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프란치스코 교황의 큰 울림, 우리가 가야 할 길 – 한민택

한민택

가난한 교회를 꿈꾸다

가난한 교회로의 초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연대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필수 요소로 여겨야 합니다. (…]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이들의 교회,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라는 사도 시대의 이상은 여러분 나라의 첫 신앙 공동체에서 그 생생한 표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상이 미래를 향해 순례하는 한국 교회가 걸어갈 길에 계속 본보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종 프란치스코, 한국 주교들과 만남)

프란치스코 교종이 자신의 한국 방문을 통해 한국 교회에 던진 중요한 화두 중 하나는 ‘가난한 교회’일 것이다. 다만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교회가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교회, 가난한 교회로 거듭나달라는 교종의 당부는 세속화와 물질주의에 노출된 한국 교회를 향한 강한 일침이요, 한국 교회가 아시아 복음화의 주역으로 발돋움하는 현시점에 주어진 매우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하지만 과연 한국 교회가 교종의 방한을 계기로 쇄신과 변화의 길로 돌아설 것인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사실 그동안 ‘가난한 이들을 향한 우선적 선택’을 기치로 많은 이들이 교회 쇄신의 필요성을 천명하였음에도, 교회는 계속해서 부유해지고 있으며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가난이라는 말이 상대적 개념이기 때문에 가난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마치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말로 들릴 수 있다. 가난한 교회를 향한 쇄신의 길로 돌아서기 위해서는 근본적 차원에서 물을 필요가 있다. 가난한 교회란 무엇이며, 가난한 교회를 향한 쇄신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인가?

부유함피상적 신앙이라는 적

가난한 교회를 향한 길에서 무엇보다 걸림돌이 되는 것은 부유함일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부유한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말씀하셨다(마태 19,23-24 참조). 물론 재물 자체는 사람의 선익을 위해 사용되는 좋은 것이다. 문제는 재물에 대한 집착과 그로 인해 삶의 본질적인 차원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교회 역시 가진 것과 누리는 것이 많을 때 자연히 영적으로 무감각해지게 되며 그로 인해 신앙의 본질적인 것에서 멀어지기 마련이다.

부유함의 유혹과 함께 찾아드는 것은 ‘피상적 신앙’으로, 교회 공동체를 심각하게 병들게 한다(참조: 프란치스코 교종, 아시아 주교들과 만남). 피상적 신앙은 “신앙에서 내가 믿는 분은 어떤 분이시며, 그분을 알고 사랑하며 따른다는 것은 나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라는 본질적 물음에 답하기보다, 신앙을 유희나 오락, 여가 활동 등의 차원으로 축소해,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 전적으로 투신하지 못하게 한다. 많은 신앙인에게서 발견되는 이 피상성은 신앙을 자신의 편의나 기호에 따라 선택하는 ‘사교 모임’ 혹은 외모를 치장하는 액세서리 정도로 간주하거나, 그리스도의 복음 메시지를 삶의 지혜나 처세술, 철학 사조나 정치적 슬로건 정도로 환원시키는 등의 형태로 구체화한다. 또한, 시장의 논리로 하느님 은총을 대상화하고 도구화하여, 결국 신앙인은 하느님과 ‘거래’를 하는 ‘은총의 소비자’가 되어 하느님과 내적인 ‘관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피상적으로 머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피상적 신앙이 교회 전반에 퍼지게 되면 공동체는 영적 감각과 활력을 잃게 되며, 하느님 말씀이 지닌 힘 또한 퇴색되고 만다.

그리스도의 가난

한국 교회가 부유함의 유혹과 피상적 신앙을 넘어 가난한 교회로 거듭나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교회가 가난하고자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가난하게 사셨기 때문이며, 가난한 이들과 운명을 같이 하셨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예수님의 가난은 구유에서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는 그분의 전 생애와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의 가난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특권을 모두 버리고(필리 2,6 참조) 인간과 똑같이 되신 그분의 삶 자체다. 예수님은 길을 잃고 헤매는 양을 구하기 위해 인간의 삶 속에 들어오신 분,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과 불의, 상처와 고통을 몸소 겪으신 분,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다가가 깊은 연민의 마음으로 그들과 운명을 함께하시며 그들을 하느님의 자녀가 누리는 참 생명으로 인도하신 분이시다. 그분의 가난에서 우리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 사랑의 극치를 발견한다.

예수님의 가난은 또한 권력자들의 힘의 횡포, 부정과 부패, 부조리에 십자가의 비폭력과 사랑의 권능으로 맞선 저항이었다. 그분은 군림하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섬기고 봉사함으로써 악과 죽음의 세력을 이기신 분이시다(마태 20,28 참조). 그분의 가난은 십자가 위에서 온전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사랑하는 벗을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목숨까지 내어주며 자신을 비우시는(필리 2,7 참조) 가난의 행위에서 우리는, 인간을 가두어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개방하지 못하도록 하는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해방되는 길이 바로 그분처럼 가난하게 되는 것, 곧 자기 자신을 비우고 버리는 것, 자신의 생명을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내어놓는 것임을 깨닫는다.

가난한 교회를 꿈꾸다.

우리가 꿈꾸는 가난한 교회는 예수님의 가난을 자신의 것으로 하는 교회다. 가난한 교회는 곧 죄와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이, 불의와 부조리로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이 전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교회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삶에 열려 있는 교회, 그들의 삶에 관심을 갖고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그들의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하는, 영적으로 깨어 있는 교회다. 또한 가난한 교회는 기도하며 행동하는 교회다. 불의와 폭력에 사랑과 비폭력, 가난과 섬김으로 저항하는 교회다. 세상의 권력이나 부유함, 숫자나 사회적 평판이 아닌 오로지 예수님의 복음의 힘, 십자가의 힘(로마 1,18; 1코린 1,22-23 참조)에만 의지하는 교회다. 불의를 보고 불의하다고 말할 수 있는 교회, 고통 중에 있는 이들과 죽음의 위협에 있는 이들 편에 서서 온전히 투신할 수 있는 자유로운 교회다.

교회의 진정한 위기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보다 숫자에 연연해 하거나 자신의 안위를 돌볼 때, 하느님 말씀에 목말라하기보다 어떤 행사를 하며 무엇을 먹을까를 고민할 때, 조직 관리에 매여 정작 복음이 있어야 하는 이들의 삶을 도외시할 때 찾아온다. 위기에 처한 한국 교회가 쇄신과 변화의 길로 결연히 돌아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영적으로 깨어나야 한다.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마태 6,33 참조),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랑을 향한 열망을 되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그리스도의 복음과 이질적인 것들을 과감히 내려놓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쉽지 않은 길이며 수없이 많은 걸림돌이 도사리는 길이다. 탐욕을 채우도록 자극하는 세상의 흐름에 반하는 길이며, 이전에 누리던 안락함과 특혜, 물질적 풍요로움을 포기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걸으셨고 사도들과 한국의 순교자들이 그 뒤를 따랐던 참된 자유를 향한 영적 투쟁의 길이며, 우리가 꿈꿀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의 길이기도 하다.

프란치스코 교종 방한 후 많은 말이 오갔으며 또 오갈 것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교종 자신이 아닌 그가 증언하고자 한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점이다. 우리가 교종에게 찬사를 보낸 이유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을 닮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없이 교종은 아무도 아니다. 그러므로 교종의 방한을 회상하며 한국 교회의 미래를 위해 우리가 진지하게 답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인가? 우리의 신앙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그분을 따르는 영적 여정에서 우리는 어디쯤 와 있는가?”

한민택 수원교구 사제. 2003년 9월 서품. 파리 가톨릭대학교 기초신학 박사. 2011년 귀국 후 수원교구 복음화국에서 기획연구를 담당했고, 부국장 역임 후 현재 수원가톨릭대학교에서 기초신학과 신학생 영성지도를 담당하고 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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