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에 대한 인정, 다름에 대한 존중 – 북한이탈주민의 평화

이은혜 (북한이탈주민)

 

서울에서 새 삶의 둥지를 튼 지 벌써 7년, 꽁꽁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던 때가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사계절이 7번이나 바뀌었다. 요즘은 소꿉친구들의 이름마저 가물가물하다. 아직 강산이 변할 만큼의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닌데 만날 수 없고 연락할 길 없으니 기억 속에서 멀어져만 간다.

남북이 분단된 지 어언 70년, 강산이 7번이나 바뀔 만큼의 긴 세월, 우리가 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나서 자란 고향과 가족들 그리고 친구들과 찬란했던 20대를 뒤로하고 나는 탈북(脫北)의 길에 올랐다. 동기는 단순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떤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생명의 위협을 받은 것도 아니다. 물론 사회주의에 대한 심각한 모순을 느끼고 사상적으로 전향하여 새로운 자유의 길을 찾기 위해 목숨을 내건 것은 더더욱 아니다. 사실 외부와 정보교류가 차단되어 다른 나라와 비교가 불가능한 북한에서 스스로 사회에 대한 모순을 의식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먼저 탈북한 엄마를 만나기 위해 탈북을 결심했다. 덧붙인다면 한국 드라마를 몰래 보면서 나도 모르게 느꼈던 물질 풍요에 대한 동경, 자유에 대한 갈망이었을 것이다. 왜 탈북했냐는 질문을 받으면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이렇게 답변하곤 한다. “노랑머리 염색하고 미니스커트 한번 입어보고 싶어 왔다”고.

그러나 대부분 탈북자와 마찬가지로 탈북의 경로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베트남 경찰에 붙잡혀 북송의 위기를 겪었고, 중국과 라오스 등에서 9개월의 긴 시간을 보내야 했다. 경찰차만 지나가면 괜히 겁나 슬그머니 피해 다니던 그 시절, 어두운 밤비가 내려 미끄러운 국경의 산등성이를 밤새 걸으며 두려움과 무서움에 떨었던 그 시간들, 짧고도 긴 그 터널을 지나 마침내 나는 한국의 국민이라는 ‘선물’을 받았다. 새로운 내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한국 국적의 이방인

어렸을 적부터 똑똑하다는 이야기기를 심심치 않게 들으며 자란 나였지만, 초기 한국 생활에서는 초등학생보다 별로 나은 게 없었다. 커피숍에서 음료 하나 주문하는 것이 영어 단어 외우는 것보다 더 어려웠고 약속 장소로 찾아가는 것이 군(軍)에서 ‘50리(20Km) 행군’ 하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처음 알게 된 친구에게 문자를 받았다.

“세븐일레븐 앞에서 내일 보자.”

(일곱, 열하나 앞에서 보자고?)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전화를 걸어 물어봤다. 그게 뭐냐고.

나의 질문에 할 말을 잃은 친구는 다음 날 고맙게도 나를 데리고 편의점으로 갔다.

“자 이게 세븐일레븐이다. 편의점이라는 거지.”

(“아!”)

내 주변에도 웃지 못할 경험은 허다했다. 도넛 매장에서 일하게 된 한 친구는 아메리카노에 시럽을 넣어달라는 고객에게 딸기 시럽을 넣어 아르바이트 첫날 일을 그만두게 되었고, 음식점에서 열심히 일하던 친구는 고객의 주문을 이해하지 못해 10분 가까이 고객의 항의를 들어야 했다. 대부분 사람이 자연스럽게 터득한 삶의 경험과 상식마저도 우리는 학습해야만 했다. 모르는 건 창피하지 않지만, 모르면서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정말 창피한 것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걸을 때는 도로 위의 간판을 열심히 읽으며 다녔고 집에 돌아와서는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광고도 매일 챙겨 보았다. 밤을 새워 책을 읽고 영화를 감상했으며 “마블(Marvel)”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 그림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밤을 새워도 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개그콘서트>를 이해하는 것이었다. 관객들은 왜 웃을까? 개그맨들은 왜 이상한 옷을 입고 나와서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걸까? 상대방의 개그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매우 큰 괴리감을 느끼게 했다. 한국 생활에서 가장 외로움을 느꼈던 때는 바로 남들이 웃을 때 함께 웃을 수 없을 때였다. 한국 생활 2년 차에 나는 드디어 <개그콘서트>를 보며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때의 감격은 대학에서 A+의 성적을 받았을 때 기쁨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지금은 종종 “북한 사람이었어?”라며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 스피치학원에 쏟아부은 학원비와 뉴스를 보며 아나운서들의 발음을 열심히 따라 연습한 시간이 헛되지 않은 것 같다. 특별히 억양에 집착하여 ‘한국 사람식 발음’을 구사하기 위해 힘을 쏟은 것은 내 삶의 평화를 위해서였다.

“아가씨 중국에서 왔어?”

초기 한국 생활에서 물건을 사거나 택시를 타면 자주 듣던 질문이었다.

“아니요. 북한이요.”

이렇게 답변하는 순간 나는 수많은 질문과 훈계에 맞닥뜨리게 된다.

언젠가 간단한 전기 수리를 위해 집을 방문했던 기사님은 북한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자 대뜸 “홈쇼핑하면 안돼, 그리고 아무나 쉽게 믿으면 사기당할 수 있어”라는 서두로 시작하여 30분 가까이 훈계를 이어갔다. 우연히 알게 된 어떤 목사님은 내가 북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내 손을 잡으며 “얼마나 배고팠겠니”라며 위로하셨다. “다행히 전 부모님을 잘 만나 배고픔은 겪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자, “네가 말은 그렇게 해도 배고프니까 한국에 왔겠지. 그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라며 다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셨다. ‘북한에서 온 나’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야 했고, ‘북한에서의 나의 생활’은 배고프고 어려워야만 했다. 그래야 대화가 편해진다.

늘 감사한 마음으로 어른(?)들의 이러한 조언에 귀 기울이려 했다. 북한주민들에 대한 연민과 북한체제에 대한 안타까움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복될수록 이런 말들은 내 마음에 생채기를 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탈북자’의 이미지를 그대로 나에게 투영하여 이야기하고 싶어했다. 나만의 고유성이나 나만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대부분 탈북자는 평범한 한국 사람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회사에 취직하여 성실하게 일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북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연인과 헤어져야 했고, 북한식 사투리를 쓴다는 이유로 상견례 자리에서 사돈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촌스럽다”는 핀잔을 듣기도 한다. 멀쩡하게 잘 지내던 직장 동료와 상사가 북한 출신이라는 것을 알자 태도가 달라진다. 배고픔을 피해 한국으로 온 탈북자 중 일부는 편견과 비교를 견디지 못하고 캐나다나 영국으로 또다시 이민을 선택하기도 했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핏줄임에는 틀림없으나 지난 70년 동안 우리는 서로 너무 다르게 살아왔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가 한민족임을 더 강조한다. 차라리 다른 것을 먼저 인정하고 같은 것을 발견하는 재미를 찾았더라면 훨씬 편했을지도 모른다. 남과 북 모두 그런 분위기에서 살다 보니 체제경쟁의 기억은 ‘북에서 온 사람’들에 대한 반목이나 우월감으로 드러난다. 분명히 한국 국적을 가진 한국 사람인데 사람들은 이방인처럼 대한다. 외국으로 나가면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그래서 더 편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편견 섞인 관심보다는 무관심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냥 ‘나’일 뿐이다

탈북자에게는 많은 수식어가 붙는다. ‘통일 한국의 일꾼’이 되기 위해 우리는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야 했고, ‘먼저 온 통일’이므로 국가와 사회의 관심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도 한다. ‘간첩사건’이 터지자 탈북자에 대한 검증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재입북자가 나오자 탈북자에게 잘 해줄 필요가 없다는 질타도 나온다. 탈북자인 친구는 괜찮지만 탈북자인 배우자(配偶者)는 싫단다.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 3만여 명,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약 0.06%정도다. 그 0.06%의 사람은 대한민국 국민임에도 ‘탈북자’라는 특별한 수식어로 불린다. 묵묵히 자신의 삶을 억척스럽게 살아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니라, 범죄를 저지르고 극단의 선택을 하는 몇몇이 ‘탈북자’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현실이다.

한때 ‘탈북자’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논쟁이 있었다. 탈북 뒤에 붙는 ‘자(者)’라는 글자가 상대방을 얕잡아 이르는 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탈북자’이든 ‘북한이탈주민’이든 ‘새터민’이든 단어들이 주는 이질감은 결국 똑같다. 같은 생각을 가진 친구들과 많은 고민을 나누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탈북자사회에 대한 이미지를 쇄신하는 것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를 위해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는 것, 그래서 겉으로나 속으로나 누가 봐도 한국 사람처럼 사는 것, 이것이 성공이라 생각한 적도 있다.

입국 초기 나의 촌스러움을 기억하는 오래된 친구는 나에게 “가끔 넌 나보다 더 한국 사람 같이 보여”라는 이야기를 웃으며 했다. 꽤 완벽하게 ‘한국 사람스러운’ 겉모습이 만들어진 것 같다. 회사 면접을 보던 날 대표님은 나에게 “입사하게 되면 북한에서 온 것을 동료들에게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고 나는 흔쾌히 응했다. 1년 가까이 그 회사에서 일하며 결국 나는 나의 ‘특별함’을 밝히지 않았고 아주 평범한 회사생활을 보냈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밀려드는 공허감과 정체성에 대한 혼란, 겉과 속이 한국 사람처럼 변했음에도 여전히 행복하지 않은 이 기분, 분명 나는 무엇인가 잘못 생각하는 것 같았다.

 

다양성의 평화

얼마 전 어느 한 모임에 참석하여 매우 인상 깊은 이야기를 들었다.북한이탈주민들을 지원하는 기관에서 일하는 그분의 말씀은 “한국사회는 여러분이 한국에 온 이상 기존에 있던 사회의 모든 것에 무조건 적응해서 살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이런 인식을 깨는 데 우리도 여러분도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순간 그동안 내 마음이 왜 이토록 불안했고 공허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애초부터 우리는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 단순히 지역만 다른 것이 아니고 체제도 달랐고 교육과 문화도 많이 달랐다. 인간은 미래를 지향하지만 현재는 과거로부터 온다. 과거와 단절된 미래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미래를 위해 과거를 끊어내려 노력했고 부정하려 애썼다. 내 스스로가 있는 그대로 나를 인정하지 못하고 주변의 기대에 맞추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유명한 생물학자인 이화여자대학교의 최재천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진화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바로 다양성의 증가”라고 했다. 한국이 건강한 사회로의 성장을 추구한다면 다른 것에 대한 존중,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에 대한 좀 더 성숙한 사회적 공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분단 후 우리는 오랜 세월을 다르게 살아왔다. 경제적 차이는 물론이고 문화적 환경과 정서도 다르다. 같은 언어로 말한다고 해서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의 마음에는 너무나 다름에도 같아야 한다는 당위성이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나의 한국 생활은 대체로 만족한 편이다. 좋은 친구들을 만나 솔직한 의견들을 나누고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많은 노력들을 해왔다. ‘통일하모니’라는 남북청년합창단을 만들어 다양한 목소리로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었고, 노숙자 및 독거노인 봉사도 함께하면서 이웃과 더불어 사는 즐거움을 배우기도 했다. 여전히 사회생활 곳곳에는 탈북자에 대한 편견과 배타성이 있지만, 슬기롭게 극복해가는 지혜도 터득했다. 그 과정에서 갈등에 대한 시각도 달라졌다. 마냥 피하려고만 했던 갈등을 오히려 기회로 삼아 상대방과 소통하고 이해하는 계기로 만들기도 한다. 갈등이 전혀 없는 세상보다는 적절한 갈등 속에서 치열하게 토론하고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여 다양성을 증가해가는 것, 이것이 진정한 평화인지도 모른다.

그동안 갈등과 번민은 나의 내면을 성장시켜주는 원천이 되었다. 단순히 현재에 대한 실망과 불평만 있었다면 결코 나는 달라질 수 없었을 것이다. 비록 시행착오는 있었지만 내 인생에서 내가 놓치지 말아야 할 가치,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내가 추구해야 할 삶의 방향을 잡는 데 지난 7년은 너무나 소중하고 귀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는 행복한 나날이었다.


이은혜(가명). 북한대학원대학교 박사과정. 아직 북에 가족이 있어 본명을 밝히지 않는다. 북한이탈주민인 나에게 있어서 평화란 아무런 수식어도 붙지 않는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image: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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