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속으로 떠나는 아시아 여행 – 멧돼지와 영

 

황경훈(아시아 평화 연대 센터장)

한국으로 시집 온 아시아 여인네들이 이제 제법 눈에 많이 띕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제 아이 친구는 아버지가 한국인이고 어머니는 필리핀인이어서 피부색이 한국인에 비해서 검은편이고 말도 좀 어눌하게 합니다. 며칠 전에 집으로 걸려온 전화 한통을 받았는데 어떤 여자가 대뜸 제 처가 집에 있냐고 반말로 묻지 뭡니까. ‘이 여자가 언제 봤다고 반말인가?’ 슬그머니 기분이 안 좋아 지려는데, 좀 어눌한 어투며 발음이며… 그 필리핀에서 시집 온 여자가 아닐까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전화를 바꿔주자 한참을 얘기하더군요.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대화 내용으로 미뤄봐서 한국 생활의 어려움, 특히 아이 양육과 남편과의 관계, 시어머니에게 받는 스트레스 등등 할 얘기가 많아서 전화 한통으로는 부족한 듯했습니다.

이런 제 경험이 이 꼭지를 시작하게 된 배경은 아니지만, 아주 관련이 없다고도 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이렇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앞으로 달마다 찾아가게 될 독자님들에게 들려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아시아 여러 나라의 종교와 문화,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아시아에는 세계 인구의 2/3가 살고 있고, 인종도 아주 다양해서 그 다양한 만큼의 삶의 빛깔과 무늬와 냄새가 있는데, 그것을 직접 체험하지 않고는 이해하기는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이 됩니다. 시공간의 한계로 직접 체험은 어려우니 아시아 여러 나라들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민담이나 전설 또는 직접 체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다른 문화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해해보자는, 그러니까 ‘이야기를 통한 여행’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부연하면, 그 필리핀 여인처럼 문화와 삶이 매우 다른 나라에서 살던 사람이 어떻게 자기와는 다른 문화를 이해할까 하는 그러한 ‘다름’을 함께 생각해 보는 제안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 다름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영감이나 지혜, 거기에 혹시 재미까지 더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습니다.

이번호에는 파푸아 뉴기니라고 인도네시아 동쪽 오지의 나라에서 선교생활을 하는 한 메리놀 외방전교회 사제가 겪으신 체험담을 들려 드리지요. 옛날 어른들이 들려주던 옛날이야기 같이 구수하고 재미있으면 좋겠다는 게 제 바람인데 그리 될지는 잘 모르겠네요. 자, 이정도면 준비는 된 것 같으니 슬슬 여행을 떠나 보실까요?

멧돼지와 영(靈)

파푸아 뉴기니의 아스마트 부족은 매우 현실적인 사람들이어서 심지어는 이들이 생각하는 영(靈)의 세계에도 이런 현실적인 태도가 짙게 배어 있습니다. 수 만 가지의 영들은 모습과 크기가 제각각이고 위아래 질서도 엄격하답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 영들이 아스마트 부족이 언제 무엇을 해야 할 지도 결정한다고 하니 이들의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구실을 한다는 거지요. 그러니 이 부족이 영들을 아주 가깝게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한번은 제가 무무구라는 마을에서 일종의 잔치 비슷하게 열리는 남자 성인식에 참가하기 위해 강 상류 꼭대기에 있는 성인식 장소까지 간 적이 있습니다. 다양한 상징물과 예식으로 진행되는 이 성스러운 행사는 여러 달 지속되기도 하지요. 영들이 이 성인식에서도 주요한 역할을 하는 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참석했던 예식에서는 사냥꾼들이 영들에게 이들이 앞으로 멧돼지 사냥에 성공할 수 있을지 답을 구합니다. 약 20cm 되는 직사각형의 납작한 나무판자를 만들고 그 한쪽 끝에 구멍을 뚫고 줄을 매달은 다음에, 그 위에 찰흙과 조개 가루를 개어 그림을 그렸어요. 그리고는 성인식 참가자들이 장작불 주위로 서둘러 모여 들었습니다. 옆에 있던 제 친구 멘자에게 지금 둥둥둥 울리고 있는 저 북소리가 뭘 의미하는 거냐고 물었어요. 멘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영들과 얘기하고 있어요. 영들의 목소리가 저 나무를 통해 말하는 거지요. 영들은 ‘돼지다’ 또는 ‘돼지가 아니다’를 말 할 거예요. 영들이 ‘돼지다’고 하면 우리 사냥은 성공할 거예요.”

어느덧 북소리가 멈추더니 성인식 참가자 한 명이 그의 머리 위에 있는 ‘영의 목소리’라고 불리는 그 나무판자를 격렬하게 빙빙 돌리자, 이내 이상한 으르렁 거리는 소리들이 몇 차례 났다가 사라지고는 했습니다.

“영이 뭐라고 하는 건가요?” 제가 묻자, “돼지가 아니래요.” 멘자가 대답했어요.

“아, 나쁜 운이구나. 그럼 사냥에 실패해서 이 잔치에서 돼지고기를 못 먹는다는 뜻이에요?” 다시 물으니, 멘자는 ‘영의 목소리’를 가져다 큰 칼로 다른 모양으로 만들면서 나를 보고 빙그레 웃기만 했어요.

이 예식을 보면서, 오래 전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께서 제가 시험에 통과하면 분홍 옷을 입혀 놓은 ‘프라하의 아기예수 상’이 곧바로 푸른 옷으로 바뀔 거라고 망설임 없이 말씀하시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렇게 보니 제게는 이 예식이 실제로 그리스도인이 영의 세계와 관련을 맺는 방식과 그리 큰 차이가 없어 보였습니다.

(출처: Once Upon a Time in Asia: Stories of Harmony and Peace, ed. J. Kroeger (Manila: Claretian Publications, 2006), pp.75-76)

이 이야기는 빈스 콜 (Vince Cole) 신부가 겪은 체험담인데, 짧지만 여러 가지 생각이 나게 합니다. 파푸아 뉴기니라는 나라도 그렇고 더욱이 아스마트라는 이름의 부족도 이역만리 한국에 있는 우리에게는 너무 멀게 느껴지지만, 흥미로운 건 미국 사제의 어머니와 아스마트 부족이 영을 대하는 태도가 비슷하다는 점입니다. 물론 콜 신부와 그 어머니가 미국 가톨릭 신자의 신심을 대변한다고는 볼 수 없겠지만, 적어도 콜 신부가 매우 다른 두 문화와 종교를 배경으로 살고 있는 이 사람들이 영을 대하는 태도가 비슷하다고 본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듯합니다. 가능하다면 그 이유를 한국 그리스도인의 처지에서 한번 ‘토착화’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우선, 아스마트 부족도 그렇고 콜 어머니도 그렇고 영과의 소통이 매우 긴밀하고 ‘인격적’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아스마트 부족은 영과 직접 ‘대화’하고 그에 따라 행동을 바꾸기도 할만큼 인간과의 관계가 긴밀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콜 신부 어머니의 경우에는 서로 말을 하고 듣는다거나 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영의 힘으로 옷이 바뀐다는 신념이 강하고, 이를 뒤집어 생각하면 그만큼 어머니와 영과의 내밀한 소통이 전제돼 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위의 아스마트 부족의 성인식 장면이나 그 어머니의 신앙 행위를 어떻게 보면 기복적이고 ‘미신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여기서는 미신을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믿느냐”라는 정의에 동의하는 것으로 하고 (동의 안하시는 분도 그냥 읽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러니까 미신이 아니라는 것으로 정리하고 영 얘기를 계속해나가지요.

제가 앞서 영과의 관계가 ‘인격적’이라고 한 말에 대해 더 생각해보도록 하지요.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서는 인간이 존엄한 까닭을 하느님의 모상(image of God)에서 그 근거를 찾습니다. 곧, 하느님의 이미지를 닮았기에 인간이 존엄하다는 뜻입니다. 거꾸로 보자면 하느님이 인간과 비슷한 형상이라는 말이고, 이런 까닭에 성화를 보면 대개 화가들은 하느님을 인간의 얼굴을 한 모습으로 그려 놓은 것을 종종 보게 되지요. 그 ‘모상’이나 ‘이미지’라는 말 때문에 하느님은 사람의 모습을 한 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따라서 ‘인격신’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와 같은 형상을 거의 자동적으로 떠올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그 인격이라는 말의 쓰임새가 더 넓어져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콜 신부의 어머니가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이나 아스마트 부족이 성인식을 열어 성인이 되는 이들을 축하해주고 공동체의 단합을 위해 잔치를 벌이는 행위, 곧 아들에 대한 사랑과 공동체에 대한 배려가 여기서는 ‘인격적’인 것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우리가 늘 생각하듯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개인뿐 아니라 모든 이들을 돌보시는 분이시니 말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생각할 가치가 충분히 있고, 좀 더 강조해 말하면 반드시 생각해야 하는 문제지만, 막상 판단을 하려면 큰 어려움으로 다가오는 문제로 이런 게 있을 듯합니다. 우리 옛날 조상들이 부뚜막에 가면 부뚜막 신령이 있고, 퇴주나 장독대, 바위, 오래된 나무… 등에 거하는 신령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다시 말해서 무교와 습합된 민간 신앙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아스마트 부족의 영도 비슷한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겠지요. 과거에는 가톨릭과 개신교 선교사들이 무교와 무교에서 섬기는 영을 거의 ‘미신’이라고 너무 일방적으로 매도하던 때도 있었지요.

하지만 삼위일체의 하느님이 우리가 고백하는 하느님이고 그 삼위에는 천(天) 지(地), 인(人), 곧 우리민족이 전통적으로 섬겨온 하늘로 얘기되는 모든 신령함과 온갖 우주와 땅을 포함하는 자연으로서의 지, 그리고 인간이 삼위일체의 하느님에 포함된다면, 우리 조상님들이 섬겼던 신령과 아스마트 부족의 영도 그 하느님의 품으로, 숨으로, 손길로 그 안에 포함되어야 맞는 말이 아닐까요? 거기서 티끌만한 작은 것이라도 소외된다면, 모든 피조물을 창조한 하느님, 삼위일체의 하느님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도 영 뭔가 개운치 않고 걸리는 게 있다면 왜 그럴까요? 저는 이야기꾼을 자임한 사람이므로 답은 독자님에게로 돌립니다. 다음 달에는 더 재미있고 유익한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 201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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