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로 떠나는 아시아 여행 – 하느님의 용서, 인간의 용서

황경훈(아시아 평화 연대 센터장)

하느님의 용서, 인간의 용서

‘용서는 하느님의 몫이다’는 말을 종종 듣곤 합니다. 용서라는 주제를 꺼내기 머뭇거릴 정도로 무거운 말인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이를 재치 있게 장사에 써먹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언젠가 한 비디오 가게에서 비디오 한편을 빌려서 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용서는 하느님의 몫이고 되감기(rewind)는 인간의 몫이다”고 말이지요. 보통은 ‘되감아서 반환해 주면 정말 감사하겠다’라거나 ‘되감기해서 돌려주면 복 받을 것’이라고 해도 될 텐데, 이렇게 용서라는 말을 살짝 집어넣으니, 그 상투적이고 따분한 말이 이렇게 달라지네요. 또 어떻게 보면 ‘되감기해서 반납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을 것’이라는 상벌을 연상하게 되어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은근한 ‘협박’으로도 다가오는 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여러모로 재미있는 해석과 상상을 불러오는 말인 듯합니다. 대중매체의 변화는 정말로 빨라서 ‘비디오’라는 말도 벌써 옛날 얘기가 되어버린 듯하지만, 불과 10년 전만 해도 동네 어귀에 한 두 개의 비디오 대여점을 쉽게 볼 수 있었지요. 어쨌든, 말이 나왔으니 오늘은 용서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눠 보기로 하겠습니다. 아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인 방글라데시, 비만 오면 홍수가 나서 수천, 수만의 사람이 해마다 목숨을 잃는 슬픈 나라, 인구의 95 퍼센트 이상이 이슬람교를 믿는 나라에서 전하는 용서의 메시지를 들으러 갈 채비를 서둘러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 고해

 

내 이웃인 카심 알 리와 그의 아버지는 카심이 입버릇처럼 말하듯이, 어떻게 하느님이 우리 모두 안에 계신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카심이 죽기 2년 전쯤에 크기로 보나 살림살이로 보나 조촐하기 이를 데 없는 내 오두막에 편지를 보내서 내가 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심장병으로 고통받고 있었고 그가 먹는 약이 그리 큰 효과가 없는 것 같았다.

어둠침침한 방에 도착했을 때 몸의 체온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인지 제법 두꺼운 담요를 덮고 있는 그를 보았다. 허리를 굽혀 그에게 몸을 가까이 숙이자 그는 “난 곧 죽을 거예요”라며 기진한 듯 들릴 듯 말듯 한 소리로 말했다. 나는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을 거예요”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내가 신부님께 잘못한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든 용서해 주시길 바라요.” 이 말에 나는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른 채, 나는 목이 메어 그저 눈물만 삼키고 있었다. 여러 나라에서 사목자로 일을 해오는 동안 수많은 고해를 들었지만, 지금까지 들어 온 고해 가운데 이렇게 진지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고해를 듣는 경험은 거의 드물다. “카심이 내게 잘못한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하지만 당신이 원하니 혹시 카심이 생각하기에 내게 잘못한 게 있다면 무엇이든 다 용서하겠습니다.” 내가 대답할 수 있는 말은 이것이 전부였다. 나는 하느님에게 진실로 이 착한 사람을 용서해 달라고 청했다.

그 뒤 생애 마지막 두 해 대부분을 고통과 병마에 시달렸지만, 그는 끝까지 자신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고개가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카심 덕분에 나는 어느 종교가 ‘고등’ 종교인지를 순서나 등급으로 나누는 식으로 배웠던 신학교 교육이 더 이상 마음속에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출처: 『Once upon a Time in Asia 』 (Orbis Books, 2006))

이 글은 방글라데시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도우 빈 신부 (메리놀회) 신부가 겪은 체험담이라고 합니다. 한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하는 그 ‘마지막 고해’에서 용서를 청하는 상황이 닥친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사제가 아니라도, 정식 고해성사의 형식을 빌지 않더라도 죽어가는 사람에게서 용서해 달라는 말을 듣는다면, 도우 빈 신부가 한 말 이외에 어떤 다른 말을 해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흔하지 않은 극적인 용서도 있겠습니다만, 일상에서 겪는 일 가운데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기에 용서를 청하고 또 용서를 해주는 경우는 적지 않다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누구의 잘못으로 자신이 당한 고통을 생각하면서, 끝내 이를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도 있고, 한편 ‘뭐 그럴 수도 있었겠다’고 마음속에서 용서한 경우도 허다하게 만나게 되고, 인심 좋은 선술집의 안줏거리만큼이나 풍성하고 다양한 사연들이 있을 터이니 그래서 인생은 살만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상대방에게 전하지는 않았지만 ‘난 너를 이미 용서했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동안 그 일로 증오와 미움으로 가득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시원하게 풀어지는 기분을 누구나 한번쯤은 느껴보았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아마도 사제직의 가장 중요하고도 거룩한 점을 꼽으라면, 인간이 한평생을 살면서 가슴 속에 품어 놓은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 그렇지만 생을 마감하기 전에 꼭 해야 하는 말이 있을 때 이런 고해의 형식을 빌어 그것을 들어주고, 공감하고 위로하는 행위야말로 눈물겹도록 인간적이며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장면이 아닌가 합니다.

이야기에서 카심이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다면’ 용서해 달라고 한 것은 어떤 조건을 전제로 하는 용서를 구한다기보다는 혹 기억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저지른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그것마저 용서해 달라는, 모든 것을 용서받고자 하는 태도라고 생각됩니다. 그렇기에 그 고해를 들은 사제도 그 진지함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으로 ‘목이 메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도우 빈 신부는 이야기 끝에 그 일을 겪고 나서 종교를 ‘순서나 등급으로 나누는 식으로 배웠던 신학교 교육이 더 이상 마음속에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고 하는 말로 미루어, 아마도 카심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라 방글라데시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슬람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메리놀회 신부님들이 연로한 분들이 많으니 오늘 이야기에 나오는 사제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에 신학교육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고, 그랬다면 그리스도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고 종교성도 낮은 ‘열등한 종교’라고 가르쳤을 가능성도 있겠지요. 카심의 고해는 고해를 듣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어서 ‘그리스도교 중심주의적 태도’를 근본에서 수정하는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 그대로 기쁜 소식인 ‘복음’을 전하러 방글라데시에 갔다가 죽어가는 이에게서 감동적인 ‘복음’의 말을 듣고 복음화 되는 결과가 되었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 ‘그럼 선교를 한 게 아니라 오히려 선교를 당한 셈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선교 또는 복음화가 단순히 신자 숫자를 늘리는 데에 있지 않다면, 타 종교에 대해 편견을 버리고 열린 마음을 얻게 된 것이야말로 복음이라는 말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것을 인정하고 공개적으로 이런 글을 남긴 도우 빈 신부님도 멋져 보이네요. 그러니 선교니 복음이니 하는 말도 우리 삶을 떠나 어떤 다른 거룩함을 찾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일상 속에 있다는 깨달음을 이 짧고도 단순한 이야기가 전해주고 있으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닌가 합니다. 용서에 대해서 좋은 얘기만 했는데, 얼마 전에 용서를 주제로 다룬 「밀양」이라는 영화는 용서의 어려움, 그것에 대한 더 깊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보입니다. 한마디로 ‘당신 자식을 죽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겠냐’는 물음입니다. 아니 「밀양」은 거기서 끝내지 않고 아들을 죽인 이를 용서하러간 자식 잃은 어미에게 살인자는 “나는 이미 하느님에게 용서받았다”고 태연하게 말을 하는 것으로 ‘용서’란 말을 욕보이고 말지요. 이쯤 되면 용서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용서의 주체가 무화되는, 그야말로 자식을 잃고 당한 고통 속에서 겨우 헤어 나온 이의 존재자체, 살아있음의 의미 자체를 부정해버리게 만들고 맙니다. 그래서인지 영화의 원작인 『벌레이야기』 라는 소설에서는 자식을 잃은 어미가 자살하는 비극으로 끝을 맺지요. 정말 ‘용서는 하느님의 몫’이란 말에 공감이 가는 대목이기도 한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너무 무거운 주제라고 책망하셔도 이번만큼은 곰곰이 생각해보시기를 다시 한 번 청하며 인사를 대신하겠습니다. 더위에 지치지 마시고 한 여름 잘 보내시길 빌며 선들 선들 바람 부는 9월에 뵙겠습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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