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수전 – 안녕하십니까, 저는 노인들의 똥걸레를 빠는 최현숙입니다

김옥자

2008년 여성 동성애자 1호 국회의원 후보로 종로구에 출마해 낙선, 2009년 진보신당 부대표 선거에 출마해 역시 낙선. 연이은 낙선 후, 이제는 돌아와(?) 80세 이상 할머니들의 구술사 작업을 하며, 요양보호사로 살아가는 진보정치 활동가 최현숙 씨를 만났다.

진보정치 활동가로서의 삶을 걸어온 최현숙 씨의 요즘 주된 활동은 ‘80세 이상 할머니들의 구술사’ 집필과 ‘요양보호사’ 일이다.

“구술사 작업은 2009년부터 시작했어요. 특히 80세 이상 할머니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건, 가정이나 사회 안에서 어쩌면 단 한 번도 권력을 쥐어보거나 주목되어보지 않았던 분들이라는 점에 착안한 거죠. 역사라는 건, 많이 배운 사람들, 권력 있는 사람들, 지금까지는 주로 남성들에 의해 정리되어온 게 일반적인데 그런 속에서 소외되었던 여성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역사 없는 인물의 역사’를 다시 써보자는 것이랄까요, 말할 기회가 없었던 분들의 목소리를 통해 이야기해보는 작업이 요즘 제가 주목하는 부분이에요.”

이미 대강의 작업이 마무리되어 하반기쯤 단행본으로 출판될 예정이다. 이후에는 50-60대 여성들의 구술사를 기획하고 있다.

요양보호사는 2008년 총선, 2009년 진보신당 부대표 선거에서 주 공약으로 내세웠던 ‘사회서비스 노동자들을 지역정치로 묶어내는 사업’의 일환이다. 사회에서 가장 소외받은 사람들과 끝까지 함께하겠다던 구호를 실행하는 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조직되지 않은 여성노동자들을 위한 일이 어떤 것일까 고민한 끝에 시작한 일이었다. 특히 돌봄 노동에 주목한 이유는 ‘자본주의를 확대시키는 노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노동은 자본주의를 강화시켜 주면서 그 일부인 내 밥값을 얻는 것이죠. 하지만 돌봄노동은 자본주의를 부자가 되게 하거나 강화시키지 않고, 폐기물을 만들지도 않으며, 사람을 만나고 사람과의 관계를 노동의 핵심으로 하는데다 구체적으로 만나는 대상자들이 장애인, 노인, 병자 등 사회적 약자가 대다수에요. 물론 그 중에는 경제적으로 부족하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경제적 풍요’만이 강자인가를 질문했을 때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런 노동이야말로 자신의 신념과 신앙에 맞는 것이라 생각했고, 중장년인 자신의 나이에서 효과적으로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방법이다 싶어 선택했다.

요양보호사의 일은 쉽지 않았다. 대상자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대부분은 살림을 대신 해주거나 목욕, 간병 등 상당한 육체적인 에너지를 요구한다. 간혹 정서적 대화 등을 원하시는 분들도 계신데, 최근 64세의 한 장애인 남성은 초졸 학력이지만 높은 지적 호기심, 인지력 등으로 영어, 중국어를 공부하시고, 인터넷도 배우고 싶어하셨다. 그래서 학습프로그램이 가능한 지역복지관 등과 연결시켜드렸고, 매우 행복해하시며 자신의 멘토가 되어달라고 하시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장애인들은 한 가정 안에서 의사결정권이 거의 없다. 부인 없이, 노모와 자식들과 지내시는 그분 역시 ‘그 나이에 그걸 배워 무엇하겠느냐’는 가족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요양보호사는 이용자의 결정이 가장 중요해요. 장애 남성은 가족들의 뜻을 따라야 하는 처지라 늘 가족관계의 권력관계나 분위기를 살펴드려야 하고 대상자 본인이 가장 편한 마음으로 지내실 수 있도록 고려해야 해요.”

간혹 퇴근길에 ‘내일부터 오시지 않아도 됩니다’라는 문자를 받기도 한다. 대부분 이용자의 가족들이다. 센터장이나 회사 사장의 해고라면 문제를 삼을 수 있지만 이 경우엔 항의조차 어렵다. 그래서 간혹 요양보호사가 맘에 안 드는 센터장은 수급자에게 요양보호사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하거나 용돈을 주면서 우회적으로 해고를 종용하는 경우도 있다.

요양보호사는 어떤 분들이 신청할 수 있는 걸까?

“2008년부터 모든 국민들이 내는 의료보험에 0,65%의 장기요양보험료가 포함되어 있는데 그게 노인장기요양보험을 지속시키는 물적 토대에요. 노인은 65세 이상이면 수급 신청을 할 수 있고, 65세 이하라도 치매, 중풍 등 질환으로 거동이 불편한 분들이 신청할 수 있어요. 동사무소 등에 신청하시면 공단에서 사회복지사와 간호사 등이 실태 조사를 나오고 심사평가위원회에 보고하면 1-3 등급으로 등급을 나눈 후 각각 90-110만 원 정도의 서비스를 받게 되요. 그 중 방문 서비스는 15%를, 시설로 들어가면 20%를 자가 부담하죠. 차상위계층의 자가부담금은 절반, 기초수급자는 무료이구요.

그래서 방문 서비스의 경우, 80시간 정도로 일주일에 5일, 하루 4시간 정도씩 방문하는데, 임금 수준은 시급 4,860원, 여기에 이런저런 수당 포함하고, 4대 보험 적용하면 약 50만 원 정도 받게 되요. 경력이나 노동강도에 따른 임금차등은 전혀 없구요.”

평생 살림만 해온 50-60대 여성들이 반찬값이나 애 과외비라도 벌려고 나온 경우가 많다보니 임금상승에 대한 요구보다는, 대부분 이 일이라도 어디냐 하며 일한다. 그러다보니, 민영화된 센터들은 노인유치 경쟁을 하고 수급자를 많이 확보하기 위해 개인부담 15%를 깎아주는 등 무리한 조건을 내세우기도 한다. 그렇다고 자기 살 깎는 출혈경쟁은 아니다. 100시간을 가야 하는 노인에게 80시간만 가게 하고, 빈 20시간까지 포함해 100시간으로 보고를 올리면 손해도 없고, 노인 입장에서는 보고를 어떻게 했는지 관심도 없고, 알 수도 없다.

게다가 센터운영은 신고제라 따로 자격조건도 까다롭지 않다. 사회복지를 전공했거나 노인요양보호사 경력 5년, 정해진 사무실 평수에, 요양보호사 15명만 리스트로 가지고 있으면 누구나 가능하다. 그래서 신고할 때만 사무실을 차려놓았다가 자기 집 방 한 칸에 컴퓨터 하나 놓고 운영할 수 있다. 그런 처지니 영세한 센터가 난립하고 요양보호사 임금을 주지 못해 폐업하면 다시 대표자 이름 바꾸면서 계속 새로 신고한다.

결국 노인요양보호를 위해 국가가 일괄적으로 강제 집행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운영을 민영화하고 관리감독 역시 제대로 하지 않다보니 수급자 노인들도, 요양보호사도 보호받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노인을 대하는 일이 쉽지 않을 텐데 최현숙 씨만의 노하우가 있을까?

“할머니들은 평생 어떤 권력도 안 가져 본 분들이에요. 그러다 말년에 유일하게 나와의 관계에서 권력을 가져보시는 거죠. 그래서 저는 일단 마음에 쿠션을 깔아놓고 그분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그분의 권력을 인정해드리려고 해요.”

젓가락이 없어졌다, 고추장이 없어졌다, 쌀이 없어졌다 하시는 할머니에서부터 욕하고 때리는 치매노인까지 상황은 다양하다. 그 중 최근에 겪은 한 가지 일은 최현숙 씨에게 큰 교훈을 남겼는데, 일명 ‘밍크코트 도난 사건으로 본 요양보호사 본분 확인하기’랄까?

안국동에 사는 비교적 중상층 노인부부가 계셨다. 요양보호 신청자는 할머니셨는데 노인 두 분만 살다보니 대부분 대문을 철저히 잠그지 않으셨다. 최현숙 씨는 보통 아침 9시-오후 1시까지 근무를 했고, 할머니는 3등급이었지만 혼자 활동이 가능하신 정도.

두 달 정도 일했을 때였다. 다른 때와 같이 최현숙 씨는 1시에 퇴근을 했고, 할머니는 1시 20분쯤 한의원에 침을 맞으러 가셨다. 그런데 골목에서 처음 보는 여자가 친한 척을 하며 ‘할머니, 추운데 왜 밍크코트 안 입고 나오셨어요.’ 했고, 할머니는 무심히 지나치셨다. 그리고 그 여자는 열린 대문으로 들어갔고 마침 집에 계셨던 할아버지가 인기척에 최현숙 씨인가 싶어 ‘아줌마야’ 물었지만 대답이 없어 나와 봤더니 처음 보는 여자가 신발을 신고 마루에 올라와있더란다. 누구냐고 물어보니 ‘할머니가 춥다고 밍크코트를 가져오라’고 했다며 코트를 찾기에 한의원에서 보냈나 하곤 아예 꺼내주시기까지 하셨다. 결국 할머니가 돌아오시고 도둑맞을 걸 아셨는데 엉뚱하게도 두 분은 그 여자와 최현숙 씨가 공모한 것으로 생각하셨다. 밍크코트는 천만 원 상당의 고가.

다닌 지 두 달 정도 된 집이었고, 그동안 최현숙 씨에 대한 인상이 좋았던 터라 두 분은 아닐 거란 생각을 하면서도 한번 의심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최현숙 씨가 신고하자고 해도 귀찮다고 하시며 불편해하셨다. 결국 그만 두는 게 그분들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는 것이다 싶어 그만 두셨고 집에 와 통곡을 하셨다.

“한참동안을 울고 나서 생각을 정리해봤어요. 내가 당한 이 일은 어쩌면 싸구려노동을 하는 수많은 여성들이 노상 당하는 일일 텐데 나는 왜 운 걸까? 결론은 ‘취급’ 때문이었어요. 나는 내 노동에 대해 자긍심이 있었다고 말해왔지만 다른 사람이 내 노동을 천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과 시선에는 취약했던 거예요. 흔히 요양보호사들은 ‘우리는 파출부가 아니다’라고 말해요. 하지만 그 말은 또 다른 비하발언이거든요. 사실 요양보호사는 노인들의 똥걸레를 빨기로 한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똥걸레를 빠는 게 마땅한 건데 사회가 보는 시선은 ‘똥걸레나 빠는 여자’로 취급하니까 그게 힘들었던 것이죠.”

‘나는 다르다’는 걸 인정받고 싶었던 마음, 아버지와의 갈등은 있었지만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나 큰 어려움 없이 배울 만큼 배우고 누리고 살아왔던 자신이 가난 속에 들어가 그들과 어울리고 구분되지 않게 살고자 했지만 여전히 자신 안에는 허영이 있었다는 것이다. 도둑사건이 깨닫게 해준 핵심적인 지점이었다.

결국 최현숙 씨가 일련의 일들을 겪어내는 건 그가 끊임없이 이야기해온 정치적 신념의 일환이리라. 하지만 가정학과 출신에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온 그녀가 정치에 뜻을 두게 된 데는 무슨 계기가 있던 걸까?

“전 순전히 ‘예수’에요. 대학 때도 ‘내가 확신하는 길, 나에 대한 것’을 찾는 게 가장 중요해서 학생운동은 꿈도 꾸지 않았어요. 그리고 당시에 학생운동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말은 맞지만 폭력에 똑같이 폭력으로 대처하는 방식에는 동의할 수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때도 희한했던 건, 마음속에 늘 종교적 추구가 있었어요. 인간의 약함으로 인해서 절대 진리가 필요했던 건데 그게 예수라도 좋고 부처라도 좋았어요. 그런 중에 불쑥 불쑥 예수가 툭 튀어나와 ‘나 여기있다’ 이러기도 했죠. 그래서 같이 생각하기도 하고, 같이 가면 편할 것도 같았는데 그래도 나는 아직 아니였던 거예요. 그러면서 든 생각은 ‘돌아온 탕자’였어요. 세상 온갖 힘든 것을 돌아보고 온 사람이 집에만 있던 사람과는 다를 거다. 그 사람은 세상을 그대로 두고 살지는 않을 거다. 어쩐지 저는 그런 탕자로서, 개인적인 인물이 아닌 사회적인 인물로 살 거란 생각을 하곤 했죠.”

이후 결혼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서야 가톨릭 신자였던 남편과 함께 성당에 가기 시작했고, 드디어 빠져들기 시작했다. 성당에서는 ‘빈첸시오’ 활동을, 사회적으로는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연합 산하의 장기수가족후원회에서 대표까지 맡았다. 이후, 그는 끊임없이 발생하는 가난이나 모순의 피해자와 함께 하는 것을 넘어서는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자연스레 민주노동당 창당에 같이하게 되었다. 결국 최현숙 씨에 정치는 곧 자기 신앙의 실천이었던 것이다.

‘내가 왜 이럴까’에 대해 늘 생각하며 자신의 행동과 삶에 의문을 갖는 사람은 관성에 젖기 어렵다. 그래서일까, 최현숙 씨가 생각하는 정치는 ‘설득’이란다. 정치는 별수 없이 득표로 결정되기에 제도정치 속에서는 ‘주장’보다 ‘설득’이 유리하다는 생각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에 대해 옳고 그름을 떠나 인정하면서 경합하고 차근차근 설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현숙 씨의 이메일 아이디는 ‘깬다’라는 단어다. 무얼 그리 깨고 싶은 걸까? “근본적으로 난 저항적인 인물인 거 같아요. 꼬맹이 때 시골 할아버지댁에 가서 큰 절을 하라고 하면 그게 그렇게 싫었어요. 왜 그럴까 나중에 생각해보니 한 인간이 다른 인간 앞에 몸을 온전히 엎드려 절하는 행위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더라구요.”

그에게 예수는 굉장히 실존적인 존재다. 일상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상의하는 존재, 이야기 할 수 있는 존재. 그래서 그의 기도는 매일, 매시간 이루어지는 생활과 맞닿아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랑 끊임없이 싸우며 보내던 청소년 시절, 그를 괴롭혔던 또 다른 문제는 액취증이었다. 결국 그 두 가지 문제로 외향적인 그가 이중적으로 자기 속에 갇혀 살았고, 그런 상황이 그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돌아보게 했단다.

“주변에 대한 시선을 살피면서 누가 소외되어 살고 있나를 우연히 보게 된 거죠. 안 그랬으면 그저 부잣집 딸로 그냥 편하게 살았겠죠. 그래서 전 그 증세를 통해 십자가가 은총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었어요. 그 중 지금은 헤어진 남편을 통해 제일 중요한 가난을 만날 수 있었구요.”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면서 최현숙 씨는 오랜 목마름이 해갈된 느낌이라고 했다. 정치나 요양보호 등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의 첫 번째 정체성은 예수쟁이였는데, 지금까지는 늘 정치적인 이야기만 하다 보니 이런 이야기를 충분히 해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란다. 예수는 그에게 삶의 지표이고 푯대다. 그래서 예수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 그에겐 즐거운 일이라는 것이다.

“서른세살 때였어요. 예수가 죽었던 나이죠. 그때 제가 예수에게 말했죠. ‘당신은 그 나이에 죽어서 얼마나 좋냐’. 그 이후로도 혼돈이나 큰 유혹이나 어려움 앞에서 깨지고 많이 울기도 했지만 단 한 번도 다른 길을 생각한 적이 없었어요. 10-20대 그렇게도 저를 고민스럽게 했던 ‘나’ 자신도 찾았고 무엇보다 지금은 예수님이 늘 제 옆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무엇이 되느냐는 중요하지 않고, 어디서 무엇을 하느냐가 효과적인가 하는 것만 생각하게 되었어요.”

5형제 집안의 큰딸로 태어나 아버지와 매일 부딪치고, 세상에서 말하는 가치관은 못 믿겠고 그렇다고 자신의 가치관도 정립되지 않은 시기, 한마디로 질풍노도에 혼돈의 시간을 지냈던 소녀는 이제 당당한 진보정치 활동가이자 여성, 신앙인으로 살고 있다. 남들이 ‘똥걸레나 빠는 사람’으로 ‘취급’을 하든 말든 최현숙 씨는 자기 신앙, 자기 신념으로 매일매일이 행복하기만 하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3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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