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톡톡 – 자기를 품어 새로운 ‘나’를 낳는 시간 – 에드위나 게이틀리, 「씨앗이 자라는 소리」

고은지

자기를 품어 새로운 를 낳는 시간

– 에드위나 게이틀리, 「씨앗이 자라는 소리」

목적 없이 막연히 앞으로 달리는 차 안에서 때로 핸들을 휙 꺾어 버리면 어떨까 상상한다. 정해진 차선을 벗어나 중앙선을 가로지르면 상식이 이끄는 대로 꼭 큰 사고로 이어질까. 차로가 아니라 바다 위로 나아갈 순 없을까. 그러다가 훌쩍 하늘을 날아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곳에 닿아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이름도 바꾸고,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옷차림과 머리 모양에 도전하고, 자기를 둘러싼 모든 사람과 안녕을 고하고 홀로 살아간다면….

그런데 변화가 기회가 느닷없이 불쑥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아니야, 난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씩씩해. 버틸 수 있어, 난 강하다구. 정말이야’라고 도리질하며 버텨왔던 삶을 바꿀 때가 되었다고 알리는 사건. 부여잡고 있던 핸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살짝 틀어지는 날. 씨앗이 땅이 떨어져 소리 없이 싹트고, 어느 순간 꽃을 피우듯. 과거를 극복하고 변화를 맞이하는 데는 긴 인내와 침묵이 필요하다.

내게도 변화와 쉼은 갑자기 찾아왔다. 아니, 이제는 핸들을 쥘 힘이 없다고 인정하고 손을 떼는 순간이었다. 더는 삶을 통제하기를 그만두었을 때, 인생이라는 자동차는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먹고산다는 이유를 대면서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일에 매달렸다. 상사를 욕하고, 세상을 원망했다. 명치끝에서 뜨거운 불길이 치솟는 날에는 가끔 술을 마시고 마냥 한없이 울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으면 정신없이 먹었다. 마치 세상을 깡그리 물어뜯을 듯. 일에 치여 약속을 지키지 못하니 오랜 친구가 떠나고, ‘왜 나만 이럴까’ 하는 열등감의 화살은 자연히 부모님과 가족에게 치달아 갔다. 직장 상사는 바보였고, 변화하지 않는 회사는 꼰대였고, 침묵하는 하느님은 방관자였다. 작년 시월, 권고사직 통보를 받고 하루 사이에 짐을 꾸리고 도망치듯 회사를 나왔다. 벌판에 홀로 내동댕이쳐진 느낌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팔 년 동안 그만두고 시작하고, 만나고 헤어지고, 버리고 버림받았다. 나와 삶의 관계는 그랬다. 첨예하게 대립해서 한 발짝 다가올 때마다 한 대를 돌려주는. 징글징글한 원수.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 내 삶인데.’ 더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과거를 벗어나고 싶고 삶과 화해하고 싶었다. 주어진 길을 걷지 않고 길을 만들고 싶었다. 안식년. 그날로 스스로 안식년을 선포했다. 누가 듣든, 세상이 알아주든 말든. 질러 버렸다. 무조건 쉬기로.

지금까지 쌓아 둔 모든 물건과 작별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가지고 있던 책, 음반, 학용품, 옷, 생필품, 사진, 편지 등을 모두 정리했다. 초등학교부터 모은 십 년 치 일기장과 개인 기록을 다 버렸다. 책은 강정 평화마을, 아름다운 가게,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하고, 필요로 하는 이에게 나눠 주었다. 한 무더기의 옷과 신발을 버리고, 남은 건 모두 세탁해서 빨아 널었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하루 자고 일어나면 사진첩을 정리하고, 다음 날 눈 떠서는 그릇을 버렸다. 다음에는 휴대폰 전화번호부와 메일 계정이었다. 컴퓨터 안의 음악과 사진 파일도 골라내어 삭제했다. 노트북 컴퓨터를 장롱 깊숙한 곳에 넣어 두고, 카메라와 전자 기기도 팔았다. 그 돈으로 7번 국도를 죽 따라 여행을 했다. 목적도 목표도, 일정도 계획도 끝도 정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정하지 않고, 내게 무엇도 요구하지 않고,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삶이 내게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늦게까지 잠을 자고, 명상과 기도를 시작하고, 하루에 두 번 산책하고, 매 끼니 정성 들여 밥을 짓고, 아침마다 체조를 했다. 그렇게 육 개월이 지나자 조금씩, 발 딛고 설 힘이 생겼다. 겨울이 지나고 돌 틈에 핀 새싹과 처음 마주하던 봄날, 비로소 나와 화해했다. 앞으로 무엇을 하든, 어떻게 살든, 어디서 누구를 만나 걸어가든 자신을 온전히 끌어안겠다고. 더는 변화하지 못한다 해도, 지금까지의 노력이 실패하여 과거의 생활을 반복한다 해도, 그마저 허락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마도 「씨앗이 자라는 소리」에 나온 돌로레스와 에드위나의 번민과 실패와 좌절도, 내가 겪은 몸부림의 시간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으리라. 변화. 누구나 갈망하지만,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 선물이다. 변화한 후에 스스로 더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와 ‘나는 왜 변화하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자기를 설득하지 못하면 도리어 이전보다 혹독히 망가지기도 한다. 한 사람의 탄생은 그가 원하여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온전히 주어졌기에 창조주를 원망하고 탓할 수도 있겠지만, 자기 삶의 길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은 스스로 주어진다.

씨앗이 싹트기 위해 땅을 뚫고 올라오는 과정은 매우 어렵고도 외롭다. 언 땅을 녹여 가며 머리를 디밀고 마침내 자기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과정은 고통스러운 만큼 아름답다. 돌로레스의 울부짖음과 에드위나의 방황은 외면하고 싶지만, 오늘 내가 마주해야 할 나의 모습이다. 자기 외에는 아무도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고독, 누구도 강제로 요구하지 않았기에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는 두려움,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보다 더 큰 자기를 이겨내고 자기와 소통하는 일. 이 책의 두 여성은 자기에게 찾아온 변화의 기회를 온몸을 품어 새로운 ‘나’를 낳았다.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 돌로레스의 삶은 실패의 연속이었고, 극복하지 못한 중독의 끝은 죽음으로 이어졌지만. 앞으로 그와 같은 실패를 무수히 반복할 나에게, 맨발로 걸으면서 길을 만들어 나간 두 여성이 내어 준 씨앗 한 알이, 톡 하고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고은지 참 자아와 일치하기 위해 내면을 여행하는 여행자, 하루하루를 삶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는 생활자, 누구보다 자기 자신과 조화롭게 어울리고 싶어 하는 행동가이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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