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 지상에서 천국을 사는 한 방법 – 3호 서평

웃음, 지상에서 천국을 사는 한 방법

제임스 마틴, 『성자처럼 즐겨라!』, 이순 옮김, 가톨릭출판사, 2013

 

 

김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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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각한 교회의 표정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움베르토 에코의 베스트셀러 소설 『장미의 이름』은 14세기 수도원에서 벌어진 끔찍한 연쇄살인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눈이 먼 도서관 사서 호르헤는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예수는 절대 웃지 않으셨어”라는 말을 인용하며 웃음을 죄악시한다. 호르헤는 아르헨티나의 저명한 작가 보르헤스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도서관 관장이었던 보르헤스도 나중에 눈이 먼다). 그는 웃음을 저주받은 행위라고 생각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의 유일한 필사본 책장마다 독을 바른다(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웃음에 대한 원리를 담았다고 전해지는 전설 속의 책이다. 현재 전해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웃음과 슬픔에 대해 쓰겠다”는 대목이 있는데, 이 책에는 카타르시스를 비롯한 슬픔의 원리만 다루고 끝맺어버리기 때문에 사람들은 웃음의 원리를 담은 2권이 어딘가 존재할 것이라고 상상했다). 죽은 수도사들은 모두 시학 2권의 유일한 필사본이 장서관에 있음을 잘 알았고, 손끝에 침을 묻혀가며 몰래 책을 읽다가 호르헤가 발라놓은 독을 먹고 죽게 된다.

이 천재 기호학자의 소설은 ‘웃음’에 대한 당대의 태도를 모티프로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요즘에도 가톨릭교회가 일반인들에게 주는 이미지는 웃음기와는 거리가 있다. 성상이나 모자이크 같은 미술작품 속 이미지를 보아도 그렇다. 성당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예수상은 십자가에 달린 모습이고, 심지어 부활 이후의 모습도 심각한 표정이다.

『성자처럼 즐겨라!(Between Heaven and Mirth)』의 저자 제임스 마틴은, 우리가 때때로 하느님을 기쁨과 거리가 먼 재판관의 모습으로 이해한다고 한다. 그리스도교가 지향하는 바가 무척 심각하고, 죄에 대해 더 많이 신경을 쓰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현대의 많은 신앙인은 영성을 즐겁고 기분 좋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데,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기쁨이 생명을 주는 신앙에서 솟아나는 것이 분명하다면 도대체 왜 그 많은 종교적 자리에 기쁨이 보이지 않는 걸까? 종교인들은 왜 그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음울한 모습을 보일까? 간단히 말해서 기쁨과 유머와 웃음은 언제, 어떻게, 왜 종교에서 멀어졌을까? 저자는 이러한 질문들을 던진다. 저자는 이런 이미지와 달리 그리스도교는 기쁨의 종교라고 말한다. 예수회 사제 피에르 테이야르 드 샤르댕은 “기쁨은 하느님 현존의 가장 확실한 표징”이라고 했고, 교황 바오로 6세는 『그리스도인의 기쁨』이라는 권고를 통해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기술혁신의 사회에서 즐거움을 누릴 기회는 많아졌지만 기쁨을 만들어내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기쁨은 다른 원천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영적인 데서 옵니다.”

저자는 우리에게 『긍정의 배신』으로 잘 알려진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통찰을 빌려 교회에서 웃음이 억압된 한 이유를 이야기해준다. 그녀는 『길거리 춤: 집단적 환희의 역사(Dancing in the Streets: A History of Collective Joy)』에서 서유럽 역사에서 무아경의 종교의례, 군무, 사육제처럼 공적인 기쁨과 사적인 기쁨을 모두 표출하는, 정신적으로 고양된 집단의식을 압제자들이 어떻게 억눌렀는지를 추적해간다. 중세 시대 사육제에서 대중들은 왕이나 다른 권력자들처럼 차려입음으로써 정부나 교회의 지도자들을 조롱했는데, 이는 사회질서에 잠재적 위협이 되었다. 유머와 웃음이 전복적일 수 있기에 기득권세력은 두려움을 갖고 그것을 누를 필요가 있었다. 요즘에도 늦은 밤의 텔레비전 풍자쇼, 익살스러운 시사평론가나 블로거, 신랄한 시사만평 등은 권력자들에게 늘 위협적이다. 때로는 걱정 많은 고위층들이 그것들을 억압하기도 한다.

왜 우리는 활짝 예수의 모습을 볼 수 없을까?

수많은 예수의 모습 중에서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다. 수많은 책이나 강론, 예술 작품 등에 나오는 예수에게서도 웃음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많은 그리스도인은 예수가 유머 감각이 없다는 분이라는 편파적 이미지를 갖는다. 복음 속 예수에게는 왜 그렇게 웃음이 없을까? 저자는 신학자 에이미 질 레빈의 『유대인 예수에 대한 오해』를 통해 그 질문을 확인해본다. 레빈은 예수가 유대인이라는 배경과 삶의 특정한 면을 교회가 어떻게 오해했는가를 살펴보는데, 예수 시대의 유대교적 맥락을 이해하지 못해 예수의 말씀과 행동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예수 시대에 사람들에게 재미있었던 것이 지금 우리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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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빈은 이렇게 말한다. “성경의 비유에서 쓴 과장법은 참 놀라워요. 가령 작은 겨자씨가 싹이 터서 나무가 되고 거기에 새들이 와서 깃들인다는 생각은 무척 기발하게 들렸을 테지요.” 게다가 예수가 가르친 변함없는 주제는, 네 원수를 사랑해라, 너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라,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등의 몹시 이상하고 터무니없는 내용이어서, 처음 그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우스꽝스럽게 들렸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에 익숙해 특별히 재미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교훈적인 이야기로만 받아들인다.

사실 시대를 막론하고 유머의 가치를 모르는 훌륭한 이야기꾼은 상상할 수 없다. 예수는 아마 청중들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았고, 그의 이야기는 종종 날카롭고 자극적이었다는 것이다(얼마 전 한참 막말 이야기가 나왔을 때, 예수가 말한 ‘독사의 자식’은 그 시대로 돌아가면 엄청난 저주의 소리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예전에 읽었던 『세계선전선동사』에서 예수가 소개되어 의아했던 적이 있는데, 그 책은 예수가 어떻게 대중을 사로잡는 이야기를 했는가를 거론하면서 예수를 커뮤니케이션 역사에서도 의미심장한 인물로 평가한다. 예수는 확실히 재미있는 이야기나 재치 있는 비유, 유머러스한 여담을 통해 재빨리 청중을 사로잡아야 했을 것이다.

한편 레빈은 예수의 유머나 농담을 초대교회가 복음서에서 삭제했는지 여부는 알 길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초대교회가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은 외경에서는 예수가 웃는 장면이 여러 군데 나온다는 점을 지적한다. 게다가 초대 교회의 주요 신학자들은 이른바 이단과 싸우는 일에 치중했고, 이는 전혀 웃을 일이 아니었기에 아마도 유머라는 장르를 자신들의 시대에는 걸맞지 않은 것으로 보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또 ‘인간 예수’에게는 분명 웃음이 있었을 텐데, 신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인간과 완전히 다른 존재로 격상되면서 웃음이 사라진 것은 아닐지도 생각해보게 된다.

웃음을 잃은 성인들, 가까이하기에 너무 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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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들의 모습을 묘사한 예술작품도 예수와 마찬가지다. 전형적으로 그들은 손을 모으고 눈을 내리깐 채 시무룩한 표정을 짓거나 헛된 이 세상과는 뚝 떨어져서 경건하게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을 한다. 저자는 이를 미학적 잘못이 아니라 신학적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교회에 널리 퍼져 있는 성인들의 침울한 이미지는 우리가 성인들을 이해하는 방식과 성스러움을 이해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하느님을 이해하는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인들을 우리의 삶에서 멀리 떼어 놓으려는 유혹을 받는다. 이렇게 하면 우리가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성인들이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이들이라고 생각하면, 그들의 삶은 우리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성인들을 늘 과할 정도로 엄숙하기만 하다고 상상하면서 그들에게 우리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딱지를 붙이는데, 그것은 그들의 삶이 우리의 삶과는 거의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들이 보인 자비와 헌신은 더 이상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 되고,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그저 영적으로 특화된 사람들로만 여긴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성인을 비인간화하는 것인데, 성인들에게서 웃음을 제거해버리면서 발생하는 효과다.

하지만 저자는 성인들의 삶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도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았다는 것이다. 우리처럼 인간적 감정을 갖고 웃고 즐거워했다. 대부분 성인은 탁월한 유머감각을 갖고 있어 곧잘 자신을 웃음거리로 삼곤 했다. 저자는 종교라는 제도는 그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자기 자신을 보며 웃을 줄 알 때 비로소 유익해진다고 말한다.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모습에 웃으면서, 자신들은 스스로 되고 싶어 하는 만큼 완벽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자신들은 분명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중요하다. 이렇게 웃음은 겸손함으로 이끄는데, 그런 종교 지도자로 ‘착한 목자’ 요한 23세를 이야기한다. 요한 23세와 관련해서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그가 교황이 되기 전 상류층 인사들이 좀 무시했는데, 한번은 어느 파티에서 한 사람이 여자의 나체 사진을 보여주며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라고 묻는다. 요한 23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아이구, 사모님이신가 보군요.”

Catholic women chat near a photograph of Pope Pope John XXIII at the Metropolitan Cathedral in downtown Mexico City April 25, 2014. Pope John XXIII, who reigned from 1958 to 1963 and called the modernizing Second Vatican Council, and Pope John Paul II, who reigned for nearly 27 years before his death in 2005 and whose trips around the world made him the most visible pope in history, will be declared saints by Pope Francis at an unprecedented twin canonization on Sunday. REUTERS/Tomas Bravo (MEXICO - Tags: SOCIETY RELIGION)

Catholic women chat near a photograph of Pope Pope John XXIII at the Metropolitan Cathedral in downtown Mexico City April 25, 2014. Pope John XXIII, who reigned from 1958 to 1963 and called the modernizing Second Vatican Council, and Pope John Paul II, who reigned for nearly 27 years before his death in 2005 and whose trips around the world made him the most visible pope in history, will be declared saints by Pope Francis at an unprecedented twin canonization on Sunday. REUTERS/Tomas Bravo (MEXICO – Tags: SOCIETY RELIGION)

빛이자 소금이자 누룩인 유머, 하느님이 주신 선물

제임스 마틴은 웃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때와 장소를 가린 웃음을 거론하고, 특히 악의적 유머는 죄악이라고 못 박는다. 가령 얼마 전 한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도 문제가 되었듯이 소수자, 소외당하는 사람들, 개인의 약점을 소재로 삼은 유머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이런 악의적 유머와 달리 좋은 유머는 진실하고, 진리를 드러내고, 유익하다. 그것은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하고, 어려움을 덜어주며, 자신을 낮추도록 도와준다. 또한, 좋은 유머는 상냥하다. 상대에게 해를 끼치거나 파괴적이지 않다.

건강한 웃음이 사회나 개인에게 무척 중요할 텐데, 저자는 신앙생활과 관련해 웃음이 갖는 의미를 짚어준다. 기쁨, 유머 그리고 웃음이 건강한 영성생활에 빠질 수 없는 덕목이라는 점을 환기시키며, 이 덕목들을 통해 우리는 지상생활을 넘어서는 세상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교에서 지상의 생활을 천국을 준비하는 삶으로 여긴다면, ‘지나친 경쾌함’도 우리가 미래를 준비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천국의 어떠한 모습일지 확실히 말할 수 없지만, 자신은 천국은 기쁨, 악의 없는 유머, 그리고 넘치는 웃음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저자가 말하는 웃음의 의미에서 놓쳐서는 안 될 것은 그것이 슬픔과 정당한 분노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웃음은 그 모든 것에 정의로움마저 끌어안을 때 진정 건강한 웃음이 된다. 저자가 제안한 그런 웃음을 통한 ‘지상에서 천국을 사는 법’은 참으로 멋지지 않은가?

제임스 마틴은 자신이 예수회 출신인지라 예수회와 관련된 몇 가지 농담을 전해준다. 여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선종 후 천국에 가서 하느님을 만났다. 하느님이 말씀하셨다.

“당신이 지상에서 교황으로서의 사명을 아주 훌륭히 이행했기에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려고 하오. 지상에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보시오.”

교황이 말했다.

“네, 제가 원하는 건 분명합니다. 저는 늘 아프리카와 유럽 사이에 다리가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차로 건널 수 있는 진짜 다리 말입니다. 그러면 아프리카의 문제에 대해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고, 그곳의 문화적 풍요로움도 더 높이 사게 될 테니까요.”

하느님이 말씀하셨다.

“유럽에서 아프리카까지 다리를? 글쎄, 그 다리가 얼마나 길어야 할지, 바람과 기후를 고려해서 튼튼하게 지으려면 얼마나 철강이 많이 필요할지를 생각해본다면 그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소. 미안하군. 다른 소원은 없으시오?”

교황은 하느님조차 그 일이 어렵다고 하시는 데 놀라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제가 교황일 때 예수회원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리하느라 너무나도 골치가 아팠지요. 그들은 늘 뭔가 놀라운 일 아니면 예측 못 할 일을 벌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소화불량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두 번째 소원으로, 예수회원을 좀 더 …… 다루기 쉽게 만들어줄 수는 없으신지요?

하느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씀하셨다.

“아까 말한 다리는 몇 차선으로 만들면 좋겠소? 이 차선? 아니면 사 차선?”

 

A man wears a flag depicting Pope John Paul II outside St. Peter's Square at the Vatican, Saturday, April 26, 2014. Pilgrims and faithful are gathering in Rome to attend Sunday's ceremony at the Vatican where Pope Francis will elevate in a solemn ceremony John XXIII and John Paul II to sainthood. (AP Photo/Vadim Ghirda)

A man wears a flag depicting Pope John Paul II outside St. Peter’s Square at the Vatican, Saturday, April 26, 2014. Pilgrims and faithful are gathering in Rome to attend Sunday’s ceremony at the Vatican where Pope Francis will elevate in a solemn ceremony John XXIII and John Paul II to sainthood. (AP Photo/Vadim Ghirda)


 

김지환, <가톨릭평론> 편집위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장, 출판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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