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인간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생태정의와 인권, 그리고 지구법[학]) – 11호 특집원고

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인간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생태정의와 인권, 그리고 지구법[학]

 

박태현 (강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103258생태정의란?: 생태정의론의 문제상황과 개념

정의(正義)는 수많은 학자들의 학문적 노력에도 한마디로 딱 잘라 정의하기에 무척 어려운 개념이다. 그래서 정의를 적극적으로 규정하기보다 “정의는 부정의가 아닌 것”이라는 소극적 규정에 만족하자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생태정의 개념과 관련해서는 로마법에서 정의의 이념을 나타낸 관용구 “각자에게 각자의 몫(Suum cuique)”이라는 관념에서 일단 출발하는 것이 이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고전적 정의론에 따르면 각자는 저마다 정당한 몫을 가져야 하고 그렇게 되지 않았을 때 부정의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 정의론을 현대적으로 풀이하면, 정의란 어떤 특정한 자원(이것은 재화나 공직 같은 사회적 지위일 수도 있다)을 놓고서 경합하는 다수 당사자 사이에서 성립된 바람직한(=정당한) 자원 분배 상태(=질서)를 의미한다.

생태정의를 이해하는 데 이 고전적 정의론에서 출발하자고 제안하는 까닭은 특정 자원을 자연(또는 지구생태계)으로, 또 경합하는 당사자를 인간종을 포함한 동·식물종으로 각각 바꾸어봄으로써 이해를 돕기 위해서다. 자연 또는 지구생태계를 구성하는 한 종에 불과한 인간이 다른 종의 서식지인 강이나 숲, 초지, 바다 등을 개간이나 매립 등을 통해 경작지처럼 자신만을 위해 개조, 변경하는 것은 나머지 구성원들이 누려야 할 정당한 몫을 빼앗는 것이다. 이는 고전적 정의론이 지향하는 각자의 몫이 공평하게 돌아간 상태에 분명히 어긋난 모습이다. 이것이 오늘날 생태정의론이 등장하게 된 문제적 상황이다.

생태정의는 인간 존재뿐 아니라 그 밖의 다른 (생명)존재들이 누려야 할 정당한 몫이라는 관념을 상정한다. 그런 점에서, 생태정의론은 정의론의 당사자 범주를 인간종을 넘어서 전체 생태계를 구성하는 그 밖의 다른 존재요소까지 확장한다. 이것이 인간만을 당사자로 놓고 성립된 고전적 정의론(이하 인간정의론)과 구분되는 결정적 차이다. 이러한 차이에서 인간정의론은 인간 이외의 존재는 오로지 인간에게 유익한 것이냐 아니냐에 따른 수단적 또는 도구적 가치를 지닌 객체로 파악하는 이원론(dualism)에 서게 된다. 하지만 생태정의론은 객체로서 자연과 주체로서 인간으로 떼어서 구별하지 않는다(즉 이원론을 부정한다). 어디까지나 전체로서의 생태․생명 공동체를 상정하고 이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로서 인간 존재와 그 밖의 다른 존재들을 통합적 관계그물망 속에서 저마다 진화적 역할을 가진 한 주체로 보고자 하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입장이 나온다.

생태정의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인간 존재의 권리뿐 아니라 동·식물과 자연환경의 권리까지도 고려하는 정의론의 한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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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boy pulled recyclable items from a garbage dump in Gauhati, India. That nation has refused to enact climate change policies without pledges of aid from wealthy countries. Credit Anupam Nath/Associated Press

생태정의론의 관점에서 생태위기와 인권

환경문제와 인권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최소한 깨끗한 양질의 식수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에게 생명권과 건강권이라는 인간의 기본적 권리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지 묻는다면 이 명제의 타당성은 자명하다. 환경법학계에서는 환경정의를 법원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히 제기되며, 실제로 법제화가 시도되었다. 오늘날 환경정의론은 환경정책의 수립과 이행에 시민참여라는 절차적 정의(procedural justice)와 환경관련 편익과 비용, 책임의 공평한 배분이라는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 그리고 환경오염으로 인한 피해의 신속하고 공정한 구제라는 교정적 정의(corrective justice)를 논한다. 환경정의론이 문제삼는 이러한 영역들은 어느 것 하나 소홀히 다룰 수 없이 중요하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나는 생태정의론의 관점에서도 오늘날 환경오염과 특히 기후변화 때문에 질병과 빈곤, 재난이라는 다중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인권문제를 바라볼 것을 제안하고 싶다.

석탄화력발전소와 환경보건의 문제를 보자. 발전소 운영으로 직접 이익을 얻는 당사자는 회사와 수도권 지역 주민들이다. 하지만 발전소 운영 때문에 생겨난 대기오염으로 인한 건강피해는 발전소가 있는 지역 주민들이 고스란히 떠안아야 할 고통이다. 누군가의 특별한 희생 위에서 다른 누군가가 이익을 향유한다면 그 어떤 정의론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가뭄과 홍수, 그리고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도서 국가의 수몰 등도 온실가스를 다량으로 배출하는 나라가 자국의 경제적·문화적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화석에너지의 과도한 사용에 따른 사태다. 곧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일방적 피해와 희생 속에서 부자 나라 사람들의 편리한 물질문명 생활이 유지된다는 점에서 정의에 반하는 상태다.

오늘날 이러한 문제상황을 [환경]정의론이라는 관점에서, 더 구체적으로는 (국제)인권법체계의 틀 속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주장이 국제사회에서 점점 설득력을 얻어간다. 이미 2009년 3월경 유엔인권이사회(U.N. Human Rights Council)는 기후변화와 인권 간의 관계에 관한 결의 10/4를 통해 “기후변화 관련 영향은 직·간접적으로 인권의 효과적 향유에 광범한 함의를 가짐”을 명확하게 언급하며 각국에 기후변화와 관련한 인권준수의무를 성실히 이행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나는 한편으론 이러한 문제상황이 환경정의론과 인권법적 틀 속에서 다루어져 하고 이러한 문제접근법은 더 강화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정의론과 인간권리론을 넘어서는 더 큰 맥락 속에서 이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오늘날 생태위기는 인간이 전체 생태·생명공동체에서 한 성원으로 공동체에 의존한다는 (생태적) 진실을 망각하며 발생했다. 즉, 인간만의 안녕과 복리(well-being and welfare) 증진이라는 미명 하에 자연을 과도하게 채취하고, 이용하고, 개조하는 등 자연을 남용한 결과다.

이러한 이해가 타당하다면, 오늘날 환경변화에 따른 가뭄과 홍수, 혹서 등으로 인해 식수를 비롯해 생명을 영위하는 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재화에 대한 접근이 제한되고 재해로부터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인권문제는 일차적으로는 환경정의나 국제인권법을 통해 이를 바로잡는 노력이 필요하다. 더 근본적으로는 인간 존재와 그 밖의 다른 존재와의 관계, 그리고 전체 생태·생명공동체 속에서 각각의 역할과 책임을 성찰하고, 그에 맞춰 그 관계와 역할 그리고 책임을 재정립해야 할 시점이다.

지구법[학]과 자연의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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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 Work: Our Way Into the Future

1999년 생태론자이자 지구신학자인 토마스 베리(Thomas Berry)는 자신의 책 『위대한 과업(The Great Work: Our Way Into the Future)』에서 오늘날 생태위기를 부른, 그 배후에 깔린 시스템적 원인을 이해하고, 자연세계와 우리의 관계를 파괴의 관계에서 서로를 지지하는 호혜적 관계로 바꾸는 것이 인류에게 던져진 숙명적 과제라고 주장한다. 베리는 생태위기의 일차적 원인으로 산업화된 세상 속에 사는 인간이 지닌 믿음체계, 곧 인간을 자연세계의 나머지 존재와 구분되는, 더 중요한 존재로 여기는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를 지목했다. 이러한 인간중심적 세계관은 오늘날 산업사회의 모든 부문―경제와 교육, 종교 그리고 법―을 떠받치고, 자연세계는 단지 인간의 이용을 위한 객체(대상)의 집합에 불과하다는 믿음을 길러왔다고 한다.

베리는 2001년 버지니아에서 열린 컨퍼런스에서 지구법의 초석을 놓는다. 이 컨퍼런스에서 베리는 “지구는 새로운 법학을 요구한다(Earth needs a new Jurisprudence)”며 이를 지구법[학](Earth Jurisprudence)으로 개념화했다. 그리고 여기서 그 유명한 「권리의 기원과 분화 그리고 역할(The Origin, Differentiation and Role of Rights)」이라는 짧은 글을 발표한다. 이 글을 통해 베리는 지구공동체의 모든 구성요소는 ① 존재할 권리, ② 서식지에 대한 권리, ③ 지구 공동체의 부단한 갱신과정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실현할 권리라는 기본적 권리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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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Berry (1914-2009)

베리의 이러한 비전은 알도 레오폴드(Aldo Leopold)의 대지윤리(the land ethic: “어떤 것이 생물 군집의 통합성과 안정성, 그리고 아름다움을 보존하는 경향성을 지녔다면 이는 옳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향이라면 그렇지 않다”), 아르 내스(Arne Naess)의 심층 생태주의(deep ecology), 크리스토퍼 스톤(Christonpher Stone) 교수의 논문인 「나무도 소송을 걸 수 있는 자격을 가져야 하는가(Should trees have standing?)」에 영향을 받았다.

자연도 한 주체로서 권리를 갖는다(혹은 가져야 한다)는 이러한 사고는 국제사회에서 점점 공감을 얻어간다. 2015년 9월 25일 열린 유엔총회는 결의 70/1을 통해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2030 의제」를 채택한 바 있다. 여기서 “세계 각지의 사람이 자연과 조화하는 지속 가능한 발전과 생활양식을 위해 적절한 정보와 인식 증진을 보장해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목표를 설정했다(지속 가능한 발전 목표 12.8). 이를 실현하기 위해 2016년 8개 학문분야(지구중심의 법, 생태경제학, 교육, 전인론적 과학, 인문학, 철학과 윤리학, 예술·언론·디자인 및 건축, 신학 및 영성)에서 33개국 120명이 넘는 전문가가 참여해 지구법학으로 알려진 지구 중심 거버넌스(Earth-centered governance known as Earth jurisprudence)에 관한 (인터넷에 기반한) 대화를 시작했다. 2016년 6월 이 그룹은 “자연의 내재적 가치와 우리의 인식과 태도, 행동을 인간중심주의에서 비인간중심주의 곧 지구 중심으로 전환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보고서로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지구 중심의 세계관에서 보면 행성 지구는 죽어 있는, 개발의 단순한 대상(객체)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신의 건강을 위협하는 다양한 위험에 노출된 우리 공동의 집”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구 중심의 세계관으로 전환과정은 지구와 자연의 순환과정에 대한 존중과 경외를 포함해 자연과의 상호작용에 대한 진지한 재검토와 법과 윤리, 제도, 정책 그리고 관행에서 지구법에 대한 지지를 요구한다”고 했다.

보고서는 지구법학(철학)이 다음과 같은 원칙으로 정립된다고 한다.

① 주체성(subjectivity): 우주는 가치와 권리를 지닌 전일적 통일체다.

② 공동체성(community): 모든 것은 그 밖의 다른 모든 것과 관계하며 공존한다.

③ 법칙성과 질서(lawfulness and order): 우주와 지구 공동체에는 우리가 발견하고 이해할 수 있는, 자기 조직의 패턴이 있다.

④ 야생성(wildness): 우주 안에서 그러한 질서와 법칙성은 역동적이고 신비스럽고 또 예측 불가능한 측면이 있다.

지구 위 생태/생명공동체의 가치질서로서

생태정의와 지구법[학]

지구법[학]은 아직 한국사회에서는 낯선 개념이다. 하지만 그 핵심내용을 들여다보면 뭇생명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한국의 전통적 가치와 문화 속에서 자란 우리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고, 그 타당성 또한 어렵지 않게 수긍할 수 있다. 꽃이 우리 인간을 위해 피는가 아니면 다른 동물들을 위해서도 피는가. 아니다. 꽃은 자신을 위해 핀다. 이것이 자연의 내재적 가치를 인정하는 태도다. 물론 우리 인간은 꽃을 통해 아름다움을 느끼고 또 우리의 경제적, 의학적 필요에 따라 이용할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꽃이라는 존재[가치]가 단지 인간의 필요를 위한 자연자원으로 축소될 수는 없다. 또 설사 인간에게 이용가치가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전체로서의 생태․생명공동체 안에서 반드시 쓸모없는 존재라고 말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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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 관련 이미지.

내가 좋아하는 성경구절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새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 젖먹이가 독사 굴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모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이사야서 11장 1~8절)

나는 이를 각 존재가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배려하면서 형성되는 지극한 평화상태로 새긴다. 물론 현실에서 늑대는 자신이 살기 위해 새끼양을 잡아먹고, 표범은 자식의 배를 불리기 위해 새끼 염소를 채갈 것이다. 자연의 내재적 가치와 권리는 궁극적으로 이러한 자연질서를 인정하는 전제에서 인간에게 향해진 윤리적 요구다.

늑대는 배가 부르면 새끼양이 곁을 지나더라도 본체만체한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장래를 대비해 하루치 이상의 양식을 사냥해 보관했지만, 그렇게 과도하지는 않았다. 이는 사냥감과 자신이 우주질서 안에서 전체 에너지의 일부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우주관을 갖고, 스스로 사냥을 절제하는 관행을 지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업시대를 거쳐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면서 엄청난 과학기술력을 확보하고 동시에 돈을 무한축적할 수 있는 금융시스템을 구축하면서 이러한 절제윤리는 더 이상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을 제어하거나 유도할 수 있는 힘을 상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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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마디아프라데시 주 레이즌 지구 아디바시 부족 (빌족)의 어린 소녀.

지구법[학]은 오늘날의 생태위기를 배경으로 다시 등장한 오래전의 절제와 존중, 그리고 배려 윤리의 새로운 버전임 셈이다. 이러한 지구윤리 위에 기존의 인간법을 재구축하자는 강력한 호소가 지구법[학]이고 그 핵심내용이 바로 자연의 권리 인정이다.


박태현. 환경시민단체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 지금은 강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 환경법을 강의한다. 뜻을 같이한 사람들과 함께(포럼 지구와 사람 www.peopleforearth.kr) 지구법[학]에 대해 공부하고 있으며 최근에 『야생의 법: 지구법 선언』을 번역하였

참고문헌

박태현, 기후변화와 인권에 관한 시론, 《동아법학》 제52호(2011).

조명래, 정책목표로서 환경정의 개념과 환경정의 정책 프레임워크, 「2017년 제1차 환경정의 포럼 발제문: 환경정의 개념과 법제화·제도화 과제」, 2017.

코막 컬리넌, 박태현 옮김, 『야생의 법: 지구법 선언』(로도스, 2016).

Michelle Maloney and Patricia Siemen, “Responding to the Great Work: The Role of Earth Jurisprudence and Wild Law in the 21st Century”, 5 Barry University Environmental and Earth Law Journal, 2015(8-9).

U.N. General Assembly, Harmony with Nature, Note by the Secretary-General A/71/266(1 August 2016).

이미지 출처

image 1. 강원대학교 홈페이지

image 2. nytimes

이외 image wiki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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