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Cool 사제 전별금 간소화, 어떻게 생각하세요? – 김영수

 

김영수 : 한국 가톨릭 문화연구원 학술이사

사제 예물, 자기 구원을 위한 공덕

경계선상의 문제들

세상에는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 살아가는데 분명한 것이 좋기는 하겠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분명한 것보다는 모호한 상태에 있는 것이 더 많다. 삶의 관용으로 볼 때 이런 경우 사리를 따져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보다는 그냥 넘어가는 것이 살아가는데 훨씬 편리하다. 물론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상적인 사안에 사회적인 의미, 윤리적인 입장 등이 개입되고 원칙을 따지면 문제는 간단하게 넘어갈 수 없는 복잡한 사안으로 커지게 마련이다. 이러한 문제는 그것이 따지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기도 그런, 경계선상에 위치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호에서 다루는 사제 전별금 및 축일 등의 축하금 문제가 바로 전형적인 사안이다. 처음 원고청탁 전화를 받은 것은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주차시킬 때였다. 내용을 듣고 보니 참 글쓰기가 불편한 사항으로 평소 내 생각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사안은 공식적으로 언급할 사항은 아니고, 있는 그대로 보아주면 된다는 요지의 말을 했는데도 그 내용 그대로를 원고로 작성해달라고 하니 좀 답답하기는 하였다. 일단 지하 주차장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수락을 하였으나 내내 마음이 불편하였다. 요즈음 개인적 사정으로 글쓰기에 대한 부담도 있었거니와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긍정이든 부정이든 간에 글로 제시된다는 것이 경계선상의 문제를 밖으로 공론화하는데 기여하는 일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사제들의 쇄신안, 그리고 공론화의 불편함

지난 해 11월 마산교구 사제 총회에서 사제의 영명축일과 은경축 간소화, 사제 부임 관행 등에 대한 쇄신 권고안을 내놓았다. 이어 ‘사제 인사 이동시 환송과 환영에 대한 지침’이 내려왔다고 한다. 덧붙이는 말로 대다수의 사제들의 반응이 긍정적이라고들 전하고 있다. 이러한 마산교구의 행보에 대해 각 교회언론은 긍정적으로 보도하며(지금 여기(12/3), 평화신문(1/13)) 급기야는 2012년 한국가톨릭 10대 뉴스로까지 선정되었다.

권고안은 참 바람직한 일이다. 사제들 스스로 쇄신하겠다는 데에 박수를 치고 환영할 일임은 분명하다. 그렇지 않아도 신부님만의 축일이 아닌데 왜 사제에게만 축하를 해야 하냐는 볼멘소리까지 나오는 상황이니 말이다.(지금 여기 2013/1/21)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참으로 바람직한 스스로의 쇄신안에 기대어 이를 확대 재생산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되니 말이다. 명분은 그럴 듯하다. ‘교회내 이슈에 대한 서로 다른 의견을 펼침으로써 함께 고민해간다는 입장’인데 이것이 이슈가 될 수 있는지도, 또 ‘독자 스스로 답을 찾아갈 수 있도록 안내’해 줄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오히려 이를 빌미로 권위적인 사제나 교회를 비판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일반 평신도를 대변하였다는 것으로 얄팍한 위안을 삼으려 하는 의도가 아닌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사제의 영명축일과 은경축 간소화에 대한 입장은 사제들 스스로의 쇄신안이니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데, 마치 커다란 문제라도 있는 듯 호들갑떠는 것은 보기 편한 모습은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밀과 가라지

사실, 일부 사제의 은경축이나 축일 예물 등이 과하게 보이는 부분이 없지는 않다. 아니 사제의 생활 자체가 상식으로 보아 지나친 부분이 없지는 않았다. 그로 인해 부담을 느끼는 신자들도 많다. 사제를 향한 일부 신자들의 과도한 충성이 비판받기도 하였고, 한편으로는 가난하게 살아야 할 사제가 그렇지 못하니 속상하기도 할 것이고 그런 사제들을 위한, 생활 속의 작은 희생이 힘겹게 느껴지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점에서 “교회와 하느님을 위해 일생을 다 바쳤다고 말하는 것을 믿지만, 그 대가가 돈과 고급 승용차로 채워질 때는 슬픔을 느낀다. 그것은 스스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대가를 지워버리는 것”이며, “사제들은 순명과 정결의 서약을 하였을 뿐 가난의 서약은 하지 않았다는 말이 화려한 삶을 살아도 괜찮다는 것은 아니다. 사제가 가난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다.”라고 한 이제민 신부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권고안을 보면 이는 사제단 스스로 쇄신의 길을 걷고자하는 의지의 표현이라 반갑기 그지없다.

한편 권고안을 역으로 보면 많은 사제가 권고를 받을 정도로 살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사제들이 그렇다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리고 사제인 이상 은경축이나 축일 예물을 받는 사제들의 마음도 좋기만 한 것도 아닐 것이다. 사제들의 윤리적 기준 자체가 높음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 교회에서는 드러나지 않을 뿐, 참으로 가난하게 사는 사제들이 더 많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 신앙이 무엇인가? 믿는 것 아닌가? 이러한 문제가 공론화되면 참으로 가난하게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제들이 불편해지는 것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마태13,29-30)처럼 이는 사제 스스로 판단해야 될 문제로 보인다.

가톨릭과 한국문화

갑자기 ‘가톨릭과 한국문화’라고 하니 뜬금없게 느껴지기는 한다. 그러나 사제의 영명축일 예물이나 전별금, 부임 관행 등은 분명히 문화의 영역에 영향을 받는 요소이다. 직장, 가족 등 사회의 모든 통과제의가 그렇기 때문이다. 그것이 교회에서도 수용되었다면 문화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가톨릭이 한국화되어 간다는 증거일 것이다.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용 모두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 안에는 가톨릭의 한국화의 부정적인 요소로 간주되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생활적인 부분에서는 적어도 경제적 부담 등 몇 가지 어려움은 있다.

그러나 이를 꼭 부정적인 측면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문화라는 것이 부정, 긍정을 넘어 전승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사제의 예물과 관련해서는 상호 부조, 섬김과 나눔의 전통이 작용한다. 특히 섬김에 대해서는, 일찍이 병든 부모를 위해 자기 살점을 베어 봉양하였다는 향덕(向德)과 성각(聖覺) 설화(삼국사기) 등 수많은 효행 설화가 있었고, 눈먼 아비를 위해 몸을 판 심청전이 여전히 전승된다는 점을 유의깊게 보아야 할 것이다. 부모 자식의 관계에서 부모를 위해 희생하는 자식의 불편함과 또 그것을 받아들이는 부모의 편치 않음이 섬김과 나눔의 진리로 수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맙고, 섭섭하여 올리는 예물이라면, 어느 정도의 희생이 있다고 하더라도 감수해야 한다. 결혼이나 장례의 부조금이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다고 해서 근절되었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수천 년 이어온 우리의 민속이 현대화된 모습인데 그것이 어떻게 근절될 수 있겠는가.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근절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한편 불교의 탁발(托鉢)을 생각하게 된다. 하루 한 끼 걸식을 통해 아집(我執)과 아만(我慢)을 없애고, 무욕과 무소유를 실천하고자 하는 수행법, 이는 보시를 주는 이의 공덕을 쌓게 해주는 역할도 한다고 하니 사제에게 주는 예물을 공론화하여 비판하기 보다는 자기 구원을 위한 공덕을 쌓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때마침 사제들 스스로 쇄신하겠다니 그냥 고마울 따름이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 201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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