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째려보기 – 가톨릭 문화와 여성의 활동

신영숙

일제 시기 천주교는 항일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못했으나, 산업화, 도시화라는 근대 물질문명에 시달리는 당시 사회에 적절한 제어를 할 수 있는 문화적 장치로서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교회는 언론, 출판문화와 문학, 미술, 음악(다음에 다룰 것임) 등 다양한 서구의 예술이나 문화를 수용하여 한국의 근대 문화 창조와 발전에 일정하게 기여하였다.

언론 ․ 출판 문화의 성과

일제 시기 교회는 언론, 출판 활동을 통한 선교 사업에 주력하였다. 선교를 위한 교리문답뿐 아니라 의료상식과 위생, 법률 등에 관한 지식을 전달함으로써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힘썼다. 초대 조선교구장 뮈텔이 43년간 한국 교회 발전에 기여한 것도 언론, 출판 사업이었다. 그는 자신의 일기 또는 보고서뿐 아니라, 조선의 역사를 번역, 간행하고 출판물을 통한 선교 활동을 적극 권장하였다. 1907년 『텬주셩과공과』를 비롯하여 1910년 『사사 四史성경』신약성서(한기근신부 외), 1922년 4월 『종도행전』(사도행전, 한기근신부 번역)의 간행 등이 이어졌다.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00년을 기념하여 경성구청년회연합회에서는 『조선천주공교회 약사』도 발간하였다.

한편 한국 최초의 신문인 1883년「한성순보」와 1886년「독립신문」에 이어 천주교 기관지로 1906년 10월 창간된 순한글 주간지「경향신문」과 그 보록「보감(寶鑑)」은 종교 단체로는 가장 먼저 낸 것으로 의미가 있다. 1910년 12월 220호로 폐간된「경향신문」은 일반 시사지처럼 배일사상과 조선인의 자각을 위해 한글전용으로 발간되었으나 창간 4년 2개월 만에 폐간되었다.

드망즈(Florian Demange, 安世華)신부가 발행한 「보감」은 교리와 교회사, 그리고 사회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교회 잡지의 성격을 지녔다. 창간사에 ‘참 개화를 한 나라는 강하다. 참 개화는 지식에서 이룩된다. 사람이 지식을 얻으면 강해지고 모든 사람이 지식을 얻으면 그 나라가 강해진다. 그러므로 모든 국민이 요긴한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당시 사회가 추구한 애국, 계몽적 성격을 강하게 내비쳤다.

또한 국판 24면으로 격주 발행한 󰡔경향잡지󰡕는 1911년 1월 보감의 제호를 변경한 것으로 이전의 애국 계몽적 성격보다는 교리를 더 강조하였다. 1912년 6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발행한 「예수성심의 타벨라」는 1937년 폐간되기까지 교회지도자들을 위한 이론서 역할을 하였다.

현 「가톨릭신문」의 전신인「천주교회보」는 1924년에 발족한 대구대목구의 청년연합회에 의해 1927년 4월에 창간되었는데, 1931년 7월 드망즈 주교가 대구교구의 기관지로 인정하고, 천주교회보사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 7월 서울교구의 천주교청년연합회는 월간 「별」보를 창간하였으나 1933년 3월 전국 5개 교구 주교회의에서 자진 폐간을 결정하였다. 교구를 초월한 통일적 가톨릭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그 해 6월 다시『가톨릭청년』을 창간하였다. 신앙과 문화를 담았다고 평가받는 『가톨릭청년』은 1936년 12월 통권 43호로 자진 폐간하였다가 1947년 4월에 복간되었다. 그밖에도 1937년 1월 평양교구에서 발행한『가톨릭조선』, 1936년 2월 베네딕도회의 연길지목구 만주 용정에서 발간한 『가톨릭소년』도 있다.

특히 1930년대 베네딕도회는 『미사규식』의 간행과 덕원수도원에서 수사와 수녀들을 위한『미사통상문』(1932), 『미사경문』(1933)의 번역과 등사판을 발간하여 신자들의 미사 참례를 적극적으로 끌어냈고 전례생활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원산교구에서는 성가집을 인쇄하여 『가톨릭 성가』(1938)를 발행하였고 성사안내서, 성무일도서, 교리서, 신심서, 교리 교재 등을 발간함으로써 천주교의 전례운동과 성서 보급에 앞장섰다. 그밖에도 교리문답개정 5교구위원회가 편찬한 『천주교 요리 문답』(1934)은 한글 용어로, 교리 교육의 대중화, 보편화의 필수서가 되었다. 그러나 1938년 『가톨릭조선』, 1940년 『가톨릭소년』이 폐간되고, 『경향잡지』는 1944년부터 격월간으로 발행되다 1945년 5월 폐간되었다. 이와 같은 교회의 언론과 출판 사업은 여성들에게도 전달되어, 성서공부뿐만 아니라 성가 합창 등 교회문화의 참여자가 되게 하였다.

성모신심운동과 여성평신도의 문화 활동

천주교 여성 문화 활동의 또 다른 맥은 성모신심운동과 교회의 각종행사 참여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모를 흠숭하고 따르는 성모신심운동은 병인박해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성장하였다. 1906년 한지에 인쇄된 한글중간본『성모성월』기도문이 1922년에는 양지에 인쇄, 발행되어 널리 이용되었고, 1914년에는 『매괴성월』, 로사리오 성월을 위한 신심서들이 나왔다. 성모성심 단체로는 각 본당에 성모성심회, 매괴회, 성의회, 성가회 등 이 만들어졌다. 또한 가톨릭청년회(남녀별) 명도회, 부인회, 친우회, 신우회, 가톨릭협회, 예수성심회 등의 단체들은 단순히 회원들의 신심 고양이나 친목을 넘어 가톨릭 여성문화에 기여하였다.

여성단체들은 1931년 9월 조선교구설정 100주년 기념행사뿐 아니라 한국교회 150주년 기념행사 등 크고 작은 교회 행사에 봉사하고 참여함으로써 서구 문화를 접하고 수용해갔다. 평양에서 시행된 1935년 10월 축하행사는 제등행렬을 비롯하여 운동회, 사료전시회, 종교대강연회, 교리경시대회 등 다양하게 펼쳐졌다.

이 같은 여성단체들은 기본적으로는 교육을 통한 문자 해독 외에도 수예, 재봉, 자수 등 작품 전시, 운동회 등을 통한 심신의 단련, 그리고 다양한 교회 행사를 위한 모금 활동 등으로 실천적이고도 광범위한 문화 활동을 전개하였다. 여성들이 단체를 조직하고 활동하는 것 자체가 교회문화가 되었을 뿐 아니라 청년단체, 또는 지역 간의 문화 교류도 촉진함으로써 교회여성들에게 더 큰 신앙과 근대적 문화 의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여성단체들의 자발적인 봉사와 문화 활동은 이후 한국교회에 여성평신도들의 비중을 점차 높이는 터전이 되어 갔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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