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수전 – 마을이 키우는 아이들

김옥자

 

춘천시 사북면 고탄리 ‘춘천별빛산골교육센터(이하 센터)’, 춘천역에서 자동차로 30여분 들어가면 만날 수 있는 아이들의 놀이터다. 센터에 들어서니 왁자지껄 떠들썩할 것으로 기대했던 센터에는 아이들의 식사를 마련해주시는 미소샘 한 분 뿐이다.

센터에는 피아노 한 대와 센터 선생님들이 행정업무를 보시는 사무실 한 칸, 부엌, 그리고 넓은 마루가 전부다. 원래 이곳은 고탄리 마을회관으로 사용하던 곳인데 마을 어르신들의 배려로 센터에서 무상임대 중이다. 일 년에 한두 번 회의 때만 사용하는 회관이지만 아이들을 위해 선뜻 내어주시지 않았다면 이 일을 할 수 없었을 거라 웃는 윤요왕 씨, 센터의 대표이자 10년째 농부다. ‘생수전’의 첫 주인공!

윤요왕 씨는 센터 대표 말고도 하는 일이 많다. 불과 며칠 전인 작년까지 고탄리 이장직을 역임했고 올해부터는 ‘사단법인 전국 농산어촌유학협의회’의 이사직도 맡았다. 또 마을 아이들과 유학 온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의 학교운영위원이며, 유학 온 아이들을 맡은 농가도 했다.

센터의 아이들은 모두 센터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송화초등학교에 다닌다. 초등학교 앞에는 아이들이 매일 작업하는 목공방과 텃밭이 있다. 공방과 텃밭은 송화초교에서 임대 받은 공간이다. 아이들은 공방에서 매일 작업을 하고 텃밭에서 키운 온갖 작물들은 아이들이 직접 먹기도 하고, 올 겨울에는 아이들이 직접 키운 배추로 김치를 담그기도 했다.

윤요왕씨가 센터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얼까?

윤요왕씨는 춘천에서 가까운 가평에서 나고 자라 강원대에서 공부했다. 2남 1녀 중 둘째였던 요왕씨의 별명은 작은 신부님. 그래서인지 고3때도 주일학교 교사를 했는데, 어떻게 고3이 교사를 하냐고 물으니 당시 주임신부님 말씀이 ‘일주일에 한번 하는 교사했다고 대학 못 가면 재수해라’였단다.

대학에 간 요왕씨는 가톨릭대학생연합회(이하 가대연) 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예수를 보게 되었다. “운동을 통해 어려운 분들을 보면서 예수가 해야 할 일을 알게 되었던 거 같아요. 제가 성경구절을 줄줄 외우진 못해도 실천을 하지 않는 신앙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은 알거든요. 누군가 웃을 수도 있겠지만 오래전부터 제 꿈은 해탈과 예수가 되는 것이었어요. 내가 예수를 지향하고 있다면 매순간 그렇게 살수는 없지만. ‘지금의 예수’을 생각하고 살아갈 수 있다면 괜찮은 삶이겠다 하는 생각을 해요.”

졸업 후, 요왕씨는 천주교인권위에서 활동하면서 사람들의 현실을 봤고, 좀 더 어려운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는 게 자신의 길이라 생각해 원주교구 정의평화위원회로 자리를 옮겼다. “신앙적 고민으로 보면, ‘우선적 선택’을 한 건데, 예수가 우리에게 요구하고 나의 십자가가 뭔지 고민하고 스스로 고민하며 살아야 하는데, 스스로 좀 낮은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그런데 시간이 흘러갈수록 관성에 따라 움직이는 자신이 보였단다.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분들의 절실함과 달리 시스템에 맞춰 일하는 자신이 유리되어 보였던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어 모든 것을 접고, 귀농을 결심 대학시절 농활을 했던 지금의 이곳 춘천으로 들어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뚜렷한 철학이 있다기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들어왔어요.”

대출로 땅을 사고, 전세 빼서 집을 지었다. 그때가 서른두살. 평생 할 일을 숙고하고 결정하기엔 젊어보이는 나이. 춘천이 운명처럼 그를 불러들인 건 아닐까?

처음 3년은 농사만 지었다. 농부가 천직이었는지 초보인데도 농사는 잘됐다. 오히려 지은 농산물을 내다 팔 판로가 걱정이었다. 하는 수없이 지인들에게 전화를 돌려 감자 한 박스, 토마토 한 박스 팔다보니 회의가 생겼다. 뭔가 근본대책이 필요했던 요왕씨는 아는 사람 45명을 모아 한 달에 3만원씩 받고 자신이 수확한 농작물을 매번 보냈다. 판로가 걱정일 때는 보낼 사람이 없어 작물을 심는 게 고민이었지만 판로가 정해지자 하나라도 더 심고 한 개라도 더 보내고 싶어졌다. 봄 상추부터 시작해 겨울 절임배추까지 열심히 재배하고 열심히 부쳤다. 그렇게 땅만 파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아이들이 보였다.

“제가 올해로 농부 11년차이고, 센터는 2005년 겨울방학부터 공부방으로 시작했어요.”

당시 센터 앞 찻길에서 마을 초등학교 1학년생이 덤프트럭에 치어 숨졌다. 요왕씨는 그 사고를 보고, 원주 정평위 시절 학원차에 사망한 두 명의 아이들이 떠올랐다. 그래서 살릴 수 없다면 적어도 죽게는 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인권위나 정평위 활동할 때 가장 어려운 게 사망사건이었어요. 뭘 해도 죽은 사람은 살릴 수가 없으니까요. 당시 1학년 입학을 앞둔 아이가 학원차 문을 열고 내리고 닫다가 옷이 껴서 100미터 따라가다 죽었어요. 학원 3개 명패를 붙힌 지입차였죠. 학원에서 차 한 대씩 따로 굴릴 수 없어 지입차를 쓰는데 원래는 아이가 내린 걸 보고 문 닫고 안전하게 출발해야 하는 규칙이 있죠. 하지만 시간에 쫓기다 보니 못 지킨 거죠. 결국 학원 문젠데 책임은 늘 지입차 주인이 지더라구요.”

요왕 씨는 당시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담당 신부님하고 ‘어린이 안전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위해 뛰어다녔다. 지금도 일년에 천여명 아이들이 어른들의 부주의로 사망을 하지만 언론을 탈 때만 뭔가 이루어질 것 같이 호들갑을 떨지만 지금껏 책임지는 곳이 없었다. 국회의원들이 나서야 할 일이지만 나서주는 의원이 없었다.

그런 일들 겪으면서 요왕씨는 동시대의 어른으로서 부채감, 사회의 책임감을 느꼈고, 마을 사람들과 생각을 나눴다. 처음에는 마을 아이들이 방과 후 모이는 공부방으로 시작해 간식만 먹였는데, 하다보니 저녁도 좀 먹였음 좋겠다 싶고, 프로그램도 하고 싶고, 그래서 지역아동센터를 겸하게 되었다. 그러다 자연 속에서 자랄 수 있는 아이들이 더 많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3년간의 준비기간 끝에 ‘조화와 소통, 나눔과 배려, 계획된 변화, 전문성을 기본으로 하는 별빛 산골교육센터를 2009년 발족했다. 그 해 여름 세 차례 체험캠프를 통해 100여명의 도시 아이들과 인연을 맺고 그때 참가했던 아이들이 유학생이 되어 2010년 한 해를 함께 했다.

센터는 어떻게 운영되는 걸까?

“일반적으로 산골유학에는 세 가지의 형태가 있어요. 농가 주민이 ‘팜스테이’ 형식으로 아이들을 돌봐주는 농가형과 센터에서 단체생활을 하며 지역학교에 통학하는 센터형, 농가에서 기본적인 숙식을 하고 그 외 활동과 아이들에 대한 관리는 센터에서 지원하는 복합형인데, 별빛센터는 100% 복합형이에요.” 이유는 방과 후 학습지도에 취약한 농가형의 단점과 실제 농촌의 생활을 체험하기 어렵다는 센터형의 단점을 보완하면서 온 마을이 하나되어 아이를 돌보기 위함이었다.

“작년부터 방송이나 언론에서 많이 찾아오세요. 산촌유학 중에서도 후발주자이기도 하고 부족한데 왜 이렇게 오시나 생각해보니, 저희처럼 하는 데가 없더라고요. 대부분 기숙형이거든요. 그런데 저희는 농가가 있으면서 센터가 있고, 잔무도 다 하고. 일본 산촌유학 40년 후 내린 평가에서 이런 복합형으로 가야 한다고 결론 내렸죠. 또 저희는 유학생 뿐 아니라 근처 농가아이들도 함께 하거든요. 그게 연관이 없으면 서로 유리되죠. 캠프 프로그램도 동네 어른들에게 부탁하죠. 마을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죠. 센터에 기숙사 공간도 없고, 제가 마을에서 살다 필요에 의해서 시작하다보니 이런 형태가 가능하다면 좋겠다 했던 거죠.

처음엔 모험이었어요. 농가 대부분이 할머니 할아버지라서 과연 도시 부모들이 농가분들을 얼마나 신뢰하고 믿고 맡길까, 농가의 차이는 어떻게 할까. 센터는 선생님들하고 합의하면 일관성 있게 추진할 수 있는데 농가별로 생각이 다 다르시고, 지역학부모들도 함께 하려면 이게 잘 될까, 걱정도 됐죠. 먼저 산촌유학 시작한 분들도 다 걱정하셨어요. 그래도 한번 해보자 했죠.“

요왕씨는 그만큼 사람을 믿었던 것 같다. 요왕씨가 그런 모습을 보여서일까 아이들도 자연스레 잘 따라왔다. “처음엔 아이들이 학교에서 만나면 자기네 농가 할아버지는 밖에 나갔다 통닭도 사다줬다는데, 어느 할머니는 어떻게 했다는데 하며 비교했어요. 하지만 한두 달 지나면서 그런 이야기는 싹 들어가요. 비교대상이나 불만이 해결된 건 아니지만 농가에서 지내면서 농가와 아이들 사이에 뭔가가 형성되고 처음엔 문제였을지 모르지만 나중엔 상관없게 된 거죠.

현재 오래된 아이는 처음부터 와서 3년이 된 6학년들이다. 8농가에 모두 20명이 지내는데 6학년 아이는 이제 2월이면 졸업해서 가야 하는데 안 가겠다고 해서 고민이다. 아이들의 마음을 온전히 얻은 증거이자 행복한 고민이다. 비결이 뭘까?

여기는 참아줄 수 있고, 감싸줄 수 있고, 기다려줄 수 있어요. 도시의 학교는 큰 만큼 아이들이 다 보이진 않지만 여기는 작은 만큼 이름이 많이 불리워지죠. 아이들끼리도 처음 오면 서로 부딪쳐요. 마땅히 그래야 하구요. 큰 학교에서야 이 애랑 문제 있음 피해서 다른 아이에게 갈 수 있지만 여기는 그럴 수 없으니 서로 조절할 수 밖에 없고 시간이 흐르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관계성이 회복되는 거죠.

저희는 아이들에게 큰 울타리가 되어줄 뿐이에요. 애들이 싸우면 개입도 하지만, 결국엔 아이들 스스로 깨닫게 되죠. 애들이 여기 오면 제일 먼저 물어보는 게 머하고 놀아요에요. 알아서 놀아본 적이 없거든요. 지금까지는 다 시키는 것만 했으니까요. 그러면서 자기주도 학습이니 창의학습이니 하는 건 말이 안 되죠.

저희 규칙 중 하나가 아이들이 주말에 이동을 할 수 있는데, 누구 집에 가서 자고 싶으면 최소한 3일 전에 이야기해야 해요. 그래야 각 농가에서 준비를 하거든요. 그리고 농가에 있는 다른 애들 동의를 구해야 해요. 처음 여기 온 애들이 불쑥 금요일에 ‘저 가도 되요?’ 하면 안 되지. ‘거기 농가 허락받았어?’ ‘아뇨’ ‘그럼 담주에 가라’ 이런 과정을 몇 번 겪어요. 그럼 나중에는 아이들끼리 계획을 짜죠. 그동안은 그만한 틈과 시간도 안 준 거에요.”

농사도 하나하나 살피지 않으면 안되는 것처럼 아이들도 하나 하나 다 살피면 보여요. 지금은 이 애가 쉼이 필요한지, 물이 필요한지, 책이 필요한지 보여요.“

어느 책에서 보니까 아이들이 유치원때까지 끊임없이 책을 좋아하잖아요. 근데 학교 들어가면서부터 입이 닫치고 눈이 닫치죠. 학교의 뜻이 배우고 익힌다는 것인데 지금의 학교는 배우고 익힌다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걸 알려주는 것 같아요. 식물도 그렇듯 아이들도 그 시기에 맞는 적절한 영양이 있는데 지금은 너무 많은 열량을 주입하는 거 같아요. 전 교육전문가가 아니지만 아이를 키우는 상식과 합리적 사랑과 관심이면 되는데 지금은 너무 어려워졌어요.”

힘든 점은 멀까?

“아무래도 가족들과 시간을 많이 못 갖는 것이죠. 작년까지 4년간 이장직을 하면서 농림부 57억짜리 ‘농촌마을 종합개발사업’이라고 해서 지속가능한 마을을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가 이었는데 5개리 이장이 모여서 맨날 회의를 하는 거예요. 얼마나 이견이 많겠어요. 4년을 쫓아다니면서 농사도 잘 못 짓고, 집에 오면 아이들이 ‘아빠 오늘은 회의 없지?’ 하고 물어보는 게 일상이었으니까요. 이게 뭐하는 건가 싶기도 했죠.”

이 일을 지탱하는 힘은 멀까?

“누가 인정하든 아니든, 전 제 행위의 힘은 신앙이고, 제 사상이나 철학의 기본은 ‘예수’에요. 늘상 기도하려고 하고 예수에게 묻고. 힘들거나 지치거나 할 때 예수님이면 어땠을까 생각해요. 당연히 100% 실현은 못하지만 그 끈을 놓치지 않고 평생 살아가고 싶어요.”

요왕씨는 앞으로의 계획에 먼저 ‘센터의 안정화’를 꼽았다. 마을회관으로 있는 센터가 큰 차들이 다니는 대로변이라 긴장을 늦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올해는 건축기금 마련을 시작할 예정이란다. 앞으로 몇 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들이 안전하게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은 꼭 필요하니다. 실제 마을 분들의 동의 아래 센터를 사용하고 있지만, 간혹 구청 직원이 바뀔때마다 정해진 용도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지적을 받고 한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교육센터가 센터로만 그치지 않고 지역사회에 마을에 봉사하고 나눌 수 있는 기운이나 힘들이 넓어지면 좋겠어요. 제가 있는 이곳이 공동체이길 바래요. 공동체이기 위해 다양한 사람들이 와서 살았으면 좋겠고, 그런 것이 유지되는 것이 필요하다. 농촌사회가 황폐화되고 노령화되고 그러면서 공부방 아이들도 구성요소가 되어야 하거든요.

저희가 유학생들하고 기본 행사를 하려면 기본 동력이 130-140명이 모여요. 그것이 좀더 마을과 넓어지고 된다고 하면 뭘 못하겠나 싶어요. 그 속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 같아요.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 201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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