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라는 거울 – 권헌익·정병호, 『극장국가 북한』(창비, 2013)

고윤수 (대전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

 

평화에 대한 당위, 북한에 대한 무지

지난 4월 1일 조용필, 강산에, 레드벨벳 등이 포함된 남한예술단의 북한 공연 제목은 “봄이 온다”였다. 더없이 적절하다 싶었던 그 제목을 접하며 조금 뜬금없지만, “봄이 오니 꽃이 피는 게 아니라, 꽃이 피니까 봄이 오는 것”이라는 법정 스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미국과 북한은 무지막지한 말 폭탄을 주고받으며 한반도의 전쟁위기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북한의 평창동계올림픽 출전과 최고위급인사들의 방한을 거치며,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던 북미 정상회담 논의까지 오가게 된 요즘, 한반도는 정말 봄을 맞이한 듯하다.

하지만 모든 게 순조로웠던 건 아니다. 특히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을 구성할 때, 남한 정부는 뜻밖의 암초를 만나기도 했다. 모두가 환영하리라 생각했던 단일팀 구성에 때아닌 ‘공정성’ 논란이 일었던 것이다. 몇몇 언론에서는 ‘통일보다 공정이 중요하다’는 달라진 젊은 세대의 감수성을 간과한 정부의 낡은 통일 지상주의적 태도를 꼬집었는데,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는 여전히 우리의 민족주의적 감수성을 자극하지만, 지난 이명박근혜 정부 9년을 거치면서 통일에 대한 우리 사회의 절대적 신념은 상당 부분 허물어졌다. 어쩌면 그 변화는 훨씬 더 오래전부터 시작됐는지 모른다. 평화학자 정희진 선생은 “평화가 할 일은 그 짐을 제자리로 옮기는 고된 노력이지, 평화 그 자체를 섬기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이 남북관계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우리의 상황에서는 더없이 중요한 금언이다. 이젠 통일 그 자체의 당위만으로는 평화체제를 구축할 수 없다. 언제나 그랬듯 거기에는 아주 고된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사회는 오랫동안 통일을 갈망해왔지만, 정작 그 대상인 북한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무지한 상태를 유지해왔다. 우리가 북한을 소비하는 주된 방식은 종편이나 영화를 보면 잘 알 수 있는데, 탈북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은근히 남한사회의 우월성을 즐기거나, 농협 디도스 공격이나 ‘인간어뢰’처럼 ‘북한은 못 할 게 없다’는 공상과학적 환상을 덧씌우는 게 대부분이다. 생각해보면 수도와 휴전선의 거리가 불과 50㎞도 안 되는 나라에서, 그것도 반세기 넘게 서로에게 가공할 만한 무기를 겨눈 채 살고 있으면서, 이처럼 상대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눈만 뜨면 안보를 외치는 한국의 보수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말을 흘러간 유행가처럼 읊어대는 진보도 실없이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정상국가 북한의 세계사적 책무

%ea%b7%b9%ec%9e%a5%ea%b5%ad%ea%b0%80-%eb%b6%81%ed%95%9c『극장국가 북한』은 권헌익(케임브리지대학교 석좌교수)과 정병호(한양대학교 교수)라는 두 명의 인류학자가 쓴 책이다(책을 접하며 든 첫 생각은 ‘우리가 언제부터 북한을 이해하기 위해 인류학의 도움까지를 받아야 하게 됐을까’ 하는 것이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찰스 암스트롱(Charles Armstrong)이나 부르스 커밍스(Bruce Cumings),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같은 석학들의 찬사를 받았는데, 그만큼 북한에 관한 뛰어난 연구서인 동시에 우리에게는 매우 유용한 북한 입문서가 되어준다. 이 책에 쏟아진 호평들은 분명 그럴 만하지만, 그렇다고 두 저자의 연구가 그만큼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제목인 “극장국가(Theater State)”는 클리퍼드 기어츠(Clifford Geertz)가 인도네시아 발리의 19세기 정치체제를 연구한 『극장국가 네가라』에서 가져온 개념이며, 극장국가만큼이나 중요한 ‘유격대국가(遊擊隊國家, partisan state)’라는 개념은 와다 하루키가 고안한 것이다. 그리고 ‘발명된 전통(Invented Tradition)’ 또한 잘 알려져 있듯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의 것이다.

이 멋진 개념은 굳이 상세한 학술적 정의 없이도 그것이 불러오는 이미지만으로도 많은 것을 전달한다. 이러한 높은 직관성이 앞서 말한 것처럼 단순히 좋은 연구서를 넘어 한 권의 대중서로도 널리 읽힐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책이 갖는 가장 큰 미덕은 북한을 ‘이상한 나라’가 아닌 하나의 ‘정상국가’로 전제하면서 드러나는 특징적 현상을 내재적 관점에서 접근하여, 최대한 합리적으로 설명해낸다는 점이다.

 

북한 정치체제에는 미스터리가 없다. 북한이란 국가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가 아니며 그랬던 적도 없다. 북한에는 카리스마 권력의 독특한 마력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를 잘 아는 대단히 능란한 정치 지도자가 있었다. 이 지도자는 야심 찬 정치적 목표를 향해 대중들을 동원하는 데 이러한 권력이 효율적임을 이해하고 있었고,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만이 아니라 자신이 지배하는 시기를 넘어서까지 그 권력을 유지하는 데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현대 세계사에는 그와 비슷한 카리스마 넘치는 비전을 제사하는 지도자들과 그들의 흥망성쇠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다. …… 이러한 관점에서 북한 정치체제는 현존하는 다른 어떤 정치체제만큼이나 현대적인 것이며 또한 글로벌한 현대성과 접촉하면서 만들어진 산물이다. 이 점에서 북한은 현대 세계에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또 하나의 나라”일 뿐이라는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은 옳다. (9~11쪽)

 

저자의 지적처럼 실제 세계 현대사에서 북한의 김일성만큼이나 카리스마적 리더십으로 국가를 통치했던 지도자들은 적지 않았다. 중국의 마오쩌둥이 그랬고, 소련의 스탈린이 그랬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박정희가 있었다. 물론 누구나 문제로 삼는 세계사적으로 ‘전무후무’하다는 (이 또한 실제 그런지는 검증이 필요하다. 아마 아닐 것이다) 권력의 3대 세습을 통해 북한의 예외성이나 비정상성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저자는 바로 그 지점을 자신들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북한 정치체제의 예외적 성격은 그러므로 개인숭배에 기반을 둔 국가와 사회의 특정한 관계에 있기보다는, 이러한 특정한 방식의 지배가 다른 대부분의 혁명적 사회들의 역사적 경향과 달리 예상을 깨고 놀라운 탄력성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에 있다. …… 북한 정치의 수수께끼는 따라서 특이한 개인숭배의 관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관행의 특이한 지속성에서 비롯된다. (12~13쪽)

 

이 책에 따르면 북한이 대부분 나라에서 일정 기간 유지되다 사라져버린 개인의 카리스마적 지배를 계속 관철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북한이 세계를 여전히 ‘식민지’와 ‘탈식민지’로 구성한 채 반제국주의적 투쟁을 계속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북한 국내의 정치무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냉전이라는 양극적 역사의 문제가 아니라 식민적‧탈식민적 역사의 문제들이다.”(27쪽) 이것이 매우 시대착오적인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제 북한의 정치사는 “일련의 탈식민적 질문들에 의해 형성되어왔으며 그 질문들이 오늘날에도 줄곧 그 국가의 발전 형태를 규정”(27쪽)한다. 여기서 우리는 북한이 왜 그토록 미국과 일본에 적대적인지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은 과거의 제국이며, 미국은 현재의 제국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책은 그런 세계관 속에서 북한이 자신들의 역할을 어떻게 규정하고 실제 그 책임을 져왔는지, 지금껏 우리가 잘 알지 못했거나 외면해왔던 사실을 설명한다. 1965년 김일성은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아프리카-아시아 연대를 위한 반둥회의’ 1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탈식민주의적 혁명철학인 ‘주체’에 대해 연설하며 ‘정치적 자주’와 ‘경제적 자립’, ‘군사적 자위’라는 주체의 3대 원칙으로 천명했으며, 1977년 평양에서 사회주의 국제세미나를 주최하여 자신들의 ‘주체사상’을 한층 더 심화시켰다. 특히 이 시기 김일성은 발칸반도의 영웅이던 옛 유고연방의 요시프 티토(Josip Tito)와 만나, 모든 진보세력은 자주의 원칙에 따라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실질적인 독립을 유지해야 하며, 각자 자신의 길을 따라 사회주의로 전진해야 한다는 의미 있는 합의를 이룬다.

이후 “북한은 중국이나 소련과는 독립적으로 비동맹운동에서 자신의 위상을 드높이고 제3세계 개발도상국들과 친선관계를 강화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북한은 또한 막대한 경제적‧군사적 자원을 투자해 혁명세력을 원조했는데, 아프리카(알제리‧앙골라‧모잠비크‧소말리아‧수단‧탄자니아‧우간다‧잠비아), 아시아(캄보디아‧라오스‧예멘)와 라틴아메리카(아르헨티나‧브라질‧콜롬비아‧도미니카공화국‧과테말라‧우루과이‧베네수엘라)의 다양한 혁명집단이 그 지원을 받았다. 당시 북한은 중국이나 소련과는 분명히 다르지만 탈식민 세계에서 그에 못지않게 강력한 세계적인 혁명 지도국이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205쪽) 북한의 이러한 야심 또는 세계사적 책임감은 냉전 이후 동유럽의 많은 국가가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아시아의 베트남이 자본주의경제를 도입하고 중국이 개방개혁의 길로 나가는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았다. 결국 1990년대 이후 냉전의 해체와 함께 찾아온 탈사회의주의 흐름에 합류하지 못한 북한은 “새로운 세계질서 안에서 소련을 대신해 미국에 패권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적수”(114쪽) 즉 “사회주의 최후의 보루”(116쪽)가 되어, 고독하지만 꿋꿋하게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는 흔히 우리가 북한을 중국에 종속된 위성국가쯤으로 여기는 생각이 얼마나 큰 착각인지를 알려준다.

 

유격대 국가에서 현대적 극장국가로

남한 사람들이 북한을 ‘우습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 권력의 세습에 있을 것이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에 걸친 권력 세습은 북한이 얼마나 ‘후진’ 국가인지를 보여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며, 우리로서는 그들을 마음껏 비웃을 수 있는 알리바이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앞서 말한 국제적 위기상황에서 북한의 정치 엘리트들이 취한 “위기관리의 한 형태”(212쪽)인 동시에, 어쩌면 북한 주민들 스스로가 선택한 그들 체제의 존속 전략이었다. 그리고 실제 그들에게는 그럴 만한 자랑스러운 역사적 성취, 사회적 자신감, 지도자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북한은 초기에 실질적인 민주주의 모델에 따라 국가체제와 경제건설에 대단한 성공을 거두면서 오랜 식민지배가 남긴 극도로 계층화된 빈곤한 농업사회에서 분배 정의와 보편교육을 누리는 활기찬 산업사회로 빠르게 탈바꿈했다. 북한은 이러한 성취를 다른 혁명적 사회주의 국가들에 비해 비교적 짧은 기간에 사회적 혼란과 정치적 폭력을 상대적으로 덜 겪으며 이루어냈다. …… 영국 케인즈학파의 저명한 경제학자 조운 로빈슨은 1964년 10월 평양 방문 후에 「조선의 기적」이라는 보고서를 썼는데, 여기서 그는 북한의 경제적‧사회적 발전을 이룬 ‘국가적 자부심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강렬한 집중력’을 찬양하면서, 이를 이끈 그 나라의 지도자 김일성을 ‘독재자라기보다는 메시아’라고 칭했다. (219~220쪽)

 

그러므로 북한의 권력 세습은 단순히 봉건시대 군주의 왕위 계승이라기보다 더욱 복잡한 국가‧사회적 그리고 역사적 함의를 지닌다.

 

김일성에서 장남 김정일에게 절대권력이 이양된 일은 실제 생물학적 혈통관계에 기반을 두는 것일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역사적으로 구성된 정치적 친족관계에 기반을 둔다. …… 달리 말해 김일성에게서 아들 김정일에게 권력이 승계된 것은 봉건왕조의 승계나 가계의 대물림 같은 가족적인 일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중대한 정치적 사건으로 가부장적 가족정치체제의 기원신화를 제공한 정치적 부성의 현대사, 가족국가의 구조, 만주시대에 대한 국가적 서사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46쪽)

 

위 인용문에 언급된 “정치적 부성(父性)의 현대사”, “가족국가의 구조”, “만주시대에 대한 국가적 서사” 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30년대 김일성의 만주 빨치산 활동이 하나의 건국신화로 재구성되고, 그것이 국가의 통치체제에까지 깊이 각인되는 과정을 규명한 와다 하루키의 유격대국가론과 사학자 김성보가 북한을 신유교국가로 표현했던 것과 연관되는 ‘가족국가’의 개념 등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제1장 「대국상(大國喪)」(1994년 김일성의 죽음을 뜻한다)에서 저자는 이들 개념을 날렵하게 오가며 북한이라는 정치집단의 ‘국가형(國家形)’을 설명한다. 충분히 흥미로운 부분이지만,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정작 이 책의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러한 국가형이 어떻게 그토록 오래 지속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해답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기어츠의 ‘극장국가’다. 북한은 막스 베버가 이야기한 현대국가의 행로, 즉 카리스마적 지배에서 합리성에 바탕을 둔 관료주의적 지배로 이행하는 것을 거부하고 ‘대중적 사회동원’과 ‘대중적 정치교양’이라는 자신들만의 새로운 기술을 발명해 김일성이라는 카리스마 정치권력자의 생애주기를 불멸의 수준으로까지 연장했다. 이 대담한 프로젝트는 결국 국가를 하나의 거대한 극장으로 만드는 것이었는데, 김일성의 사망과 역사상 유례없는 대기근의 시기가 겹친, 이른바 ‘고난의 행군’ 당시 북한이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보여주는 제6장 「도덕경제」를 제외한, 이 책의 제2장에서 제5장은 모두 그에 대한 세밀한 묘사에 할애된다.

여기서 ‘묘사’라고 말한 것은 기어츠식의 표현 즉 ‘두꺼운 묘사(thick description)’를 염두에 둔 것이다. 실제 2장에서 5장에서 다루어지는 북한의 그 유명한 〈아리랑축전〉과 누군가는 최초의 한류라고도 말하는 혁명가극 〈꽃 파는 처녀〉 그리고 〈피바다〉에 대한 해석과 비평은 저자가 가장 공을 들이는 부분이다. 그리고 북한 건국신화의 핵심적 서사를 차지하는 세 자루의 총, 즉 ‘총대’의 신화 만들기,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을 김일성의 가장 충직한 혁명동지이자 조선의 어머니로 만들기 위한 노력들, 이 모든 것을 하나의 공간에 배치해 시각적인 완결성을 구현한 북한 ‘혁명렬사릉’에 대한 치밀하고 두꺼운 묘사들은 이 책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며, 인류학적 연구가 북한이라는 국가를 설명해내는 데 얼마나 유효한지를 말해준다.

결국 이러한 두꺼운 묘사를 통해 저자가 말하려는 것은 북한이 세팅한 국가형, 즉 유격대국가체제와 극장국가체제는 서로를 구성하는 짝이 되어 “유격대국가는 극장국가의 예술정치에 내용을 제공하고, 극장국가는 유격대국가의 전설과 통치권 패러다임에 형태를 제공”(86쪽)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성공이 권력세습으로 표면화되어, 북한식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나에게서 그 어떤 변화를 바라지 말라!”(24쪽)는, 외부에서 볼 때 지극히 후진적이고 미스테리한 국가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복되는 말이지만 이러한 거대한 극장국가의 탄생은 북한 스스로 필요 때문에 발명해낸 국가운영 시스템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하지만 또 북한의 이러한 자랑스러운 성취는 동시에 비극적인 실패이기도 했다. 저자는 마지막 결론에서 그에 대해 아프게 지적한다.

 

북한은 카리스마의 자연적 수명에 저항하여 영원한 권위를 성취하겠다는 각오로, 인위적이고 과장된 대중동원의 예술정치로 무장한 극장국가로 변모해가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쳐갔다. 이러면서, 정치적으로 독립적이며 사회적으로 민주적이며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공동체를 건설한다는, 20세기 혁명국가로서의 근본 목적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갔다. 카리스마 권력에 대한 숭배는 정치와 행정 권력의 극심한 중앙집중화를 가져왔고, 이는 사회주의혁명의 민주적 원리를 파괴했다. 권력의 중앙집중은 주로 정치적‧문화적 수단에 의존하면서 구성원들을 그러한 활동에 가장 먼저 동원하기 때문에, 경제생활과 성장 영역에 대한 국가 차원의 부적절한 대응이 늘어났다. 이러한 실패가 누적된 결과는 문화생산 영역 이외의 모든 사회생활 영역에 걸쳐 조금씩 나타나다가 1990년대 중반의 비극적인 위기 상황에서 무참하게 드러났다. 그것은 현대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토대인 시민사회의 경제적‧도덕적 몸체를 유린했다. (275쪽)

 

 

북한, 우리가 가지 않은 길

박정희가 유신헌법 선포를 통해 종신집권 의지를 드러낸 1972년 10월, 두 달 뒤 김일성도 헌법개정안을 통과시켜 주석체제를 수립, 당을 초월하는 권력을 자신에게 부여했다. 김일성은 현재 썩지 않은 시신이 되어 금수산태양궁전에 누워 있으며, 박정희 또한 죽었으나 어떤 이들에겐 반신반인의 존재로 숭앙으로 받으며 그가 태어난 도시에 거대한 동상으로 서 있다. 그리고 짧지만 박정희의 딸과 김일성의 손자가 남북의 최고 권력자로 공존하던 시기도 있었다. 1953년 휴전 이후 남과 북은 서로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처럼 다른 듯 또 같은 모습으로 살아온 세월도 만만치 않다.

미국 월가 자본가들의 필독서 중 하나가 마르크스의 『자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공산주의라는 난센스는 잊어라. 이 책은 최고의 자본주의 이론서다”라는 것이 그들의 이야기다. 공산주의가 자본주의를 비추는 거울이듯, 우리에게 북한은 우리 사회를 비추는 소중한 거울이다. 아주 오랫동안 체제경쟁의 속에서 살아온 우리는 북한을 너무 값싸고 비열하게 소비한다. 북한의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억압은 상대적 관점에서 우리의 비루한 삶을 그럴듯하게 위안한다. ‘초코파이가 북한 암시장에서 비싸게 거래된다’, ‘김정은의 부인 리설주의 머리 모양이 북한 여성들에게 유행이다’라는 부류의 보도들이 계속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통일을 당위가 아닌 필요로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도 경제발전과 실업해소 등이 주를 이룬다. 일견 세련되게 들리긴 하지만 북한이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 즉 식민지와 탈식민지의 대결 구도가 떠올라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이 책에는 저자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만났던 한 안내원의 말이 소개되어 있다. “우리 조선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입니다. 정치에 비하면 경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필요하다면 정치를 위해 굶주림을 참고 목숨까지 바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21쪽) 그가 말하는 ‘정치’를 단순하게 정의할 순 없겠지만, 이 말을 통해 우리는 북한이 분명 남한과는 다른 가치와 논리를 가진 사회라는 걸 분명히 알 수 있다. 정치와 경제를 꼭 그렇게 대립적인 것으로 볼 건 아니지만, 1990년대 중반 대내외적인 위기 속에서 북한은 정치를 강조하는 극장국가의 모습을 완성해나갔다면, 한국은 이른바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경제’ 즉 시장 중심의 사회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로부터 20여 년이 흘렀다.

우린 오랜 군부독재의 세월을 거치며 정치의 폭력성에 치를 떨었지만, 민주화 이후 경험한 경제의 잔혹성 또한 그에 못지않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남한의 평균 노동시간은 OECD 회원국 중 멕시코에 이어 2위이지만(실질적으로는 1위인데 한국정부가 노동시간을 줄여 보고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많다), 행복지수는 최하위 수준이다. 단적으로 남한의 자살률은 2003년 이후 세계 1위 자리를 내준 적이 없다. 10대 청소년들의 사망원인도 1위가 자살이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이 경제라고 말하긴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가장 무겁게 책임을 물어야 할 대상이 양극화와 빈곤, 사회 전반에 퍼진 경쟁풍토 즉 경제문제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남한에 북한은, 북한에 남한은 서로 ‘가지 않은 길’이다. 그런 점에서 남과 북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다. 북한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는 우리가 사는 이 남한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을 가져올 것이다. 봄이 오고 있다. 남과 북은 서로 다른 길을 갔고 이제는 서로를 마주 봄으로써, 자신들이 얻은 것은 무엇이며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지를 헤아려 볼 기회를 맞이했다. 평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그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짐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고단한 노력의 기나긴 과정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북한을 통해 우리 사회의 짐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디로 되돌려 놓아야 하는지를 고민해보아야만 한다. 그럴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 북한은 더 이상 위협이 아닌, 더없는 다행이 될 것이다. 그것은 북한에도 마찬가지다. 그렇게라도 우리는 그 긴 비극의 세월을 보상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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