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로 떠나는 아시아 여행 – 진리를 향해 가는 스승과 제자처럼

황경훈(아시아 평화 연대 센터장

진리를 향해 가는 스승과 제자처럼

세상에는 정말 많은 인종과 또 그만큼의 다양한 언어와 삶의 방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상식’으로 통하는 사고방식이 시공간적으로 조금 낯선 곳에서는 ‘충격’으로 다가올 수도 있겠고 그 반대도 가능할 듯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살아가는 삶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반드시 어떤 ‘관계’를 전제로, 그 안에서 끝없이 명멸해 가면서 제각기 다른 소리와 빛깔로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수놓습니다. 이렇게 보자면 그 관계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삶과 문화는 다르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는 공감하게 되고 또 그만큼의 소통도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아주 고약한 관계였다가 나중에는 은인지간이 되는 경우도 있고, 절친한 관계가 원수로 뒤바뀌는 경우도 우리 삶에서 흔하게 마주치게 됩니다. 오늘 들려드릴 이야기도 가까운 이웃나라 일본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것으로, 원수였던 관계가 사제지간이 된다는 내용을 담은 따듯한 이야기입니다. 역사적으로나 심정적으로나 ‘가깝고도 먼 나라’인 일본으로 잠깐 날아가서 무슨 사연인지 들어보고 우리의 얘기를 더 해나가 보도록 하지요.

스승이 된 젠까이

사무라이의 아들 젠까이는 에도로 가서 높은 관리의 심복이 되었는데, 그만 그 상관의 부인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그 관계는 들통이 나고 말았고 이를 안 상관이 그를 공격하자 이를 막다가 젠까이는 그만 그를 죽이고 만다. 일이 돌이킬 수 없이 커지자 젠까이는 부인을 데리고 도망을 쳤다.

나중에 젠까이와 부인은 둘 다 도둑이 되었는데, 부인이 너무 탐욕스러워 젠까이는 점점 그녀가 혐오스러워졌다. 마침내 그는 그녀 곁을 떠나 부젠현이라는 먼 곳까지 여행을 하여 그곳에서 방랑하는 탁발승이 되었다.

젠까이는 과거를 속죄하기 위해 남은 생애 동안 선행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다가 죽었다는 위험한 벼랑길에 대해 얘기를 듣고는 산을 관통해 터널을 뚫자고 마음먹었다.

젠까이는 낮에는 음식을 구걸해 먹고 밤에 터널 파는 일을 했다. 삼십년 동안 파 낸 결과 높이가 6미터에 넓이가 9미터, 길이가 628미터나 되는 터널을 뚫었다. 터널 파는 일은 2년이 더 지나서야 끝났다. 젠까이가 죽인 그 고관의 아들은 자라서 노련한 칼잡이가 됐는데, 젠까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내고는 아버지의 복수를 갚기 위해 길을 떠난다.

우여곡절 끝에 고관의 아들은 젠까이를 만났고 그 자리에서 젠까이는 그에게 말했다. “기꺼이 죽어 주겠소. 하지만 이 일을 끝내게 해주시오. 일이 끝나면 그때 죽여주시오.”

아들은 기다리기로 했다. 몇 달이 지났는데도 젠까이는 계속 터널을 파나갔다. 아들은 하는 일 없이 기다리기가 점점 무료해지고 참을 수 없이 지겨워지자 젠까이의 터널 파는 일을 돕기 시작했다. 이렇게 그를 도운지 일 년이 지나자, 관리의 아들은 젠까이의 강한 의지와 그의 성품에 감화된다. 마침내 터널이 완성됐고 사람들은 터널을 통해 안전하게 길을 다닐 수 있게 됐다.

“이제 내 머리를 치시오. 내 일은 끝났소.” 젠까이가 말했다. 그러자 관리의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어찌 제가 제 스승의 머리를 칠 수 있단 말입니까?”

– 『전통 선이야기』에서 정리 수록

 

우리나라 고려쯤에 해당하는 일본 막부시대에 활약한 무사계급인 사무라이는 약 700여년간 활개치고 다녔다고 합니다. 시간이 길기도 하지만 이 시기의 영향이 커서인지 ‘사무라이 정신’이 아직도 일본에 강하게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칼로 흥한자 칼로 망한다’는 동서고금의 금언이 있는데도, 한국도 그렇고 일본도 무인정권이 나라를 오랫동안 다스리고 그 뒤로도 군인들이 전쟁을 도발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는 등 그야말로 총칼을 잡은 이들의 세상에서 민초들은 목숨부지하며 어렵게 생존해 온 고통의 역사인 것이지요.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젠까이도 칼쓰는 사무라이라고 소개되고 있지요. 하지만 사무라이도 따듯한 피가 흐르는 사람인지라 그에게도 사랑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연분홍 사랑의 바람이 그가 충성을 다해 모시는 상관의 아내에게로 불어, 이른바 불륜의 관계를 맺게 되고 비극이 시작됩니다. 이어 드라마는 돌발적으로 상관을 죽이고 끝내는 탁발승이 되어 세상을 떠돌다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 뛰어 든다는, 그야말로 파란만장의 극적 순간들로 숨 가쁘게 이어집니다.

이야기는 젠까이가 속죄하는 마음으로 많은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는 위험한 벼랑길에 커다란 터널을 뚫는 일을 삼십년 동안 하는 것으로 속죄를 대신했다고 전합니다. 젠까이가 죽인 자기 상관의 아들이 칼잡이가 되어 나타나지만, 젠까이는 침착하게 일을 마칠 때까지 죽을 말미를 달라고 사정하고 마침내 해야 할 일을 다 마치자 머리를 내밀고 죽여 달라고 하는 클라이맥스로 이야기가 치닫지요. 그런데 정작 관리의 아들은 1년 동안 젠까이와 일하면서 그를 스승으로 모시기에 이르고, ‘스승을 어떻게 죽일 수 있느냐?’는 극적 반전이 일어나 복수는 춘삼월 봄눈 녹듯 스르르 사라지고 맙니다. 그야말로 원수관계가 사제지간이 되는 순간이지요. 여기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젠까이의 회심이 거짓이 아니라 원수를 갚으려는 이를 감동케 할 정도로 깊은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하긴 말이 30년이지 웬만한 사람이면 ‘이 정도면 됐겠지. 그래, 충분해….’하면서 그만둬도 벌써 그만둘 시기를 이미 훌쩍 넘겨버린 데서 이미 그의 속죄의 깊이와 진실성을 느낄 수가 있겠지요. 이런 아름다운 장면을 뒤집어 보면 어떨까요? 그러니까 젠까이가 일을 마치는데 1년이 아니라 10년이 더 걸리고 고관의 아들이 10년 동안 같이 일하는 것으로 상상해본다면 어떨까요? ‘10년을 같이 일하기나 했을까?’하는 점부터 의심이 들기 시작합니다. 복수는 포기하더라도 더 이상 기다리는 것은 시간낭비라며 그냥 떠나 버릴 수도 있을 것 같고 말이지요. 그렇게 상황이 전개된다면 스승과 제자 관계는 언감생심이겠지요.

이야기를 확 틀어서 인류의 큰 스승 예수님에게로 돌려봅니다. 예수님이 유다 땅이 아니라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복음에서처럼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달라고 청하는 제자에게 어떻게 답하셨을까요? 예나 제나 시공을 초월해 예수님은 예수님이어서 ‘죽은 자의 장례는 죽은 이들에게 맡기라’고 하셨다면, 이번에는 그 말은 듣고 제자는 어떻게 처신했을까요? 아니 그 제자가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대응하시겠습니까?

반면 동양의 성인인 공자님은 ‘효도와 우애는 인을 이룩하는 근본(孝弟也者基爲仁之本與)’이라고 가르쳐 자신을 따르던 제자 중 13명이 스승을 떠나 고향의 부모를 부양하였다고 합니다. 이것만을 평면적으로 놓고 본다면 유교의 세례를 흠뻑 받은 한국인들에게 예수님보다는 공자님이 더 끌리지 않을까요? 물론 여기서 핵심은 두 성인을 비교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공자님이 취한 태도가 여기서는 적절하고 멋있게 보이지만, 전하는 바에 따르면 후에 제자들 앞에서 고통스럽고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논어>에도 나오지만 공자님은 자신의 사상을 알아주어 이를 이상적인 정치체제로 실현할 수 있도록 힘이 될 만한 세도가나 왕을 찾아 중국을 13년이나 떠돌게 됩니다. 그 기간의 절반인 7년이 지날 즈음, 공자나 제자들이나 모두 지치고 숙식도 제대로 영위하지 못할 상황에 처하자 그의 애제자가 공자 앞에서 대놓고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하고 일부는 떠나버리기까지 합니다. 그 13년이라는 기간 동안 공자님이 죽을고비도 많이 당한다고 사마천의 <사기>가 기록으로 전하고 있지만,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아마도 자신이 가르치고 함께 이상국가를 실현할 준비가 됐다고 믿었던 제자들이 자신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고 등을 돌리는 일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처럼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그 길만을 향해서 돌진하든, 공자님처럼 현세의 올바른 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가르침을 펼치든, 스승과 제자는 진리를 향해 나아간다는 점에서 매우 고귀하지만 그만큼 고통스럽고 힘든 길을 가야 하는 숙명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014년 첫 달을 맞는 한국 사회도 어쩌면 예수님이 생존했던 당시나 공자님의 춘추전국시대, 곧 총칼 든 자들이 강압으로 통치하던 시대의 혼란상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새해부터 너무 무거운 주제로 이야기가 흘러가버린 듯 보이기도 합니다만, 시절이 하 수상하여 진리를 향해 간단없이 나아가는 사제지간이 어떤 때보다도 필요한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단단히 마음먹고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다짐이나 각오로 새해를 시작하시면 어떨까 제안하면서 인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추위가 가시고 봄기운이 조금씩 느껴지는 2월에 뵙겠습니다.

황경훈

온고지신(溫故知新)이 복잡한 현실을 살아가는 지혜로운 길이라고 생각하고 부지런히 옛것과 새것을 공부하는데 열정을 쏟고 있다. 우리신학연구소의 창립 때부터 현재까지 평신도 신학을 생각하며, 아시아 NGO 청년들과 함께 희망을 만들며 살고자 애쓴다. 현재 우리신학연구소 아시아평화연대센터 센터장으로 일하고 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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