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로 떠나는 아시아 여행 – 공평무사한 하느님과 ‘편드는’ 예수님

  황경훈(아시아평화연대센터장)

공평무사한 하느님과 편드는예수님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한국에 오신다는 소식에 한동안 나라 안팎이 떠들썩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즉위 때부터 줄곧 ‘가난한 이’에 대한 관심과 ‘교회개혁’과 같은 말씀을 줄곧 해오셨고 얼마 전에 출판된 교황권고 『복음의 기쁨』에서도 목격되고 있지요. 이를테면 교황님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루카 6,20)이라는 성서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은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과 가난에 짓눌린 이들에게 하느님 마음속에 그들을 위한 특별한 자리가 있다고 확신시켜 주셨다” 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또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다”(마태 25,35)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을 가난한 이들과 동일시하셨다고 주목하셨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모두를 사랑하시지만 특히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을 하셨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 편을 든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성서의 하느님은 부자나 가난한자나 가리지 않고 무한한 사랑을 주시는데, 그러면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과는 다른 말씀과 다른 행동을 하신 걸까요? 하기 쉬운 질문이지만 금방 답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마침 신에 대한 이야기 거리가 기다리고 있으니 먼저 이야기를 들어보고 함께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큰 상 받은 뻐꾸기

먼 옛날, 인도네시아의 어느 밀림 속에 살던 신의 한 아들이 죽었습니다. 신은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죽자 그 슬픔을 이길 수가 없어서 밀림 속에 있는 모든 생물들을 다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아들의 장례를 위해 구슬피 울도록 명령했습니다. 생물들은 신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대로 복종하여 열심히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일부는 지쳐서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돼 버렸습니다. 한 시간 가량 지나자 노래 부르는 동물의 수는 부쩍 줄었고 그로부터 또 한 시간이 지나자 더 많은 동물들이 노래 부르기를 그만두었습니다. 세 시간째가 되자 거의 모두가 목이 다 쉬어 버려 소리마저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다만 뻐꾸기만은 목청 높여 지칠 줄 모르고 낮이나 밤이나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를 본 신은 가엾은 생각이 들어서 “이제 그만 불러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뻐꾸기는 “이렇게 끝까지 노래를 불렀으니 상을 좀 주십시오.”하고 요청했습니다.

“네가 마음에 든다. 좋다. 상을 주고말고. 이제부터 너는 알을 낳을 때 집을 안지어도 좋아. 오랫동안 노래를 부르느라고 지쳤을 테니까. 너는 네 알을 때까치나 멧새 집에 낳아라. 그리고 때까치나 멧새의 알은 다 밀어내 버려. 네 알을 까는데 방해되지 않도록 말이야. 그러면 때가치나 멧새들은 모르고 네 알을 품어서 부화시켜 줄 거야. 그 녀석들은 노래도 제대로 못 부르는 놈들이니 그런 것들의 알쯤은 밀어내 버려도 좋다. 너는 오랫동안 노래 부르느라고 지쳤을 테니 알은 부화시키는 일은 하지 않아도 좋다. 그 녀석들이 하도록 내버려 둬.”

이렇게 해서 그 뒤로부터 뻐꾸기는 집도 짓지 않고, 제 알은 때까치나 멧새의 집에다 낳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뻐꾸기의 알은 때까치나 멧새의 알보다 먼저 깨어서 때까치나 멧새의 알을 굴려서 버리게 됐습니다.

– 최재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전설이야기』

독자 여러분도 아마 한번쯤은 뻐꾸기가 다른 새 둥지에 알을 낳고 이렇게 ‘손도 안대고 코푸는’ 방법으로 자기 새끼를 낳고 기른다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사람 사는 세상도 착한 사람, 악한 사람, 부자, 가난한 사람 등이 공존하며 만들어 내는 요지경 속인데 동물의 세계라고 그러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냐고 따진다면 딱히 할 말은 없을 것 같습니다. 뻐꾸기가 좀 얄밉기도 하지만 더 문제라고 생각되는 이야기에 나오는 신의 태도가 너무 편파적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이 죽어서 그 슬픔을 달래느라고 온 생물을 다 불러서 함께 슬픔을 나누자고 한 부분까지는 그냥 넘어갈 수 있을 듯한데, 타고난 목청을 이용해 이득을 챙기려는 뻐꾸기와 ‘거래’를 하는 모양도 신답지 않고, 그 거래 내용도 아주 고약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아들의 장례식에서 며칠 동안 쉬지 않고 목청껏 울어 준 뻐꾸기가 고마워서 그 수고로움에 대해 보답하려는 것은 좋은 일이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보상이 때까치와 멧새의 집에 뻐꾸기 새끼를 낳게 해서 어미의 역할을 방기하도록 종용한 것은 비열한 ‘보복성’ 행위라고 보입니다. 뻐꾸기 알이 무사히 부화되도록 다른 새들의 알을 밀어 내라고 한 대목은, 신이 뻐꾸기 새끼를 살리기 위해 다른 새들을 죽여도 좋다고 한 것과 같으니 잔인하다고도 보입니다. 만일 이를 멧새나 때까치가 안다면 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요? 이 새들에게 신은 자비롭기는커녕 자기 새끼들을

죽인 원수 같은 존재로 여겨질 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경으로 돌아오면, 우리는 구약에서 야훼가 이스라엘 민족과 타민족 사이의 전쟁이나 갈등이 있을 때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고 다른 민족을 거세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위의 이야기와 맥락은 다르지만 때까치와 멧새의 처지에서 보자면 비슷하다고 여길만한 장면들 말이지요. 구약은 야훼를 이렇게 증언합니다. “주님의 이름은 ‘질투하는 이’, 그는 질투하는 하느님”(탈출 34,14)이며, “주님 말고 다른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자는 처형되어야 한다”(탈출 22,19)고 말이지요.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탈출 21장) 하며 “그분께서는 거룩하신 하느님이시며 질투하시는 하느님으로서, 너희의 잘못과 죄악을 용서하지 않으”(여호 24,19)시는 분입니다. 이런 무서운 재판관으로서의 하느님 이미지가 뻐꾸기의 신과 자꾸 겹쳐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네요.

그런데 신약에 오면 하느님 이미지가 매우 다른데,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하느님은 그야말로 대자대비하신 분이지요.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마태 5,48)시는 공평무사한 하느님이십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요한 3,16-17) 대자대비하신 분이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지상에서 뵐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다른 구약과 신약의 하느님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무척 궁금한데, 그 이야기는 성서학자들에게 듣기로 하고 앞에서 꺼낸 얘기로 돌아가 보지요. 예수님의 하느님이 그렇게 공평하신 분인데 왜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 편을 들었는지 의문은 여전히 가시지가 않네요. 그런데 과연 예수님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여 ‘무조건’ 편을 들었을까요? 만일 경제적 가난이 그 이유의 전부라면 ‘하늘나라가 너희 것이니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라’는 말씀은 가난해야 행복하니 가난에 허덕이면서 살라는 말로밖에는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겠지요. 이를 예수님의 화두 같은 다음의 말로 좀 돌려서 생각해보지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라.”(마르12,17) 비록 자신을 시험하는 율법학자들에게 한 말씀입니다만, 저는 가난한 이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이에 대해 자신만의 대답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단순히 “카이사르의 것= 돈, 명예, 권력”, “하느님의 것= 희생, 봉사,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한 번도 그 차이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깊은 생각으로의 초대’라고 생각됩니다. “네게 가장 중요하고도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정녕 하느님의 것이냐? 하느님께 돌릴 수 있느냐?”고 묻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한 듯합니다. 뻐꾸기 얘기에서 너무 멀리 날아온 것 같지요. 되돌아갈 길이 바쁘니 이제 그만 물러가야 할 듯합니다. 장미 향기에 취할 것만 같은 유월에 뵙겠습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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