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로 떠나는 아시아 여행 – 황소의 자만과 쥐의 믿음

황경훈(아시아 평화 연대 센터장)

올해는 12간지 중 달리는 모습이 일품인 말의 해입니다. 신년 기분을 살려서 한번 순서를 헤아려 보면, 12간지를 상징하는 동물은 자(쥐), 축(소), 인(호랑이), 묘(토끼), 진(용), 사(뱀), 오(말), 미(양), 신(원숭이), 유(닭), 술(개), 해(돼지)가 되지요. 그런데 가만 보면 맏이라고 할 수 있는 첫 자리를 쥐에게 내주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쥐가 첫 자리를 차지한 까닭을 설명해 주는 한 설에 따르면, 석가가 고양이를 첫 자리에 앉히려 했는데, 쥐가 거짓말로 속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군요. 뒤늦게 이를 안 고양이는 지금까지도 쥐를 쫓아다닌다고 하네요.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쥐입니다만 바로 그 뒤에 오는 소와 견주어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도 나올 법합니다. 이와 관련해 중국에서 전하는 민담이 있다고 하니, 오늘은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 할 수 있는 공자와 노자의 나라 중국으로 떠나 보겠습니다.

12간지 중 쥐가 첫째가 된 까닭

중국의 간지 중 취가 첫째고 황소가 둘째인 까닭이 중국 민담에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 내력은 이렇다.

하늘의 12궁을 맡을 열두 마리 동물을 고를 책임을 맡고 있던 신은 이미, 용, 뱀, 호랑이, 토끼를 배치했다. 그때 쥐와 황소가 누가 더 큰가 말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황소가 쥐의 주장을 듣고 난 뒤 뿔을 흔들며 소리쳤다. “나, 황소가 크고 엄청나게 기운 센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감히 한 줌밖에 안 되는 쥐가 나와 겨루겠다고? 말도 안 돼.”

하지만 쥐는 황소에게 지지 않았다. 황소는 반은 경멸하듯, 반은 겁을 주며 쥐에게 항복받으려 했다. 그러나 쥐는 지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나름대로의 덩치와 능력을 갖고 있다. 그것이 판단기준이 될 수는 없다. 다수의 판단에 맡겨야 할 것이다. 내가 보잘 것 없는 작은 쥐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나는 당장 너와 겨루어 보겠다.”

쥐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신은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물론 쥐는 황소만큼 크지 않다. 그러나 쥐가 그것을 믿으려 하지 않으니 모두의 결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공정한 방법이다. 너희 둘은 이점을 심사숙고한 후 밖에 나가 사람들의 판단을 받고 오너라.“

쥐는 재빨리 일에 착수해 자기 몸을 수일 사이에 두 배로 불려 놓았다. 황소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미 쥐보다는 1백배 이상 큰 몸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소와 쥐는 마을로 들어갔다. “저것 좀 봐! 저렇게 큰 쥐는 난생 처음 보는걸! 엄청나게 크구만.” 집을 떠나서 집에 돌아오기까지 그들이 사방에서 들은 것은 한결같이 쥐가 크다는 말뿐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황소에겐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황소는 매일같이 보았지만 그처럼 큰 쥐는 전에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판단을 내렸다. 쥐가 더 크다고.

둔한 황소는 쥐의 꾀에 넘어가고 말았다. 하지만 황소는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단지 사람들의 눈이 멀었다고 생각하였다. 내기에서 지고 위엄이 실추된 황소는 결국 첫째 자리를 쥐에게 양보해야만 했다. 그때로부터 쥐는 12간지의 첫 번째 동물이 되었다.

– 송천성, 『아시아 이야기 신학』

별 이해관계도 없을 것 같은 쥐와 황소의 다툼으로, 그것도 좀 어이가 없게 이 둘 가운데 ‘누가 더 큰가’를 놓고 하는 말다툼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여기서 ‘크다’는 의미는 자질이나 성격 같은 내면적인 것보다는 이야기에 나오듯 외형적인 크기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결국 힘이 누가 세냐의 문제도 되는 듯합니다. 이런 점에서 황소가 큰 소리를 치는 게 당연해 보이기도 하는데, 그래서인지 아예 쥐와 비교하거나 겨루는 것 자체를 거부하면서 쥐에게 겁을 줘 첫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한편 쥐는 자신이 덩치가 작다고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판단기준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각자는 나름대로의 ‘능력’이 있기에 누가 큰가는 다수의 판단에 따라야 한다며 한치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판관 역할을 하는 신은 쥐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며 그 판단을 당사자들이 아니라 다수에게 맡기겠다고 판결을 내립니다.

인간 세계로 치자면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벌이는 권력투쟁이나 선거의 형태를 통해 피선거인들의 지지를 얻으려 하는 ‘인정투쟁’이 시작된 것이지요. 힘으로는 당해낼 재간이 없음을 이미 잘 알고 있던 쥐는 누가 더 크고 더 센가를 다수의 결정에 맡기자는 데에 신의 동의를 받아내고, 다음 단계로 착착 계획을 진행시켜 나갑니다. 재주도 좋아서 금방 몸을 두 배로 불려 좀처럼 볼 수 없는 ‘몬스터 쥐’로 둔갑하는 데 성공하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지요. 반면 백 배 이상이나 몸집이 큰 황소는 쥐가 두 배로 커지든 세 배로 커지든 전혀 개의치 않았지요. 그래봐야 발목에도 차지 않는 그야말로 그냥 ‘쥐’에 불과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는 황소의 자만이자 결정적인 실수였지요. 결국 다수는 몸집을 두 배로 키운 쥐가 황소보다 더 ‘크다’고 판단을 내립니다. 몸집에서는 여전히 황소가 크지만 인정투쟁에서 다수는 황소가 아니라 쥐의 손을 들어준 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쥐의 승리에서 끝나지 않고 황소가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눈이 멀었다.’고 치부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황소에게는 자신의 크기와 힘은 절대적인 것으로 감히 쥐 같은 존재가 넘볼 수 없는 부동의 진리 같은 것이었고, 그것 외에 다른 생각은 할 수도 또 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지요. 종교적인 눈으로 보자면, 자신의 권력을 신의 자리에 올려놓음으로써 초월적 세계를 스스로 차단해버리고 맘몬을 숭배하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대목에서 쥐가 누가 더 큰가를 ‘다수’에게 묻자고 한 대목을 곱씹어 보면 좋겠습니다. 쥐가 짜놓은 계획 중 하나였다고 하더라도 그 다수 혹은 대중들을 믿지 않았다면 과연 이런 제안을 선뜻 할 수 있었을까요? 흔히 이들은 가르쳐야 할 우매한 무리, 계몽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고 약삭빠른 쥐가 그것을 모를 리는 없었을 텐데, 이런 결정은 쥐에 처지에서 보자면 매우 아이러니하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과연 쥐의 그 ‘믿음’은 무엇일까요? 도대체 무엇을 믿은 것일까요? 다수는 무지몽매하여 눈이 멀었다고 본 황소와 달리, 약자이며 다수의 하나로 살아온 쥐는 다수란 하나하나가 만들어 내는 ‘관계’의 존재임을 익히 몸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에고로 자신을 가득 채우고 그것을 절대화하는 대신 자신을 비우고 나누는 삶 자체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그런 제안을 선뜻 내놓을 수 있었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대체로 부자일수록 나누는 데 인색하고 배고프고 가난한 이들이 나누는데 주저함이 없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와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분명 쉬운 문제는 아니겠습니다만 돈이든 권력이나 명예든 지금 우리 마음에 가득 찬 것이 무엇이고, 그것에서 돌아설 수 있는지, 미련 없이 비울 수 있는지 깊이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마음이 거기까지 내려가 닿는다면 이미 여러분들은 종교의 영역에 들어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이야기를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3월에 뵙겠습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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