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한 저항(Protest)인가? –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기도주간을 맞으며

박재형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실장)

‘저항’으로 기억될 2017년

‘저항’, 2017년 한국사회와 교회를 가장 뜨겁게 달군 화두가 아닐까 한다. 한편으로는 “이명박-박근혜 정부”로 대표되는 이른바 ‘적폐세력’에 대한 정치사회적 ‘저항’이, 다른 한편으로는 이른바 ‘종교개혁 500주년’의 모토로 진행되었던 ‘개신교(Protestant)’ 정신에 대한 종교적-역사적 성찰이 바로 그것이다. 적어도 외적으로 볼 때, 이러한 ‘저항’을 모토로 한국사회와 교회는 ‘일치’를 이룬 것처럼 보였다.

2017년은 ‘촛불혁명’의 해로 한국 역사에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2016년 10월 29일부터 시작되어 2017년 4월 29일까지 진행된 총 23차의 촛불집회에 무려 1,600만여 명의 시민이 모여 한목소리로 정치적 부조리에 저항했다. 이는 ‘촛불혁명’이라 명명되어 세계사에 유례없는 평화적 시민 저항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물론 일부 반대 진영의 저항도 있었지만, 적폐청산을 향한 국민 대다수의 열망과 의지는 꺾을 수 없었다. 이는 촛불정신을 계승하겠노라고 자청하는 새 정부에 대한 전 국민적 기대를 드러내주는 지표인 60~70%대의 높은 국정 지지율이 정부 출범 10개월 가까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지속되는 사실을 통해 입증된다. 따라서 대다수 국민은 적어도 정치, 사회, 경제적 정의 실현이 가장 시급하고 본질적인 과제임을 공감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뜻을 함께 모으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동시에 2017년은 개신교 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진 루터의 종교개혁이 50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기도 했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한 젊은 사제이며 신학자인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대학교의 교회 정문에 붙인 95개조 반박문을 시작으로 유럽 전역에 개혁의 바람이 불어닥쳤다. ‘종교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러한 변화의 움직임은 단순히 종교적 영역 또는 하나의 기관으로서 교회에 대한 개혁에 국한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는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서양 전체의 역사와 사회적 상황을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간 세계사적 사건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당시 유럽은 교회가 곧 사회이며, 교회의 진리가 곧 세계의 진리였기 때문이다.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내부적 부조리와 비리, 그리고 몇 가지 교리에 대한 신학적 문제제기로 출발한 루터의 저항은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교회와 교리를 중심으로 형성된 유럽 중세 사회 전반에 대한 저항으로 확대되었다. ‘프로테스탄트(Protestant)’가 의미하는 ‘저항자’는 새롭게 출발한 개신교를 상징하는 명칭으로 통용되었고, 그 정체성에 상응하여 그리스도의 정신에 위배되는 모든 구조와 권력에 대항하고 그 정신에 비추어 자신을 끊임없이 개혁하는 ‘개혁교회’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했다.

‘저항’이 사라진 한국 개신교의 민낯

이러한 종교개혁의 정신을 계승·발전하자는 명목으로, 한국 개신교 진영은 2107년 한 해 동안 대대적으로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했다. 다양한 기념행사와 학술행사 등을 통해서 종교개혁자들이 추구했던 기독교 신앙의 본질 회복과 신학적 성찰을 한국 개신교 공동의 현재 과제로 상정하고 이를 통해 교회를 갱신하고 교회의 본모습을 회복하자며 한목소리를 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이른바 ‘개독교’라 불리는 개신교의 내부 부조리와 구조적 모순을 타파함으로써, 내적 개혁을 성취하기 위해 교회와 성직자들이 먼저 회개하자며 온갖 미사여구와 퍼포먼스를 통해 자신들의 의지를 세상에 천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상은 어떠한가? 겉으로는 자기 성찰과 회개, 그리고 내적 갱신을 부르짖으면서도, 여전히 그 중심에는 기득권 유지를 위한 자기중심적 합리화와 이를 통한 자기방어에 급급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가! 성범죄, 헌금횡령 및 유용, 성직세습, 성직권력의 남용 등 이미 한국사회 속에서 회자된 무수히 많은 개신교 목회자들의 비윤리적 행위와 범죄에 대해 그들 스스로 대처하는 방식은 자성과 갱신이라는 말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그들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외피삼아 이토록 열광적으로 ‘교회의 개혁’과 ‘신앙의 일치’를 외쳐대는 것은 어쩌면 그만큼 숨기고 싶은 폐부가 많다는 것을 반증하는지도 모른다. 결국 ‘종교개혁 500주년’은 그저 ‘기념’으로 끝나버리고 만 셈이다.

실제로 한국 개신교의 수많은 교단과 교회가 저마다 한목소리로 ‘종교개혁 500주년’을 내세우던 2017년, 역사적으로 가장 타락했다고 평가받던 중세의 교회보다도 더 타락한 한국 개신교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말았다. 대형교회들의 세습과 더불어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저들의 저속한 행위는 이미 세속의 법적, 윤리적 기준에도 훨씬 못 미치고, 그저 조롱과 냉소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그 폐부를 가리기 위해 그들이 선택한 방식은 결국 외부의 적을 만들어 자신들에게 쏠린 이목을 돌리는 것이었다.

대부분 개신교 교단이 102회 총회를 맞이하며 보였던 행태는 이러한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일부 소수 교단을 제외한 대부분 개신교 교단 총회의 안건 내용을 살펴볼 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이단 규정’에 관한 것이다. 장로교 교단 중 가장 규모가 크고 대표적인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이하 통합)과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이하 합동), 그리고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이하 고신) 등은 성소수자 인권을 위해 연대하는 타교단의 한 목회자를 일방적으로 이단으로 규정하는 결정을 내렸으며, ‘가톨릭교회를 이단으로 지정하자’는 헌의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심지어 장로교 교단 중 가장 중립적이라 평가받는 통합마저도 총회에서 ‘가톨릭을 이교로 지정해 달라’는 의견이 공공연히 등장했으며, 심지어 ‘요가와 마술 행위에 대한 이단 규정’에 대한 헌의안이 제출되어 세간의 비웃음을 사고 말았다.

참된 종교개혁의 정신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종교개혁’은 기존의 폐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종교 체제와 권력에 맞서는 저항운동이었다. 동시에 이는 타락한 교회 권력에 의해 왜곡된 그리스도의 정신을 되찾고 실천하는 참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이 땅에 실현하고자 하는 ‘신앙, 신학, 실천’운동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저항운동을 통해 종교개혁자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그리스도의 정신은 바로 이웃으로서 함께 존재하는 약자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연민, 그리고 관용과 포용의 정신이다. 따라서 참된 그리스도의 정신은 이러한 이웃에 대한 그리스도적 사랑을 기반으로 하여 피조세계의 모든 생명에 대한 존엄과 정의로운 평등, 그리고 평화로운 공존의 가치를 이 땅에 실현하고자 하는 창조주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교회의 응답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르는 그의 몸 된 공동체로서 교회는 언제나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일 수밖에 없으며, 교회에 대한 이러한 고백은 모든 자매, 형제 그리스도교회가 공동으로 계승하고 추구해야 하는 가치를 담은 것이다.(아우스부르크 신앙고백 제7항;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헌장 제8항 참조)

이렇듯 ‘하나’의 교회를 향한 고백은 단순히 조직이나 기관으로서 일치를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강조되는 교회의 일치성(오이쿠메네, οἰκουμένη)은 각 교회가 처한 상황과 위치에 따라 발생하는 다름과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이며 획일적인 통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의 정신과 그 가치를 중심으로 일치된 신앙을 고백하고 실천하는 것(코이노니아, κοινωνία)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일치성은 결국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의 정신과 가치를 실천함으로써 얻어지는 구별된 거룩함과 그 거룩함을 통해 드러나는 모든 피조세계에 대한 섬김과 봉사의 공동체(디아코니아, διακονία)로서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의 삶을 몸소 살고자 했던 사도들의 전통을 계승하고 보냄을 받은, 세상을 향한 공동체(아포스텔로이, ἀπόστολοι)가 되어야 한다는 하느님과 세상의 요청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이는 결국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세계에 대한 교회의 역할과 그 수행이 곧, 교회의 정체성을 결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교회가 어떠한 곳이며, 어디에 서 있는가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교는 저항의 종교다. 거대 제국 이집트의 노예였던 히브리인(하삐루)들이 야훼를 만남으로써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되찾기 위해 저항한 출애굽 사건과, 역시 노예의 삶을 살아가던 가나안 거주민과 동맹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모두가 평등한 신정국가를 형성하고자 했던 가나안 이주사건을 그 출발점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군주 제도와 나그네, 과부, 노예로 상징되는 사회적 약자를 양산하는 정치, 종교 제도 대한 저항을 실천한 예언자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 또한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이다. 억압과 차별의 땅 갈릴래아 나자렛의 한 청년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그의 가르침과 삶을 따르고, 그가 행한 해방과 구원의 사건에 동참하겠노라 고백하고 선언한 공동체가 바로 그리스도교다. 억압이 있는 곳에 자유와 해방을, 차별이 있는 곳에 평등과 정의를, 죽임과 혐오가 있는 곳에 포용과 사랑을 선포하고 실천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본질이며, 그 교회의 사명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하나 됨은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정체성을 공유하고 그 사명을 실천함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다.

세상의 불의에 저항하는 그리스도인의 일치

2018년 새해를 맞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온갖 차별과 억압, 그리고 혐오로 가득 차 있다.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권력자가 피지배자를, 남성이 여성을, 그리고 이른바 ‘정상’이라고 스스로 규정하는 자가 ‘비정상’이라고 규정되는 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며, 차별과 혐오로 소외시키는 이 세계. 이 가운데 교회는 약자의 편에서 강자에게 저항하고 대항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가치를 실현해야 한다. 하지만 교회는 세상에 대한 자신의 본질적 사명은 뒤로한 채, 자신의 권력과 재산을 수호하기 위해 세상과 손잡고 억압과 차별, 그리고 혐오의 첨병이 되고 말았다. 심지어 과거의 분열과 반목의 사슬을 끊고 평화와 일치를 추구해야 하지만, 자신의 폐부를 가리고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타자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자신을 스스로 하느님의 자리에 올려놓는 우를 범하였다. 이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해야 할 교회가 앞장서서 이 세상을 맘몬과 사탄의 왕국으로 오염시켰다는 현실 말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한다는 한국 개신교가 보이는 이러한 행태는 종교개혁의 정신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신 자체를 부정하는 진정한 ‘이교적’ 행위임을 깨달아야 한다. 타락한 종교권력과 왜곡된 교리에 맞서, 참 구원과 해방의 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해 저항했던 종교개혁의 정신과 신앙고백을 계승한다고 하는 개신교가 타자를 ‘이단’이라, ‘비정상’이라 정죄하는 모습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머리로부터 떼어내, 스스로 머리가 되려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2018년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기도주간’을 맞이하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기도하고 실천해야 할 것은 단순한 외적 일치가 아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악한 권력과 그것이 양산하는 억압과 차별, 그리고 혐오의 구조에 대해 저항함으로써, 그리고 성령 안에서 창조주 하느님의 선한 의지와 그리스도의 섬김, 봉사, 사랑의 행위에 동참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으로 일치를 이뤄내야 한다. 타자에 대한 저항이나 약자에 대한 혐오가 아닌, 그리스도 정신에 어긋나는 모든 권력과 체제에 대한 저항이 진정한 그리스도교의 일치된 정체성이며, 이것을 회복해야만 진정한 일치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진정 무엇을 통한 일치이며, 무엇을 향한 저항인가를 우리 스스로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일치는 저항함을 통해 얻어지는 그리스도의 선물이다. 그리고 그 저항은 결국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한, 그를 우리의 하느님으로 고백하기 위한 저항이다. 이것이 바로 이 땅의 모든 자매, 형제 교회들이 함께 고백하는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한다.

 

주여,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닮아가게 하시고, 이를 통해 우리를 참으로 하나 되게 하소서! 아멘


 

박재형. 한신대학교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뮌헨대학교 개신교 신학부에서 조직신학 분야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신대학교, 감신대학교, 협성대학교 외래교수를 역임하였고, 현재는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실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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