와 햇빛이 반사되어 만들어내는,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일 뿐인데 우리는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넘어 어떤 신비로움과 거룩함도 느끼는 듯합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하늘에 지내는 제사가 전통으로 지켜져 내려왔고, 신 가운데서도 천신을 가장 높은 자리에 모시고 지고신(至高神)으로 숭배해 온 것은 아닌가 합니다. 체제를 유지하고 질서를 잡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 온 역사의 흔적도 분명하지만, 이제나 저제나 사람들이 전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종교 또는 종교체험을 그렇게 소극적으로만 볼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이런 생각자체를 부정하면서, ‘종교는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종교박멸을 위해 애쓰는 분들도 있다고 알고 있지만, 인간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거나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면 자연적으로 소멸될 것을 굳이 그렇게까지 야단법석을 떨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오늘은 한 이슬람 국가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인간의 ‘믿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드리지요. 저 푸르름 뒤에 무엇이 있을 지 믿음을 데리고 함께 여행을 떠나 보시지요.

세 친구의 믿음

대장장이 ‘압둘’과 농부인 ‘알리’, 이맘이라 불리는 이슬람 성직자 ‘카림’이 한 마을에 살았다. 압둘은 술고래였고 자기가 대장장이라고 큰소리치고 다녔지만 일생에 단 한 번도 낮에 제대로 일해 본 적이 없는 위인이었다. 알리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해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부지런히 그의 농토를 일궜다. 그는 때로 욱하는 성질 때문에 싸움을 할 때도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천성이 고지식하고 착했다. 이맘인 카림은 아주 경건한 사람이어서 마음에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 멀리서도 찾아와 그의 온화한 얼굴을 대하고 치유되어서 돌아가기도 했다.

그런데 신의 시험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이 세 사람 모두 그만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다. 이들은 문둥병을 전염시킬 지도 모른다고 사람들이 점점 더 두려워하자 이 나라의 엄중한 법에 따라 가족 곁을 떠나야 했다. 마을 밖으로 나가 서둘러 작은 헛간 같은 집을 짓고 이 세 명이 옮겨와 함께 지내게 됐다.

어느 날 밤 세 명은 비슷한 꿈을 꾸게 됐는데, 꿈속에서 이들은 “치유를 위해 기도하라”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잠에서 깨어나자 이들은 같은 꿈을 꿨다는 것을 알고는 그 꿈은 분명 하느님이 보낸 메시지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기적적인 치유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사흘이 지나자 주정뱅이 압둘이 치유되었고, 곧바로 마을로 돌아갔다. 그는 어떤 이유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다른 두 친구보다 하느님이 자기를 더 사랑한다고 확신했다.

세 달이 지나자 농부인 알리도 낫게 됐다. 그도 마을로 돌아가서 다시 삶을 시작했는데, 한 가지 아직도 문둥병으로 고통 받는 그 경건하고 거룩한 카림보다 자기가 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지 의아함이 가시지 않았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하기를, “혹시 카림이 거룩하다는 게 가짜가 아닐까? 만일 그가 정말로 그렇게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이라면 우리 둘보다도 먼저 치유됐어야 하는 거 아닌가?”하고 의심했다. 또 한편으로는 왜 주정뱅이는 3일 만에 빨리 나았는지, 정직하게 살아온 자기는 3개월이나 기다려야 했는지도 무척 궁금했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맘인 카림은 낫기 위해 계속 기도했지만 여전히 문둥병은 치유되지 않았다. 아무도 찾아와 그의 얼굴을 더 이상 보려하지 않았고 그의 초라한 집을 거쳐 지나는 것조차 피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얼굴과 몸은 점점 더 혐오스럽게 변해갔다. 알리는 일하러 밖에 나갈 때마다 이 일들을 깊게 생각하곤 했다.

어느 날 밤 알리는 꿈속에서 자기에게 말을 건네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

“알리, 내 아들아, 네가 이맘인 카림 때문에 상심하고 있는 줄 알고 있다. 너는 너보다 못한 사람이 왜 더 빨리 나았고, 반면 너보다 더 나은 사람이 아직도 치유되지 않았는지 궁금해 하고 있지. 자 들어보면 이해할 것이다.” 하느님의 목소리는 계속됐다.

“나는 압둘의 기도를 빨리 들어주었는데, 그것은 그가 약하기 때문이다. 사흘 동안 믿음으로 기도한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만일 그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고 미뤘다면, 그는 아마도 심한 절망에 빠졌을 것이다. 또 네가 세 달을 기다려야 했던 것은 네 믿음이 그만큼 깊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 달이 지난 뒤에는 그런 네 마음에 동요가 일어 믿음을 잃을 수도 있다. 이해하겠느냐?”

농부는 대답했다. “네. 주님 이해합니다. 말씀하신 모든 것이 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맘 카림은 어떻게 된 일인지요? 언젠가 그도 치유 받을 수 있는 건가요 아니면 그는 영영 기도만 해야 하는 것인가요?”

긴 침묵이 흐른 뒤, 다시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맘의 믿음은 완벽하기 때문에 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아도 된다. 그 이맘은 나의 친구이며 나의 마음을 잘 안다. 내가 그의 기도를 들어주든 말든 간에 그는 나를 신뢰한다. 사실, 내가 더 늦출수록 그의 신뢰는 깊어진다. 이제는 그가 나와 정말 가까워져서 더 이상 내가 그를 낫게 하든지 아니든지 별 상관이 없게 됐다. 그에게는 무엇이든지 나인 것이다.”

다음날 아침 알리가 깨었을 때, “모든 것이 그에게는 나다”라는 말이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그는 침대에 앉아서 창문을 통해 떠오르는 해를 보며 생각했다. “하느님이 나에게 모든 것이 되는 날이 과연 올까?” 그리고 나서 그는 그의 건장하고 튼튼한 손을 바라보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는 자신이 문둥병자가 아니라는 것을 후회했다.

닐 귈레멧 ‘우리 심장보다 위대한’ (마닐라: 성 바오로 출판사, 1988)에서 정리 수록.

저는 이 이야기가 계속된다면 자신이 문둥병자가 아니라는 것을 후회한 알리가 그 뒤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가 제일 궁금해집니다. 재미 삼아 몇 가지 추측을 해볼 수 있을 듯합니다. 먼저, 후회만하고 그냥 주어진 대로 살아간다. 둘째, 그 후회와 회한이 너무도 깊어 아직 문둥병에서 낫지 않은 카림에게로 가서 같이 산다. 셋째, 농부로서 일하며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해 계속 정진한다. 넷째,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음을 알고 모든 종교행위와 더불어 신에 대한 믿음도 저버린다. 독자 분들은 알리의 성품으로 미뤄 과연 어떤 행동을 취했을지 한번 뽑아보시지요.

정답은 없겠습니다만, 이야기를 통해 볼 때 알리는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대신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삶을 살 것 같습니다. 이런 판단을 하게 된 데는 알리가 보여준 모습, 특히 3개월 동안 기도 끝에 문둥병에서 치유를 받고 가족과 마을로 돌아왔다면, 아마도 저를 포함해 일반인들은 ‘감사의 기도’를 드린 뒤에 예전의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할 것 같습니다.

가장 절박하고 신실하게 빌었던 것이 문둥병이라는 천형(天刑)에서 나아 ‘원래 자신의 삶으로의 회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로 생각되어지니 말이지요. 그런데도 알리는 끊임없이 ‘의심’(doubt)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에 대해 알리에게서 한 수 배워야 한다고 생각이 되는데, 독자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그의 의심이야말로 하느님을 꿈속에서 다시 만나 제법 긴 대화를 할 수 있게 만든 지성감천(至誠感天)의 근본적인 자산이요 자세라는 생각이 듭니다. ‘무조건 믿어라’는 말도 일리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게 믿기 위해서는 끝없이 솟아나는 내면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 없이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지는 것이지요.

앞서 말했지만, 아무런 질문이나 의심 없이 치유된 뒤에 단순히 그의 자리로 돌아갔다면 세 친구에 대한 ‘믿음’과 관련해 하느님과 그런 대화를 하지 못했겠지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면에서 솟구치는 여러 물음도 하느님에게 이미 마음이 가있지 않다면 과연 생겨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의심과 물음의 과정은 이미 하느님과 대화를 시작하는 첫 단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신앙의 성숙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조건 믿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알리처럼 근본적인 것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이 어쩌면 진실한 신앙인이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정직한 행동이 아닐까요?

오늘은 알리가 문둥병자가 아닌 것을 후회했지만 그의 ‘물음’의 정신이 살아 있는 한, 일상에서 부딪히는 모든 순간에 대해 그 ‘의심’을 버리지 않는 한, 그가 그토록 그리는 하느님과의 일치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쩌면 하느님은 우리가 하느님을 생각하는 그 순간에, 그 깊이만큼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을까 생각하며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늦가을의 정취가 물씬 느껴지는 가을 끝에서 뵙겠습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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