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톡톡 – 연대하는 삶에 관하여 – 부지영 감독, 영화「카트」

김하은

연대하는 삶에 관하여

– 부지영 감독, 영화「카트」

(본문에는 영화 <카트>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 우리 이웃의 이야기가 있다. 홀로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급식비를 내지 못해 점심을 굶는 학생이, 해가 질 때 까지 어린이집 앞에서 엄마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아이가. 영화 「카트」의 주인공들은 ‘삶’ 자체를 목표로 그들 각자의 간절함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 밖의 우리들을 닮아있다. 우리는 두 시간 남짓의 러닝타임에서 기승전결을 맺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 앞의 부조리에 침묵하기도 하고, 궂은일도 기꺼이 감내해가며 살아간다. 바로 이 삶들이 영화 「카트」의 이야기이다.

「카트」는 2007년 이랜드 홈에버의 기업매각에 따른 비정규 계약직 대량 해고 사태에서 출발한 영화로, 노동자들이 사측의 일방적인 해고통보를 받는 것에서부터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노조를 결성, 파업투쟁을 벌이기까지 일련의 과정들을 그 서사의 틀로 삼고 있다. 영화는 푸른 조명이 감도는 더 마트 매장 안에 일렬로 늘어선 계산대에서 기계적으로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계산원들을 비추는 것으로 막을 여는데, 그 중에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 면전에서 마트 계산원이라는 이유로 무시를 당하고, 절차상의 문제로 확인이 필요하다는 말에 ‘서비스 정신’을 운운하며 역정을 내는 고객 앞에서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음에도 무릎을 꿇는 등의 에피소드들은 부끄러운 우리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기도 한다. 회사는 매일 같이 ‘회사가 살아야 내가 산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시켰지만, 어느 날 문자 한통으로 날아온 건 청천벽력 같은 해고 통보였다. 다음 달 부터는 명단의 전원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다는 일방적인 통보가 벌집처럼 좁은 탈의실 복도에 게시된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틈에 배우 문정희의 대사가 들린다. “이건 부당해고예요. 회사의 일방적인 계약 위반이라고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엄마가 기꺼이 ‘죄송하다’고 말하며 무릎을 꿇은 이유는 어린 아들을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저에게 가해지는 부조리를 매일 같이 묵묵히 견뎌내던 엄마가 어떤 부조리 앞에서 부당함에 항의하고, 분노한다. 그 역시 어린 아들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엄마의 행동은 양립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저 주어진 삶을 살아가고자, 자기 앞의 책임을 다하고자 했을 뿐이었다. 「카트」는 바로 이 지점을 조명하는 영화다. 이 영화는 연출자가 믿는 어떤 ‘정의’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지 않는다. 그저 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들이 치열하게 싸워야만 했던 순간을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나는 이 카메라의 시선을 ‘공감’이라고 부르고 싶다.

사실 만듦새 자체가 세련되고 훌륭한 영화냐고 물으면 흔쾌히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그렇지만 기꺼이 「카트」를 응원하고 싶은 이유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복직 투쟁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궁극적으로는 공존과 공생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결국 우리가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로 우리의 짐작을 기정사실화하고 입맛에 맞는 정보를 취사선택해 미움과 증오를 정당화한다. 그리고 이것은 곧 나와 타인의 경계를 긋는 타자화를 통해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 공언하면서 무관심을 합리화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 모두 나름대로 자기 앞에 주어진 각자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내고 있을 뿐임을, 나와 타인이 공유하고 있는 그 닮음을 인정하는 순간, ‘나와 관계없는 일’은 ‘나와 비슷한 누군가의 일’이 된다. 연대는 바로 이 지점에서 부터 출발한다.

「카트」는 비정규직 문제를 소재로 삼은 영화로서는 거의 최초로 대중적인 상업 영화의 노선을 선택한 영화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략할 수 있음에도 굳이 설명적인 컷을 부가하고, 어려운 말들을 배제하는 대신 웃음의 요소들을 곳곳에 배치하는 등 무거운 소재를 조금은 가볍게 풀어내고자 한다. 영화는 ‘노조’가 무엇인지조차 몰랐던 아주머니들이 다홍색 티셔츠를 맞춰 입고 서로 잘 어울린다고 칭찬하며 웃음 짓는 장면으로 ‘낙숫물이 바위를 뚫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연대의 의미를 부연 설명한다. 논리적으로 설득하기보다 공감과 이해를 이끌어내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에 관객의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장면이 다수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도 서브플롯으로 제시된 배우 염정아와 도경수가 연기한 모자의 갈등이 해소되는 장면은 인물들의 감정을 관객들에게도 오롯이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장면이 될 것이다.

노동 문제를 영화 속으로 가져오면서 대중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한 고민과 선택의 결과물이 단지 세련되지 못했다고 해서 나쁘다고만 말할 수는 없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다수의 ‘공감’을 이끌어내기에 성공적인 선택이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눈물을 유도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면인 것을 알면서도 눈물이 난다. 다시 어린이집에 가고 싶다고 떼를 쓰는 아이를 보며, ‘나중에 말하자’는 말 한마디를 던지고 음식물쓰레기 봉투를 묶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아마도 우리의 삶과 너무나도 닮아있기 때문이리라. 해고 통보를 받고서 막연한 마음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영화 속의 엄마를 보면서 나는 얼마 전 부터 맞벌이를 시작해야했던 나의 엄마를 떠올린다. 영화 「카트」의 공감은 그런 식이다. 영화는 그 선택을 통해 보고 싶지 않았던 불편한 이야기들을 더 이상 ‘남의 이야기‘로 머무를 수 없게 만든다.

희망적인 이야기만을 말한다고 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부조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그에 침묵한다고 해서 세상이 평화로워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병든 부분을 방치할수록 곪아 썩어 들어가고 그 부분은 곧 전체로 전이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카트」는 지금 같은 시대에서 한번쯤 필요했던 영화가 아닌가한다. 허수아비 같은 위악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찬 사람들이 쏟아내는 극단적 폭력들, 왜 그래야하는지 본인 스스로도 알지 못할 정처 없는 미움의 말들로 점점 물들어가는 세상 속에서 다시 한 번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터닝 포인트를,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글로는 참 간결하게 적을 수 있는 문장인데도 정작 내 주변의 이웃들에게는 눈길조차 주기 힘들 때가 많다. 내가 살기에 바빠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이 우리에게 바라는 건 시간을 들여 어떤 행동을 취해주는 것이 아니라 단 한번이라도 그 외침을 들어주는 것일 수 있다. 여기, 우리 이웃의 목소리가 있다. 당신의 귀 기울임을 기다리는 목소리가.

김하은 수원대학교 연극영화학부 재학.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하고, 탓하기보다 먼저 ‘그럴 수도 있음’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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