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공기는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 데이비드 하비, 한상연 옮김, 『반란의 도시』(에이도스, 2014)

고윤수(대전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

도시에 살다

“도시의 공기는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이 멋진 말은 서양 중세도시에서 유래했다. 봉건 영주의 장원을 탈출한 농노가 도시로 숨어들어 잡히지 않고 1년하고 하루만 더 버티면 그는 자유민의 신분을 얻었다. 유럽과 미국에는 아직도 이런 관습법적인 전통이 남아 있어, 불법체류자라 해도 추방되지 않고 일정 기간 그 나라에 거주하면 정식 취업비자나 영주권을 받을 수 있는 길들을 만들어놓았다. 오늘날 도시는 온갖 범죄와 환경오염 같은 사회문제의 온상처럼 인식되지만, 유사 이래 도시는 이처럼 자유와 기회, 그리고 가능성의 공간이었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 국토의 16.6%가 도시지역이고, 거기에 인구의 약 91.8%가 산다. 실제 나 역시 도시에서 태어났고 도시에서 자랐으며, 아마 도시에서 죽을 가능성이 크다. 내 주변의 몇몇은 귀촌을 계획하지만, 나는 절대 그럴 계획이 없다. 나는 도시의 문화와 공간적 질서 그리고 이곳에서 만나는 타인들의 정다운 무관심이 좋다. 얼마 전 오래된 동네의 좁을 골목을 걷다 1960년대식 작은 단층주택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웠다. 오래된 것들이 주는 편안함과 안정감, 주변을 압도하지 않는 겸손함. 자연의 풍광 또한 아름답지만, 일상에서 만나는 도시의 소소한 풍경 또한 아름답다.

그러나 이런 도시의 아름다움은 현재 곳곳에서 퇴각 중이다. 주거환경개선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옛 마을들이 뜯겨 나가고 여기저기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선다. 상점들은 임대수입을 늘리기 위해 커다랗게 지어진 건물 안에 조각조각 입주해 있다. 광장이나 공원은 토지 효율성이 낮다는 이유로 사라지고 있다. 새로 지어진 아파트 단지 내 공원들은 언뜻 좋아 보이지만, 왠지 햄스터 놀이터 같은 느낌이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도시라는 이 일상의 공간은 어느새 이처럼 그 고유의 아름다움과 활기, 정신적 가치를 잃어버린 채 거대자본의 압도적 스케일로 채워지고 있다.

자본의 도시와 인간소외

%ec%b1%85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의 『반란의 도시(Rebel Cities)』(2012)는 현재 우리가 사는 도시가 왜 이렇게 변했으며, 그 문제는 무엇인지 그리고 이것을 어떻게 방어할지 말해주는 책이다. 하비는 마르크스주의자다. 자본주의의 생성과 소멸에 천착했던 마르크스의 관심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가 ‘공간’에 전혀 무관심했던 건 아니어서 이 문제는 『도시에 대한 권리』(1967) 등을 쓴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를 거쳐 하비에 이르러 분명한 이론적 성취를 거둔다. 하비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간명하다.

도시는 본래 잉여생산물이 사회, 지리적으로 집적되는 과정에서 생성된 것이고 자본은 계속해서 잉여를 증식하기 위해 도시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관철하려 한다. 하지만 도시의 주인인 인간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도시에 대한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 (28쪽 등 발췌요약)

도시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위기에 처했다. 하비의 지적처럼 “자본이 사회적, 환경적, 정치적으로 어떤 결과가 나오든 신경 쓰지 않고 끊임없이 도시의 성장을 밀어붙이는 사이, 도시와 인간은 과잉축적을 처리하는 욕망의 희생물이 되어버렸다.”(18쪽) 서울사람들 중 상당수가 서울에 살지 못하고 일산이나 분당 등 서울 바깥 지역에 거주한다. 그들은 하루 평균 왕복 2시간 이상을 쓰면서 출퇴근을 한다. 서울의 높은 지가를 감당할 수 없어 바깥으로 쫓겨나 살며, 매일같이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다시 그곳으로 향하는 긴긴 행렬에 동참한다. 이것은 정상이 아니다. 도심 안은 어떤가. 고층 빌딩과 아파트로 가득 찬 도시는 독점자본의 상품전시장으로 바뀐 지 오래고, 그 속엔 드문드문 고궁 같은 문화재들만이 천연기념물처럼 밭은 숨을 쉴 뿐이다.

물론 이러한 도시의 비주얼과 생산성이 싫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 안에서 많은 사람이 소외를 겪는다는 사실이다. 가끔 서울의 유명 사립대학들을 가볼 때가 있는데, 약간의 과장이 허락된다면 대학이 마치 호텔처럼 느껴진다. 유명 건축가가 설계한 도서관이나 학생회관, 기업의 후원을 받은 누구누구의 기념관 등. 그것이 나쁘다고 할 순 없지만, 학생들은 비싼 등록금과 취업난에 허덕이는데 그들이 생활하는 공간이 너무 훌륭한 건 뭔가 불편하다.

캠퍼스 밖도 마찬가지다. 고맙게도 요즘은 커피 한 잔을 시키면 완벽한 냉난방이 되는, 인테리어까지 멋진 카페에 앉아 무료 와이파이를 즐기며 몇 시간을 머물 수 있다. 하지만 그곳을 나오면 다시 고시원이나 원룸으로 돌아가야 한다. 요컨대 우리의 삶은 점점 궁핍하고 불안한 처지로 내몰리는데, 우리를 둘러싼 물질적 환경은 갈수록 근사해진다. 그리고 그 근사함은 우리의 능력으론 좀처럼 따라잡기 힘든 수준이어서, 그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이 사회적 무기력과 우울을 불러온다.

자본주의의 신성한 가치법칙, 소유권

오늘날 우리는 이 도시의 주인이 아니라 도시가 만들어낸 거대한 상품을 소비하는 소비자이거나, 지대(사용료)를 지급하는 임차인으로 존재할 뿐이다. 이것은 윤리적이지 않을뿐더러 자본주의가 그토록 자신하는 공정함과도 거리가 멀다. 몇 년 전 가수 싸이 소유의 건물로 유명해진 카페 ‘테이크아웃 드로잉’ 사건을 예로 들어보자. 이 사건으로 인해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는 말이 더 널리 알려졌다. 일반적으로 이 단어는 낙후된(경제학의 용어를 빌리자면 생산성이 낮은) 지역에 가난한 예술가와 소자본의 상인들이 들어가 그들의 창조적 활동이 지역을 활성화하면, 지대가 높아져 결국 그들이 그곳에서 쫓겨나는 현상을 말한다. 사람의 노동이 공간의 생산성을 높인 것이지, 자본(건물주)은 아무것도 한 게 없다. 그럼에도 이익은 자본이 취하고 노동은 퇴출당해야 하는 상황은 절대 공정하지 않다.

하지만 당시 의외로 많은 사람이 노동이 아닌 자본에 편에서 공정함을 이야기했다. 심지어는 떠나길 거부하는 카페 쪽에 ‘슈퍼 을질’이라는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가 얼마나 소유권을 유일한 권리이자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기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하비의 말처럼 분명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사적 소유권과 이윤 원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그 어떤 권리 개념보다 우위에 놓이게 되어 있다.”(25쪽) 하지만 그는 다시 강한 어조로 말한다.

 

(젠트리피케이션처럼―필자) 생산에서 계급관계를 철폐하려면 …… 자본주의적 가치법칙의 힘부터 철폐해야 한다. …… 또 세계시장 전반에 작용하는 자본주의적 가치법칙을 대신하는 정치적, 사회적 대안을 찾아내야 한다. (213쪽)

 

지난 1월 20일은 용산참사 9주기였다. 하비의 관점에 보면 용산참사는 자본이 자기 증식을 위해 강제적으로 도시 내부를 변형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우린 그걸 재개발이라고 불렀고, 5명이 사망한 그날의 남일당 건물터에는 현재 한 대기업이 수주한 초고층의 빌딩과 아파트 건축공사가 한창이다. 용산참사를 경험한 우리는 재개발의 폭력성을 깨달았지만, 여전히 그것이 갖는 본질적 문제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서울시가 ‘동절기 강제철거금지’를 추진하지만, 부작용을 최소화하겠다는 의지일 뿐 재개발 자체에 대한 비판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유권의 행사는 어쩔 수 없다는 ‘자본의 절대적 가치법칙’을 대신하는 정치·사회적 대안을 찾는 노력은 제대로 시작조차 못 하고 있다. 하비는 싱가포르 같은 도시에서도 “오랜 세월 무자비한 방법을 동원해 성공리에 독점지대를 만들고 영유했지만, 독점지대에서 얻은 이익을 주택, 의료, 교육을 통해 광범위하게 재분배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타협적 논의조차 전무하다시피 하다.

자본의 모순과 도시에 대한 권리를 둘러싼 투쟁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지양’하고자 했지만 그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던 것처럼, 하비도 개발(생산) 자체를 악으로 규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가 자본의 도시 재편과정에 종종 “창조적 파괴”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비가 지적하는 것은 “자본은 자동적으로 가치를 증식할 수 있다”는 어리석은 물신적 신념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제2장 「자본주의 위기의 진원지, 도시」에서 그는 자본의 무한한 증식이 왜 불가능한지, 일정 수위를 넘어서면 자기모순에 의해 붕괴될 수밖에 없는 자본증식의 메커니즘을 공학적으로 그리고 여러 구체적 사례를 들어 증명한다.

문제는 반복되는 말이지만, 도시는 태생적으로 바로 그 메커니즘 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도시의 재편과정이 언제나 계급적 성격을 띠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극심한 고통을 받게 되는 게 가난한 사람들,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정치권력에서 소외된 사람들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46쪽) 2007년의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대출 사태가 보여주듯 수많은 사람이 파산하고 추정 피해액만 약 1,000억 달러(91조 7,000억 원)가 발생했음에도, 놀랍게도 이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할 그 누구도 감옥에 가거나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하비는 그것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만약 금융회사가 가치 실현에 실패한 부동산 개발업자의 파산을 선택할지, 아니면 주택 구입자의 파산과 압류를 선택할지를 놓고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부닥쳤다고 해보자. 어느 쪽으로 기울 것인지는 불 보듯 빤하다.”(93쪽) 실제 당시 상황은 더 최악이어서 금융회사들까지 파산하자 미국 정부는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해 그들을 살려냈다.

자본은 이렇게 이익은 사유화하고 피해는 사회화하며 사람은 물론 자신이 증식하는 도시까지 황폐화시킨다. 도시가 하나의 상품이라면, 높은 상품성(달리 말하면 독점지대)을 유지하려면 다른 상품과 대체불가한 “독특함과 특수함, 진성성과 특별함”이 필요하다. 하비는 그것을 “집합적 상징자본”이라고 부르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자본은 시장의 모순에 빠져 스스로 이 집합적 상징성을 약화하는 쪽으로 움직인다. 하비는 바르셀로나의 예를 들어 이렇게 설명한다.

 

다국적 상품화의 물결에 휩싸이자 바르셀로나만이 가지고 있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은 약해지고 있다. …… 극심한 교통체증 때문에 구시가지 곳곳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건설하라는 압력이 높아지고, 다국적기업이 운영하는 대형점포가 지역 토박이 상점 자리에 들어서며, 도시의 중산계급화 탓에 오래전부터 살던 주민은 쫓겨나고 유구한 역사적 건물은 철거되고 있다. 결국 오늘날 바르셀로나는 기존의 탁월성 중 일부를 잃어버리고 있다. 게다가 천박한 디즈니화 징후조차 엿보인다(186쪽).

 

반면 도시의 사용자들인 시민은 도시의 독점지대를 유지하는 집합적 상징자본들을 보유하고 그것을 계속 생산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하비는 “대중을 동원해 새로운 도시 공유재를 생산하는 것, 집합적 상징자본을 축적하는 것, 집단적 기억과 신화를 동원하는 것, 특수한 문화적 전통에 호소하는 것, 이런 것은 좌우를 막론하고 모든 형태의 정치적 행동에서 중요한 측면을 이룬다”(188쪽)고 말하며, 그것을 근거로 자본이 아니라 도시의 사용자 즉 시민들에게 도시에 대한 권리를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결국 “반자본주의 투쟁을 통해 도시를 되찾자”는 그의 케치플레이즈는 생존을 위한 계급투쟁인 동시에, 자본주의가 스스로 초래한 위기, 그리고 그 위기의 진원지인 도시를 구원해 내자는 호소다.

이 지점에서 하비는 불안정하다는 뜻의 ‘프리케리어스(precarious)’와 프롤레타리아트가 합쳐진 ‘프리케리아트(precariat)’라는 새로운 반자본주의 투쟁의 주체를 설정한다. 과거 사회주의혁명의 주체가 공장노동자들이었던 반면 프리케리아트는 “파편화되고 분열적이며 목적과 요구가 다양한, 또 한 곳에 정착해 있기보다는 일자리를 찾아 떠돌아다니는 조직화 수준이 매우 낮은”(15쪽) 우리가 주변의 평범한 도시 노동자들이다. 하비는 이들 프리캐리아트 즉 “도시를 건설하고 유지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만든 모든 것에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깨달을 때, 또한 그들이 마음속 열망에 따라 이 도시를 건설한 천부적 권리도 얼마든지 외칠 수 있다고 깨달을 때, 우리는 의미 있는 도시정치를 실현할 것이다”(19쪽)라는 강한 희망을 피력한다.

 

도시에 대한 권리, 나는 어떤 도시에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프리케리아트가 쟁취해야 하는 도시에 대한 권리, 즉 ‘도시권’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비의 여러 복잡한 개념 중 도시권은 가장 매력적인 것 중 하나인데, 그는 유명한 도시사회학자 로버트 파크(Robert Park)의 말을 받아 그것을 이렇게 정의한다.

 

파크의 말이 옳다면 우리가 어떤 도시를 원하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려고 하는가,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가, 자연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가, 어떤 생활양식을 원하는가, 어떤 미학적 가치관을 품고 있는가 등의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렇게 볼 때 도시권은 도시가 실현하는 여러 자원에 개인이나 집단이 접근할 권리를 넘어선다. 도시권은 도시를 우리의 마음속 바람에 가깝게 바꿔나가고 재창조할 권리인 것이다. (26쪽)

 

하비의 도시권에 대한 이 정의는 단순한 매력을 넘어 어떤 벅찬 설렘을 선사한다. 그는 또 이것을 뒷받침하는 다른 개념들은 물론 실천을 위한 일종의 행동강령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이를테면 도시권만큼이나 중요한 ‘공유재’ 개념과 그것을 어떻게 자본이 아닌 도시의 실질적인 사용자들인 시민들이 소유하고 자신들의 관리하에 둘 수 있는지 다양한 거버넌스 체제 등을 예시로 설명한다. 하지만 여전히 반자본주의 투쟁을 통해 우리가 우리 자신과 이 도시를 구원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결국 우리 스스로 가장 핵심이 되는 도시권을 어떻게 전유하느냐에 달려 있다.

많은 프리케리아트가 자신의 노동에 대한 보상으로 혹은 인생의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먼 이국의 도시들로 여행을 떠나곤 한다. 주로 집합적 상징자본으로 독점지대가 확립된 파리나 로마, 바르셀로나 아니면 그보다는 작지만 매력과 여유가 넘치는 유럽의 소도시가 그 대상이 된다. 사람들은 적지 않은 돈을 써가며 며칠, 길게는 일주일 정도를 그곳에 머물다 다시 자신들이 사는 삭막한 자본의 도시로 돌아온다. 그들에게 우리도 그런 오래된 건축물과 좁지만 잘 정비된 가로망, 휴먼 스케일의 경관을 가진 도시들을 만들자고 말하면 어떨까. 아마 대부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그런 도시는 그냥 가끔 방문해 사진을 찍어 페이스북이나 블로그에 올리는 소비의 대상일 뿐, 매일 같이 문을 열고 나가 즐기는 ‘향유’의 대상은 아니다. 지금 이 도시의 많은 사람이 대기업이 지은 고층의 브랜드 아파트와 대형마트,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교통이 갖춰진, 자본이 설계한 미끈하고 소비성 강한 도시를 원한다.

“보수적인 부모는 평안한 얼굴로 아이를 경쟁에 몰아넣고, 진보적인 부모는 불편한 얼굴로 아이를 경쟁에 몰아넣는다.” 칼럼니스트 김규항의 말이다. 한국사회에서 진보와 보수를 불문하고 하나의 단일대오를 형성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교육과 부동산이다. 박근혜 탄핵을 위해 촛불을 들었던 이른바 민주시민을 자처했던 이들 중에도 많은 사람이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보유세 도입이나 재건축 초과이익환수제에 반대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정부가 규제하는 이른바 ‘갭(gap)투자’나 수시로 아파트를 갈아타며 재산을 증식하는 일에 별다른 거리낌이 없다. 다들 그렇게 하고, 한국사회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는 돈을 벌 방법이 거의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가끔은 과시라고 느껴질 만큼 목소리를 높였던 그들의 정치적 신념과 종교적 윤리의식이 거기에 아무런 제동을 걸지 않는 것은 분명 냉정히 생각해볼 문제다.

하비의 말처럼 우리가 되찾아야 할 도시권이 “도시를 우리 마음속의 바람에 가깝게 바꿔나가고 재창조할 권리”라면, 정작 우리가 그 권리를 쟁취했을 때 우리 마음속의 바람이 우리가 그토록 혐오해 마지않았던 자본과 같은 것이라면 얼마나 절망적인가. 앞서 말한 오래된 동네에서 발견한 한 작은집을 보고, 그 좁고 긴 골목을 걸어 나오며 문득 나는 생각했다. “죽어 천국에 간다 해도, 그곳이 이곳보다 더 아름다울 거 같진 않다. 하느님이 이 세계를 창조할 때, 부러 천국보다 못하게 만들었을 리 없다.” 하비는 도시야말로 혁명의 인큐베이터라고 했다. 그러니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스스로에 물어봐야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사람과 자연, 이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가. 나의 눈에는 무엇이 아름다운가. 그것은 ‘나는 어떤 도시에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인 동시에, 그리스도인이라면 ‘나에게 천국은 어떤 곳인가’라는 물음일 것이다. 우리가 꿈꾸는 도시가 우리의 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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