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신연의 시대 읽기 – 잊혀 가는 기억을 회복할 수 있다면….

조희정

잊혀 가는 기억을 회복할 수 있다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에서의 순례 여정 (apostolic journey)을 “기억,” “희망,” “증거”라는 세 단어로 요약하였다. 이 단어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과거에 대한 기억을 통해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고, 증거와 표징은 앞으로의 삶 속에서 희망을 계속해서 기억해 나가도록 도움을 준다. 나는 그 중에서 기억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기억”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미사 속에서도 기억은 크게 자리 잡는다. 미사통상문 중 예수님께서 직접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라고 말씀 하신 구절을 비추어 보아 그리스도교인들은 교회의 이천년의 역사 속에서 예수님의 업적과 사랑을 잊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억의 본질적인 내용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 녹아 있는 예수님과 그분의 사랑일 것이다. 미사에서의 기억은 단순한 과거의 회상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현재화 (anamnesis)된 기억이다. 미사를 통해 기억되는 예수님의 사랑은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인간의 인식적인 작용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심리적 분석 (psychological analysis)을 제시 하였는데 그중의 하나는 기억 (memoria), 지성 (intellectus), 의지 및 바람 (voluntas) 이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하느님에 대한 지식은 우리가 전혀 모르고 있다가 어느 날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잊혔지만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던 천상의 지식을 다시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추해 보건대 인간의 신성함에 대한 천상의 지식은 항상 우리 안에 함께 있었다. 단지 망각했을 뿐이다. 삶속에서 알 수 있듯 망각은 기억하는 것 보다 훨씬 강력하며 언제나 확고부동하게 현재 진행형으로 진행 중인 현상이다. 인간의 특성이 유한적인 몸과 마음으로 무한한 천상의 지식을 꿈꾸는 것이듯, 인간의 마음은 천상의 것을 염원하는 바람과 대비하여 망각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실로 강력한 망각의 힘을 거슬러 적극적으로 기억하려고 하는데 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하물며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기 위해서도 매일 미사를 봉헌하고 있지 않은가! 이처럼 망각의 영역은 실로 넓고 강력하다 할 수 있겠다. 멀리 볼 것도 없이 몇 개월 전 세월호 참사를 보아도 알 수 있다. 불과 몇 개월 전의 참사가 “잊지 않겠습니다.” 라는 슬로건이 무색해 지도록 세월호 특별법을 위한 움직임들도 어느새 하나 둘씩 시들해지고 조금씩 잊혀 가는 것이 씁쓸한 현실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토록 강력한 망각의 영역에서 어떻게 그리스도교 인들은 인간적인 망각의 한계를 다소 극복하고 이천 여 년 동안 명맥을 유지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해 올 수 있었을까? 그것은 교인들의 적극적인 노력과 더불어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주창 되었듯 성령은 교회의 전통을 유지시키고 후세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온전히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성령의 역할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삼위일체 비유 중 기억 (memoria)은 지성 (intellectus)과 더불어 인간의 의지 및 바람 (voluntas)을 통해 회복되는데 이 인간의 바람을 가능하게 도와주는 조력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이다. 나아가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성령의 역할을 세분화하여 성화의 은총 (sanctifying grace)과 자비의 습관 (habit of charity)으로 나눈다. 성화의 은총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사랑의 은사로 우리가 성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이고, 자비의 습관은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사랑에 실질적으로 보답 할 수 있는 마음과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에 보답하려는 마음은 자비로움을 기억하는 습관 (habit of charity)을 형성하여 망각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힘 있는 도구가 되어준다. 즉, 하느님께서 육화하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심과 더불어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예수님께 응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조력자이신 성령도 함께 보내 주신 것인데, 조력자이신 성령은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상태가 될 수 있도록 준비를 시켜 주시고, 나아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계속하여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성령의 도우심을 잘 살펴보면, 하느님께서 일방적으로 사랑을 주신다기 보다는 우리 인간과 사랑을 주고받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문서에서도 하느님의 계시 (revelation) 를 일방적인 사랑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쌍방향적인 소통으로 정의하였다. 이러한 쌍방향 간의 진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의사소통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에서도 나타나지만 현 사회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해미 성지에서 아시아 추기경들과의 만남에서 진정한 대화와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교황의 말에 따르면 대화가 진정한 의미의 의사소통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서로의 입장을 받아들이는 태도 및 깊은 공감 (empathy)이 중요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이 공감하고 또 공감을 받는 것이 얼마큼 자행되고 있을까? 현대 사회의 공감부재는 의외로 우리의 주변에서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숱한 SNS 메시지들은 공감을 권장하기보다는 이질감을 불러일으키며 개개인이 얼마나 타인과 차별화된 특별함을 갈망하는지를 보여주고 있고,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을 실은 뉴스들은 공감이 결여된 이 사회의 병폐를 여실히 보여준다. 또한,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의 고통 앞에서 함께 공감하고 아파하는 모습이 결여된 듯한 몇몇 지도층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병든 모습을 슬프게도 적나라하게 비춰 준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이 언급하였듯 인간의 연대감 (solidarity)을 이해한다면 타인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며 점차 흐릿해 지는 세월호 참사의 기억 속에서 함께 잊히는 것은 단지 하나의 사고의 기억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참사의 기억과 함께 잊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연대감, 타인의 고통에 반응 하고 공감하는 능력 등 인간의 신성함에 대한 천상의 기억이다. 참사의 기억과 함께 인간의 신성함에 대한 소중한 기억이 다시 한 번 망각의 짙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잊어버리게 되는 것 중에 소중하고 절실한 무언가가 함께 잊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무심결에 지나침으로 인해 인간의 신성함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이 하나의 습관으로 자리 잡아 모르는 새 이미 많은 소중한 기억이 잊혀 버렸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간의 신성함과 공감 능력, 그리고 타인을 받아들이는 마음에 대한 기억을 다시금 회복해야 할 때는 바로 지금이다. 망각의 강력한 힘을 거슬러 이미 지니고 있는 성스러움을 기억해 내야 하는 시간이 온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너무도 쉽게 잊혀 가는 본질적이고 소중한 것들을 다시 한 번 기억에 떠 올려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세월호 참사를 잊어가는 과정 속에 함께 잊히는 우리 마음속 한구석에 자리한 오래된 신성함을 기억해 내는 것이 얼마나 간절한 것일까 생각한다.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사랑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응답하는 과정 속에 실천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도움을 통해 인간의 신성함에 대한 기억을 회복하고 그 기억을 유지해 나가는 자비의 습관을 형성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자리에서의 사랑과 자비의 현존은 바로 하느님의 현존이요, 그리스도인의 참된 기억이다.

조희정 캐나다 토론토 리지스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과정 중에 있다. 책속에 머무는 지식을 쌓기보다 삶속에서 살아내기 위한 공부를 위해 노력 중이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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