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프란치스코 교황의 큰 울림, 우리가 가야 할 길 – 권순남

권순남

우리 시대에 알맞은 봉헌생활을 고민하며

어느 해 보다도 짧았던 여름 한가운데 이 한반도에 깊고 그윽한 향기를 내신 한 분이 다녀가셨다. 온 국민이 환호하며 감동하였고 그분을 사랑하게 되었다. 아니 처음부터 사랑과 존경을 깊이 받고 계셨던 분이었다. 내게는 교종이 한국을 다녀가신 모든 행보가 예루살렘 도성에 입성하셨던 예수의 이미지와 겹쳐 생각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예수께서 군마가 아니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자 겉옷과 나뭇가지를 꺾어 길에 깔고, ‘호산나’를 외쳤던 군중들의 환호, 교종이 가시는 길에 방탄막이 없는 나귀 같은 소형차를 타시고 눈과 눈을 가까이 마주치시며 일일이 손잡아 주시고 답해 주셨던 그 길이 그렇게 닮아 있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그렇게 환영하고 맞이했을까? 사람들은 무엇을 기대했기에 그렇게 환호하고 자기들의 옷을 벗어 길에 깔았을까? 입성 후 예수는 그들의 기대를 충분히 채워 주셨는가? 그 뒤에 예루살렘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가? 이번 교종의 방한이 그 일을 많이 닮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교종은 우리에게 많은 향기와 숙제를 남기고 떠나셨다. 그분의 빈자리에서 서서 아직도 향기에 취해 있기만 한 사람도 있고 우리에게 주신 숙제를 하려 맘 다잡고 출발하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이 땅의 천주교 여성수도자 10,000여 명, 남성수도자1,500여 명은 그분 방한을 통해 들려주신 여러 말씀을 되새기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봉헌 생활자들로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깊어진다.

필자가 봉헌 생활을 하는 동안 당황스러웠던 점은 ‘수도자가 거리에 나와 미사를 한다. 집회에 나와 있다, 억울한 사람을 손잡아 주는 일, 공감해 주는 일마저도 정치활동을 한다.’는 등의 부정적인 반응을 자주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수도자들이 봉헌생활의 당사자인데 타인들이 수도자의 행동에 대한 평가 기준 표를 제시하고 있었다. 심지어 수도회 안에서도 같은 현상을 볼 수 있었다. 봉헌 생활(VITA CONSECRATA)을 하는 이들을 수도자라고 번역한 한국말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본다. 한국에서의 수도자들이란 말은 영적이고 관상적이고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중세 관상수도회적인 개념이 지배적이다. 한국에서 오래전부터 속세를 떠나 산속에서 불교의 수도생활을 해 왔던 스님들을 생각하는 그런 개념이었다. 1600여년에 이르는 수도회 사를 훑어보면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내용은 사도직 수도회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처음에는 사도직 수도회는 수도회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 그런데 시대가 요청하는 성령의 이끄심으로 새로운 봉헌 생활양식이 탄생하게 되었고 지금은 전 세계에 셀 수도 없는 사도직 수도회가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번역과정에서 ‘수도자(修道者)’라는 한정적인 단어로써는 행동하고 실천하며 예수를 따르는 남녀제자로서의 의미를 다 포함할 수가 없다. 이렇게 번역되는 바람에 제한된 의미의 수도자 개념이 교회 안팎에서, 아니 우리 수도자 자신에게마저도 정체성과 행동에 대한 혼란을 일으키며 좁은 개념의 울타리 속에 묶어둘 때가 있다. 수도자란 수도원 안에서의 깊은 침묵, 수도규칙을 철저히 지키며 복음 삼덕, 정결과 가난과 순명을 실천하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인식,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헌장이 제시한 내용과 교황청에서 발간한 사회교리에서의 가르침,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종이 전체 하느님 백성에게 권고하시는 내용을 담아 행동할 수 없도록 수도자들을 수도원과 본당, 기관 안으로만 가두려 한다. 그래서 수도자의 정체성을 오해하는 많은 이들은 사회, 정치문제에 대해 관심을 두거나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제, 수도자에게 철저한 금역 구역을 지정하여 관심을 기울이거나 넘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교종은 복음화의 사명은 개인의 일이 아니라 부르심의 목적이며 주님의 일이라고 말씀 하시며(12항) 예수와 인격적으로 만나고 열린 마음을 가져서(3항) 예수 복음의 핵심인 하느님께 응답하고 다른 이들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다른 이의 선익을 추구하라고 하시면서 그리스도교의 덕만 강조하거나 윤리적 차원에 머물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복음은 그 이상이라는 것이다(39항). 교회는 가장 가난한 이에게, 자주 멸시당하고 무시당하는 사람들, 우리에게 보답할 수 없는 이들에게 다가가야 한다(48항). 배척의 경제, 돈의 우상화, 폭력을 낳는 불평등, 세속화는 안 된다고 하시며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처럼 공감능력이 뛰어나야 하고 ‘함께 아파하기(COMPASSION)’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교종은 방한 전에 당신의 가르침, 메시지 내용에 관심을 가져 달라고 이미 부탁하셨다. 누구보다도 이 시대의 문제와 아픔을 간파하고 계신 그분께서 전 세계를 향하여 불의한 제도나 가난한 사람을 양산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해 거부하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이 시대 수도자는 더더욱 시대의 문제와 징표를 바르게 알아야 하고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전례, 기도, 성사는 우리 구원의 중요 요소이지만 중독된 사람들이 너무 많다. 예수 자신의 삶, 복음으로 돌아가서 모든 기준이 예수여야 하기 때문에 중독증으로는 새 출발이 어렵다. 그분의 뜻을 알아듣고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시작해야 하는 근본적인 부르심이 출발점이다.

우리 시대에 봉헌생활자들이 고민해야 할 몇 가지에 대해 제시해 본다.

우선 2012년에 열린 세계 주교 시노드의 6개 연구 분야이기도 했던 사회, 정치, 문화, 과학, 경제, 대중 매체 분야 안에서 수도자들이 문제점, 전망, 징표를 바로 알 수 있도록 심도 있게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복음의 등불을 들고 나가야 할 삶의 터전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올바르지 못한 정보로는 빛을 비출 수가 없다. 교종은 방한 중 수도자들과의 만남에서 그리 부탁하셨다. “여러분 자신을 위하여 봉헌 생활을 간직하지 말고 사랑받는 이 나라 곳곳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가 봉헌 생활을 나누십시오.”

둘째, 한국에서 126년 동안 여성 수도자들이 본당에서 많은 예비신자 교육을 해 왔다. 그러나 거기에 중요한 내용이 빠져 있었다. 사회교리가 아예 생략되어 버린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예수께서 이 지상에서 친히 하셨던 구원의 방법들과 가르침이 예비신자 교리 때부터 반드시 첨가되어야 한다고 본다.

셋째, 수녀들에게 많은 시간과 기회가 주어지는 훈화, 한 말씀, 강의, 평신도 재교육 안에서 일반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예수와 복음이 빠진 단순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달해 주는 시간이 아니라 복음 자체, 교회 가르침, 공의회 문헌, 교황문헌, 교황청 문헌 등을 적극적으로 나누고 교육해야 한다.

넷째, 수도회별로 현실참여와 사회 복음화에 대한 사안의 온도차가 아주 심하다. 그리하여 남녀수도자 장상 연합회 총회나 모임에서 이 시대의 깨어 있는 수도회의 살아가는 모습과 활동, 참여, 연대들을 더 잘 나누고 소개하여 깨우쳐주고 서로에게 복음의 기쁨으로 자극을 받는 그런 모임들이 되어 한국 수도회 전체가 같은 마음으로 연대하고 새로운 용트림을 시작하면 좋겠다.

다섯째, 수도회가 너무 커서 조직, 행정, 경영, 통제, 법규, 규칙으로 꼼짝달싹 할 수 없는 큰 공동체들의 대안으로 이 시대에 필요한 깨어 있는 작은 공동체가 많이 생겨나 교종의 간절한 요구를 담아냈으면 한다.

교종은 그분의 사목적 권고 1장에서 “더는 미룰 수 없는 교회 쇄신”이라고 표현하셨다. 이 시급한 요청에 방한하셨던 교종의 메시지에 한국 수도자들이 가장 먼저 앞장서 나가면 좋겠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예수를 향해 겉옷을 깔아 드리고 호산나를 외쳤던 백성들이 자기들이 기대했던 예수가 아니었음을 알고 얼마 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분노에 찬 비명을 질러 댔다. “비바 파파”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지만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세월호 유가족을 위한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니는 것조차 정쟁 논리로 몰아가고 가장 작고 아픈 이들에게 나서서 비방하고 수도자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고 비뚤어진 개념의 칼을 동료들에게 들이대는 그런 잔인한 수도자들은 되지 말아야겠다. 교종은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와 울림을 주고 떠나셨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들의 삶의 몫이다. 그분은 두려워하지 말고 첫걸음을 내딛고 뛰어 들고 함께 가며 열매 맺으라 하셨다 (23항). 그분의 말씀을 나도 인용한다. “자 이제 출발합시다! 복음의 길로, 기쁨의 길로! 수도자들부터!”

권순남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대구관구 소속. 대구대교구정의평화위원회 위원, 한국교회 내 평신도와 사제, 수도자 재교육에 소명을 느껴 관련된 일을 하고 있고 10여 년 동안 다양한 신자 재교육과 대학생, 수련수녀들에게 강의 중이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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