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의사 결정 구조, ‘공동합의성’을 돌아보다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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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교회개혁은 현재 진행형

널리 알려진 대로 루터의 교회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성 베드로성당 건축을 위한 면죄부 판매에 반대해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 정문에 ‘95개 반박문’을 게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 내용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500년이나 지났지만 그 당시와 지금 교회의 상황이 매우 비슷하다는 데 놀라고, 또 ‘더는 미룰 수 없는 교회쇄신’을 선언하고 이를 하나하나 실천해온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과 루터가 주장한 내용의 유사성에 다시 한 번 놀란다. 루터는 다음 세 가지가 가장 심각한 폐해라고 보았다. 우선 교황의 세속적 권력과 사치, 그다음이 제후 대접을 해야 하는 수많은 추기경,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나치게 많은 직원을 둔 거대한 교황청이었다. 한마디로 교황제를 둘러싼 조직과 제도가 기형적으로 비대해지면서 이를 운영하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재정이 필요했고, 결국 이런 경제적 필요가 교회를 부패와 타락으로 이끌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교황청만 놓고 본다면, 현재 프란치스코 교황이 개혁하고자 하는 내용과 거의 흡사해 보인다. 교황은 재무원과 재무평위회라는 재정 감독기구를 설치하고 재정비함으로써 돈과 관련된 것을 관리감독하게 하는 한편, 비대해진 교황청 꾸리아 구조를 ‘건강한 탈중앙집권화’ 또는 ‘분권화’의 기치 아래 교회법까지 바꾸면서 지역교회에 권한을 넘기는 방향으로 개혁을 위한 조치를 단행해왔기 때문이다.

루터가 요구한 개혁도 비슷해 보인다. 당시 교황청은 ‘전쟁세’를 포함해 여러 세금을 만들고 주교직을 매매했을 뿐만 아니라, 부유하고 수익 많은 수도원이나 교회를 추기경이나 휘하 다른 이들에게 위탁해 관리하게 함으로써 그 수입을 챙겼다. 이에 루터는 구체적 개선방안으로, 각종 세금 폐지를 비롯해 교황에 대한 지나친 숭배 금지, 로마순례 폐지,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일 강조, 교회법 폐지 등을 제안했다. 그가 제안한 방안에는 신학적·제도적 오류에 관한 것도 포함됐지만, 절대다수가 교황과 교황청의 부당한 정치권력과 금전적 탐욕을 통제하려는 것이었다.

교회개혁 500주년을 맞는 이 시기를 가톨릭교회에 한정해 본다면 가톨릭교회에 ‘500년’이라는 시간이 주는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지, 다시 말해 그동안 가톨릭교회는 무엇을 반성하고 무엇을 개혁해왔는지, 그 긴 세월이 무색해지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교황청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지역 교회,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대부분의 교회에서도 이런 부패와 부정과 불의가 목도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렇기에 교황과 교황청에 대한 루터의 비판은 전체 가톨릭교회가 그 오랜 세월 동안 ‘반개혁’으로 일관해온 과거를 철저히 뉘우치라는 외침으로 들린다. 꺼져가는 그의 개혁정신을 살려, 특히 오늘의 한국교회는 하루라도 빨리 개혁의제들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고 실천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공동합의성(Synodality)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는 전체 교회와 관련된 중요 문제들을 협의해 교황을 보필하는 기구로 ‘주교 시노드(세계주교대의원회의)’를 창설했다. 현재 전 세계 가톨릭교회에 주교가 약 5,200여 명이나 되기 때문에 주교 시노드에는 각 지역 교회에서 주교를 뽑아서 참가하게 한다. 요한 바오로 2세나 베네딕토 16세 교황 때에도 주교 시노드를 열어서 이 말이 낯설지는 않지만, 현 프란치스코 교황은 짧은 기간 동안 가정과 관련해 이미 두 번의 주교 시노드를 열었고 또 2018년에도 청년을 주제로 주교 시노드를 개최할 계획이다. 덕분에 이제는 교회 안에서 시노드라는 말이 꽤 친숙해졌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정과 관련한 제2차 주교 시노드가 열렸던 2015년 10월 17일 개막 연설에서 시노드의 의미와 중요성을 분명히 했다. 교황은 “시노드(synod)는 그리스 어원을 갖는 용어로 평신도, 사제, 그리고 ‘로마의 주교’인 자신을 포함해 주교들이 ‘함께 걷는다’는 비교적 단순하고 쉬운 뜻이 있다”고 설명하면서, 그러나 이를 “실행하기는 쉽지 않다”고 덧붙였다. 그는 “공동합의성(synodality), 곧 시노드의 여정은 하느님이 삼천년기 교회에 바라는 길이다. 공동합의에 바탕을 둔 시노드 교회는 듣는 교회로서 주의 깊은 청취는 그냥 듣는 것 이상이며, 사려 깊은 듣는 행위를 통해 서로 배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교회와 시노드는 같은 말”이라고 한 것처럼 하느님 백성 모두가 그리스도를 향한 ‘함께 걷는 여정’이 교회임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 안에서는 어느 누구도 다른 이들보다 높을 수 없으며 오히려 자신을 낮추어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시노드가 어떤 특정한 의사결정구조는 아니지만 ‘함께 걷는 여정’이라는 비유적 표현은 인간의 삶이 그렇듯이, 교회라는 공동체 모든 성원이 함께 살아가면서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서로 나누고, 대화하고 의논하며 때로는 함께 결정해 길을 찾아 나서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시노드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시노드 정신을 한층 더 고양시킨 진보적 재해석이다. 시노드의 최종 결정은 교황이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함께 걷는 여정으로서의 공동합의성이 단지 결정을 누가 하느냐보다 세세한 합의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런 까닭에 가정을 주제로 한 두 번의 시노드가 시작되기에 앞서 질문지를 먼저 배포해 평신도와 사제의 의견을 듣고자 했다.

이런 태도는 시노드라는 말의 의미를 설명하고 그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교황의 입장에서는 당연하다고 보인다. 함께 여행하려는 이들이 어떤 처지에 있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른다면 그 여행이 순조로울 리 없다. 그는 시노드 전에 하느님의 백성에게 묻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신념이 있다면서, “실제 가정에 묻지 않고, 이들의 기쁨과 희망, 고통과 어려움을 듣지 않고 가정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라고 묻는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시노드라 불리는 교회 안에서는 그 누구도 위에 있을 수 없다. 이는 그동안 ‘가르치는 교회’만을 강조해온 교회의 태도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느님 백성이 지닌 ‘신앙감각(sensus fidei)’에 대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배우는 교회’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하느님의 백성에게는 하느님이 교회를 위한 새로운 길을 만들어감을 식별하는 ‘코(신앙감각)’가 있으므로, 이들은 이미 일방적인 가르침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배워야 하는 존재다. 이제는 가르치는 교회와 배우는 교회를 엄격히 나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이해한다.

 

한국교회의 리더십 부재와 물신숭배

2014년 8월 한국에 온 프란치스코 교황은 방한 첫날 한국 주교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국교회 상황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이렇게 말했다.

 

예언자적인 복음의 증거는 한국교회에 특별한 도전들을 제기합니다. 한국교회가, 번영하였으나 또한 매우 세속화되고 물질주의적인 사회의 한가운데에서 살고 일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목자들은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준보다도 기업 사회에서 비롯된 능률적인 운영, 기획, 조직의 모델들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성공과 권력이라는 세속적 기준을 따르는 생활양식과 사고방식까지도 받아들이려는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이 세상의 지혜를 판단할 수 있는 힘을 잃어 헛되게 된다면, 우리는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 1,17 참조)

 

서울대교구는 2004년 ㈜‘평화드림’이라는 영리회사를 설립했다. OA기기, 가구비품 등의 영업으로 시작한 사업이 ‘평화상조’ 사업(2006년), ㈜평화종합건설 설립(2009년), 또 원외 물류 사업을 개시해 김포에 ‘통합물류센터’ 운영(2015년) 등으로 확장해왔다. 그러나 서울대교구는 지난 10여 년간 CEO 성직자들을 배출해내는 ‘자본가 교회’로 이동하면서, 한국천주교회가 강조해온 ‘노동자’의 교회, 가난한 이의 교회와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지는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이런 물질주의적인 세속주의 경향은 단지 서울대교구에 한정되지 않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수도권 교구들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 방한한 프란치스코는 주교들에게 “이 세상의 지혜를 판단할 수 있는 힘을 잃어 헛되게 된다면 불행할 것”이라고 우려하면서 복음과 십자가로 돌아가 깊이 반성하도록 촉구했다. 곧 교황의 이 말은 “성공과 권력이라는 세속적 기준을 따르는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에 익숙해진 서울대교구와 한국교회가 돈이라는 맘몬을 숭배하기를 그만두고 하느님을 다시 중심에 두라는 강한 비판적 메시지이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경고를 제대로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러나 상황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생각과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최근 천주교회가 운영하는 사업장과 관련한 여러 불미스러운 일들이 대중매체에 자주 오르내린다. 이와 관련해 청주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전 사무국장 김은순 씨의 1인 시위는 매우 시사적이다. 그는 2017년 8월 25일부터 교구청과 청주 시내 번화가에서 1인 시위를 벌이며 청주교구장에게 소통을 요구했다. 김은순 씨는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인천성모병원, 대구 희망원, 성가정입양원, 대구 파티마병원, 청주 사제 폭행사건, 충주성심맹아원 등 교회시설 안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보며, 요즘은 천주교 신자임을 떳떳이 드러내는 것조차 부끄럽고 죄스럽기만 하다”고 했다. 또 “교회로 인해 상처받고 억울해하는 사람들의 하소연에도 귀 기울여 주시고 소통해 달라”고 요구했다. 또 피켓에는 “김주희 양이 학대, 구타, 타살의 흔적을 남기고 죽었지만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며 “장애인 인권보장”, “진실규명과 책임자처벌” 등을 요구하였다. 이는 그동안 장애인, 소외되고 가난한 이의 인권과 정의를 외쳐온 천주교회의 이미지와 완전히 상반된다. 또 이런 일들이 한 교구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크다.

사실 그가 요구하는 소통과 대화는 청주교구 산하 ‘충주성심맹아원 김주희 양 사망 사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편지에서 보이듯 그가 열거한 사건들은 대구, 인천, 청주 등 여러 교구에서 일어났으며, SBS 〈그것이 알고 싶다〉(대구 희망원 2016.10.9, 충주맹아원 2017.8.12.)라는 대표적인 시사고발 프로그램에도 나올 만큼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들이었다. 그러나 어느 교구에서도 교구장이 피해자나 문제를 제기한 시민단체들과 대화에 나섰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끊임없이 대화나 소통을 요구하는 것은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소통하지 않는다면, 이는 교회 지도자들 스스로 문제해결 의지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다.

많은 이들이 지난 10년 동안 ‘명박산성’과 ‘503호 여인의 불통’을 아주 힘겹고 고통스럽게 겪어왔는데, 이와 비슷한 일을 교회 안에서 또다시 겪는 이 현실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렇게 본다면 한국천주교회의 개혁은 무엇보다도 리더십 부재를 극복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지금 같은 ‘하향식’의 임명으로는 청렴하고 능력 있는 지도자를 얻기 어렵다. ‘하느님의 백성’이 참여하는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지도자 선출제도의 도입과 확립은 점점 더 절박한 지상과제가 되고 있다.

 

평신도의 지위와 공동의사결정

그렇다면 여러 교회운영 사업장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리더십 부재는 단지 소통과 대화를 등진 지도자의 태도만의 문제일까? 과연 물신 숭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까? 멀게는 ‘꽃동네’부터 대구 ‘희망원’, 인천 ‘성모병원’, 대구 ‘파티마 병원’ 등 문제가 불거진 많은 ‘교회운영 사업장’은 지도자의 무능과 부정부패가 서로 뒤엉켜 있음을 보여준다. 이미 교회는 50년 전에 제2차 바티칸공의회라는 ‘새로운 오순절’ 혁명을 경험했고, 그 안에서 본당, 교구, 전국 단위로 하느님의 백성이 참여하는 논의구조를 제안했다. 지금 돌아보건대, 이를 충실하게 이행해왔다면 교회의 리더십 부재와 물신주의가 만나는 검은 고리를 차단하고 투명하고도 슬기로운 하느님 백성의 신앙감각과 지혜를 담을 수 있는 훌륭한 장치였을 것이다. 한발 나아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대표들이 참가해 함께 논의하는 ‘사목평의회(pastoral council)’를 ‘교구사목평의회’, ‘전국사목평의회’라는 이름으로 각 교구와 전국 대표기구로 설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현재 교구 조직도에도 사목평의회가 존재하지만, 명목상으로만 있을 뿐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 대부분 교구에서 교구장과 참사 몇 명으로 이루어진 단위에서 정책이 결정되는 관행이 ‘자연스러운 현실’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이러한 제안은 허망한 ‘이상’으로 보일 뿐이다. 그러나 이상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이지 그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우리가 제안하는 평의회는 단지 ‘자문의 역할’만이 아니라 함께 논의하고 함께 결정하는 진일보한 의사결정구조를 말한다. 적어도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공동체가 ‘교회’이며 누구나가 형제요 자매라고 부르는 ‘친교의 공동체’라면, 그에 걸맞은 의사결정구조가 필요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하는 ‘공동합의성(synodality)’에 바탕을 둔 공동 의사 결정 구조 역시 그것을 실천하는 기구가 되어야 한다. 나는 이와 관련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본당 사목위원회를 놓고 보면 충분히 합리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다. …… 사목위원들이 다수결로 결정하거나 민주적, 합리적 절차를 통해 결정할 수 있다. 사제가 결정권을 내려놓으면 된다. 교구 단위도 그렇다. 지금은 주교와 총대리, 참사 몇 명이 그들만의 리그에서 그 큰 교구의 정책을 밀실에서 결정한다. 이를 확 열어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논의한 대로 공동합의성에 기초해, 사제, 수도자, 평신도 등 교구 내 사람들이 초청된 전문가와 함께 모여 정책을 결정하는 게 왜 불가능한가? …… 전국 기구도 마찬가지다. 왜 주교회의, 주교들만의 회의를 통해 결정해야 하나? 공동합의성을 바탕으로 한 친교의 공동체가 된다면, 지금 서울대교구가 추구하는 물질주의적인 모습 같은 것은 분명히 제동이 걸릴 것이다.

 

공동합의기구를 향한 멀고도 험한 길

그러나 이 제안은 원칙적으로나 신학적으로는 맞는 말일지 몰라도 현실에서 실현하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우선 현실 교회법과 충돌한다. 잘 알다시피 평신도가 성직자와 함께 참여하는 조직이나 기구에서 평신도의 역할은 ‘자문’과 ‘보조’이지 결정을 내릴 권한까지 미치지 못하는 규정 때문이다. 이를테면 “사목평의회는 건의 투표권만 있고 교구장이 정한 규범으로 규제된다”(536조 2항) 또는 “본당 사목구마다 재무 평의회가 있어야 한다. …… 교구장이 정한 규범으로 규제되는 이 회에서 그 규범에 따라 선발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본당 사목구의 재산관리에서 본당 사목구 주임을 보필한다”(537조)라는 규정이 그렇다. 여기서 핵심은 교구장의 권한을 말하는 것으로, 그의 지시에 따라 평신도는 ‘건의’하거나 ‘보필’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이 법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에 어긋난다고 보고 ‘법 개정 청원운동’을 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평등이 보장되는 친교의 공동체로서 ‘하느님 백성’의 교회론과 공동합의성을 바탕으로 하는 시노드로서의 교회라는 정신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이번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건강한 탈중앙집권화’ 차원에서 전례문 번역 권한을 대폭 지역 교회에 이양하는 내용으로 교회법을 개정했다. 이를 보더라도 그의 교황직 아래에서 교회법 개정 가능성은 열려 있으므로 충분히 청원운동을 전개할 수 있다.

그럼에도 ‘법 따로 현실 따로’일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이를 받아들여 실행하는 주체, 곧 각 교구 수장들의 태도와 의지다. 앞서 말했듯이 교황은 “가정이 처한 상황에 대해 알고자 한다”며 실제 가정을 꾸려 살아가는 본당 평신도의 목소리를 반드시 전달하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한국교회 전체 교구는 본당에 이를 알리지조차 않았다. 부연하면 시노드를 위한 설문조사를 교구청에서 알아서 하거나 주교가 직접 써서 보내는 방식으로 처리했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아무리 교회법을 개정해봐야 소용이 없으므로 리더십도 함께 변해야 한다.

앞서 제시한 주교 선출을 위한 초기 교회의 전통, 곧 안셀모나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교부들이 하느님 백성의 선택으로 주교가 된 전통을 적극적으로 복원해 다시 살려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주교와 봉사자의 선출에 대한 충고’를 담고 있는 ‘열두 사도의 교훈집’으로 통용되는 『디다케』나 관련 성서구절, 이를테면 주교(감독)의 자격을 명시한 티모테오 1서(3,2-7)나 티토서(1,7-14) 등을 자료로 더 깊이 연구함으로써 신학적 정당성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대 레오 교황이 제안했던 것처럼, 한 주교 후보자를 놓고 평신도, 사제, 지역 주교들에 의한 선출과 동의, 축성이라는 절차를 제도화한 ‘점검구조’(check-and-balance system)에 대한 연구 등이 폭넓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 과거만이 아니라 현재 교회에서 지금까지 말해온 ‘함께 걷는 여정’으로서의 시노드를 가장 충실하게 실현한 모델을 찾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그 한 예로 필리핀 인판타 교구를 들 수 있다. 두 가지만 말하면, 우선 훌리오 라바옌(Julio Labayen)이라는 탁월한 지도자가 교구장으로 오랫동안 교구를 이끌었다는 점과 또 다른 하나는 한편으로는 평신도 지도자 양성과 최고의사결정기구로 ‘하느님 백성’ 모두가 참여하는 ‘인판타 사목평의회’를 설립했다는 사실이다. ‘주님의 발자국’이라는 뜻의 ‘야팍(YAPAK)’이라는 평신도 양성 프로그램은 21일 동안 함께 피정과 워크숍을 겸한 양성 코스로 1976년부터 2008년까지 지속되었다. 여기서 양성된 이들은 지역의 소공동체 조직 곳곳에서 활동가로 일하면서 본당과 소공동체를 이어주는 촉진자 역할을 했다. ‘인판타 사목평의회’는 야팍 과정을 수료한 평신도 대표들과 사제, 수도자가 함께 모여 교구의 정책을 토론해 결정하는 최고의결기관으로서 이를 30년 동안 실험해왔다. 라바옌 주교는 1970~80년대 독재자 마르코스 정부로부터 ‘빨갱이’ 주교라는 낙인이 찍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지역 NGO와 함께 소공동체를 일궜으며 공동의 합의와 절차에 바탕을 둔 사목평의회를 실현해왔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평등주의적’ 교구 운영방식에 반발한 사제들이 공개적으로 이를 반대하면서 인판타교구를 떠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4년 라바옌 주교가 은퇴한 뒤 지금까지 두 명의 주교가 인판타를 이끌어왔지만 여러 면에서 약화된 흔적이 보인다.

 

포기할 수 없는 ‘함께 걷는 여정’인 교회

나는 앞에서 지금처럼 한국교회를 포함한 아시아, 나아가 보편 교회가 리더십 부재로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주교선출제는 절박한 것이고, 이는 전혀 이질적인 제도가 아니라 교회 전통의 일부로서 성서를 비롯한 교회 문헌에서 이를 증거로 제시한다고 밝혔다. 이어 평신도의 참여를 더욱 적극적으로 하기 위한 지위의 문제로 단지 자문과 보조하는 데서 멈추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직자들과 더불어 본당에서부터 전체 교회의 정책 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관련 교회법을 개정하는 청원운동을 벌이자고 제안했다. 이와 함께 현재 많이 약화되었지만 인판타교구의 예를 들면서 공동합의구조로서 교구사목평의회와 전국사목평의회의의 실현은 그 어려움이 예상됨에도 가능하며, 나아가 미래 교회를 위해 반드시 실현해야 할 절체절명의 과제임을 강조했다.

최근 이러한 공동합의성을 바탕으로 한 의사결정기구 설립 가능성에 힘을 실어주는 소식이 다시 한번 프란치스코 교황에게서 들려온다. 교황은 지난 10월 15일에 전 아마존지역 교회의 요청에 응답해, 특히 아마존 원시림에 사는 500여 토착부족과 셀 수 없이 많은 동식물종의 보호를 위해 2019년 10월에 세계주교시노드 특별총회를 열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는 공동합의성이라는 시노드 정신을 세계 주교들에게 지속적으로 심어주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함께 걷는 여정’으로서의 교회가 이제 무제한의 개발로 신음하는 아마존 밀림의 토착민을 포함해 모든 생명체와 함께 걷겠다는 ‘시노드라는 교회의 사회적 확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결정이다. 교황은 “특별히 아마존 원시림의 파괴로 평화로운 미래를 내다볼 수 없는, 자주 잊혀지는 하느님의 백성인 토착민의 복음화를 위한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이 목적”이라고 시노드 개최의 의미를 밝혔다.

글을 마치며 두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하나는 앞서 말한 모든 교회개혁 의제나 제안이 단지 교구나 전국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라 작게는 심신단체에서부터 수도회까지도 해당된다는 사실이다. 특히 공동합의성은 현재 성소부족과 노령화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수도회가 용기를 내어 결단해야 할 사안이기도 하다. 앞으로의 방향과 전망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수도회라면 반드시 이러한 공동 논의와 합의의 구조를 통해 살길을 찾아야 한다. ‘집단지성’ 속에 활동하시는 성령이 길을 안내할 것이라는 강한 믿음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는 여기서 우리가 제안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공동합의성 개념은 그 근본정신을 바탕으로 평신도의 관점에서 재해석했다는 점이다. 이는 공동합의성에 대한 ‘왜곡’이 아니라 교회개혁과 관련해 마땅히 그래야 하는 방향으로 확장된 것으로서, 공동합의성을 늘 ‘하느님 백성’의 관점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는 교황의 관점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정녕코 성령을 믿는다면 변화에 우리의 온몸을 맡기자!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 소장. 저서로 『Asian Theology for the Future』(공저) 등을 쓰고, 『대승불교, 그리스도를 말하다』, 『지혜의 땅 아시아의 생명』 등을 옮겼다.

참고자료

배덕만, 「루터, 왜 만인사제주의를 말했나」, 종교개혁 497주년 기념포럼, 『데오스앤로고스』 2014.04.11.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주교들과의 만남(2014.8.14.) 연설문,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홈페이지 http://www.cbck.or.kr/bbs/bbs_read.asp?board_id=k1200&bid=13010686.

이와 관련해 ‘평화드림’ 웹사이트 참조. http://www.phdream.co.kr/cmm/main/mainPage.do.

강한, 「김은순 씨의 1인 시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7.08.31.

강한, 「논의는 그만, 이제 실천하자: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 소장 인터뷰」,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6.12.9.

한수진, 「교황청 가정생활 실태조사, 한국에선 어떻게 진행됐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4.01.13. 이 기사에 따르면, 15개 교구 중 12개가 사목전문가나 ME 임원 등에게 도움을 받아 교구 담당부서에서 작성했고 2개 교구는 누가 작성했는지 확인 불가이고, 1개 교구에서는 주교가 별다른 공유 없이 직접 작성해 보냈다.

『디다케』 15장 1절은 주교 선출에 대해 구체적인 충고를 적시한다. “여러분은 자신들을 위해 감독들과 봉사자들을 선출하되 주님께 합당하고 온순하고, 돈을 좋아하지 않고, 진실하며, 인정된 사람들을 선출하시오. 그들이 여러분에게 예언자들과 교사들의 직무를 수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양모 역주,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 디다케』(분도출판사, 1993), 97쪽.

“Leo I, POPE, ST”, New Catholic Encyclopedia(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2003) No.8, pp.474~478.; Thomas Reese, “Church reform requires decentalization, synodality”, NCR, 2016.2.11.

Gerad O’Connell, “Pope Francis announces special 2019 synod for the Pan-Amazonian region”, America, 2017.10.15. (https://www.americamagazine.org/faith/2017/10/15/pope-francis-announces-special-2019-synod-pan-amazonian-reg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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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신학연구소는 2006년 인판타의 활동가를 초청해 심포지엄을 열었다. 그때부터 현재까지 인판타 교구의 변화 상황에 대한 질의서를 보냈고, 인판타 중앙사무국의 닐본 빌라누에바(Nilvon Villanueva) 신부에게서 2017년 10월 19자로 답변서를 받았다. 그에 따르면 야팍은 유럽의 펀드지원이 끊기면서 2008년에 중단되었고, ‘미니 야팍’이나 다른 평신도 양성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소공동체는 지역사회와 지역 문제에 참여하는 소공동체에서 한국과 비슷한 ‘성서 나눔’ 공동체로 변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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