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프란치스코 교황의 큰 울림, 우리가 가야 할 길 – 이장섭

이장섭

길 위에서 깨어나는 평신도

2014년 여름을 길 위에서 보냈다. 세월호 유가족 도보순례 기사를 보고 달려간 것이 계기였다. 자동차가 휙휙 지나가는 도로에는 두 아버지와 누나 그리고 나처럼 SNS에서 소식을 듣고 동참한 두 사람이 ‘하루속히 가족 품으로’ 깃발을 들고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졸지에 사랑하는 자식을 잃어버린 아버지는 한쪽 어깨에 십자고상을 메고 있었다. 안산에서 진도 앞바다까지 무작정 길을 나선 그 기막힌 사연을 바라보자니 목울대로 묵직한 울음덩어리가 넘어갔다. 나중에는 각 지역의 시민단체, 노동자와 학생들, 수도자와 사제들, 그리고 신자들이 참여하여 전주 시내를 행진할 때는 무려 700여 명의 대인원으로 불어났지만, 진도 앞바다를 거쳐 대전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을 만나겠다는 유가족들의 걸음걸이는 부르튼 발바닥과 위험한 도로와 외롭고 막막한 길에서 시작되었다.

8월 15일, 그들의 종착지인 대전 월드컵 경기장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을 처음 만났다. 교종은 삼종기도를 통하여 세월호 사건을 언급하며 그들을 지지해온 사람들을 격려하였다. “모든 한국 사람들을 슬픔 속에 하나가 되게 한 이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서 공동선을 위해 연대하고 협력하는 사람들의 헌신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음 날, 광화문 광장에서 입장하는 교종의 카퍼레이드를 지켜보고 있었다. 교종은 퍼레이드를 잠시 멈추고 차에서 내려 40여일 째 단식 중이던 세월호 유가족 김영오 씨의 손을 잡고 그의 편지를 당신의 주머니에 받아 넣었다. 그 순간, 전광판으로 교종과 김영오씨가 손을 맞잡는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일제히 탄성을 올렸다. 그 감격을 간직한 채 해미성지에서 열린 아시아 청년 대회 폐막 미사에 참석했다. 교종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죄와 유혹, 또 그러한 압력들이 복음의 기쁨과 성덕의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합니다.”라고 결론을 맺으며 “Wake up!”(깨어나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그 말이 “평신도여, 깨어나라!”로 들렸다. 내가 너를 어떻게 불렀는지 아느냐는 하느님의 음성이었다.

교종이 누차 강조하며 칭송한 것처럼 한국 가톨릭은 18세기 외부 선교사의 도움 없이 이 땅백성들의 자발적 활동으로 들어왔다. 당시 조선은 정치적으로는 당파가 대립하고 경제적으로는 관료의 부패와 양극화가 심각하였으며 이에 따른 신분질서의 붕괴로 사회 질서가 동요되던 시절이었다. 이런 때에 여러 측면에서 그 대안과 수정을 모색하던 조선의 학자들이 조선천주교회의 창립 주역이었다. 달레의 『천주교회사』에는 신앙의 선조들이 하늘, 세상, 인성 등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해결을 탐구하기 위해 강학회를 하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학자들의 의견을 토론하고 성현들의 윤리서를 연구하였으며, 서양 선교사들의 철학, 수학, 종교에 관한 책들을 검토하고 그 깊은 뜻을 해독하고자 온 주의를 기울이다가 천주교 도리를 조금씩 깨닫는다. 그리고 새 종교에 대하여 아는 것은 온 마음과 뜻을 다해 실천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된 천주교가 조선의 개혁을 꿈꾸던 학자들과 민중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의 삶을 바꾸고 오늘의 한국 가톨릭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박해시대가 끝난 후, 교세의 확장과 안정적인 신앙생활을 위해 교회지도자들은 정교분리라는 조약을 맺어 국가와 교회가 자기의 고유한 영역을 지키는 한, 서로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신앙 제일주의, 선교 제일주의, 교회 보호주의를 선택하였다. 유신 치하와 80년대 가톨릭의 일부 사제들과 신자들이 민주화에 이바지한 일은 부인할 수 없지만, 한국 가톨릭이 일치하여 정의와 평화를 위해 싸운 것은 아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교회의 일은 헌금을 모아 아름다운 성전을 짓고 성직자들을 잘 모시며 주변 사람들을 신자로 만드는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신심을 깊이하기 위해 성서를 읽고 묵주기도를 바치며 미사참례와 성사생활을 잘해서 마음의 평화를 누리는 데 중점을 두었다. 어쩌면 이렇게 착하고 순한 양들이 되었을까? 세상과 분리된 교회 안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교회는 나날이 늘어나 2013년 현재 본당 수가 1,668개이고 등록 신자는 5백40만을 넘어 전체 인구의 10%가 되었다. 세계에서 47번째로 신자가 많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총 신자 대비 주일미사 참여율은 21.2%에 불과하고 냉담 교우는 주소확인자와 거주 미상자를 합쳐 30%에 육박한다. 영세 받고 난 후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신자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어쩌다 이렇게 힘없는 교회가 되었을까? 세상과 분리되고 현실 생활과 멀어진 교회는 힘이 있을 수가 없다. 조선 후기 무교(巫敎)가 천주교 수용에 미친 영향을 연구해 온 이대근 신부는 한국에 들어온 모든 외래 종교가 무교에 의해 현실주의적 제재초복(除災招福: 재앙을 없애고 복을 구함)의 종교로 변질하였듯이, 19세기의 천주교도 이러한 양상을 보였다고 말한다. 무병장수와 현세부귀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무교의 신앙심이 내세 지향적이고 얀세니즘적인 프랑스 선교사들의 성향과 결합하여 현실과 유리된 채 교리 실천에 치우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신앙 선조들의 치열한 진리 탐구 정신과 실천의식, 이들의 가르침을 새로운 세상의 이상으로 이해하고 국가 폭력에 저항하며 목숨까지 바치던 민중들의 갈망은 점차 사라져갔다. 그리하여 현실 참여를 외면하고 정치권력과 타협하는 교회정책에 순응하여 점차 ‘교회 안의 신자’로 적응해 왔다. 우리가 사는 지금 여기의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자는 결기가 사라진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신앙인이 도도하게 밀려드는 물질주의, 개인주의, 향락주의의 물결을 피해갈 수 없었고, 부도덕하고 무자비한 제도들에 맞서 윤리적 삶을 요구할 용기를 낼 수 없었다. 그러니 교회 안의 생활인들 신이 나겠는가? 예수의 정신이 제대로 살아나겠는가?

프란치스코 교종의 “일어나라!”는 외침은 이 모든 어리석음과 무력함을 극복하고 신앙 선조들의 염원에 응답하며 평신도로서 자부심을 가지라는 권고였다. 가난한 이들, 고통받는 이들을 찾아 섬기는 교회가 되라는 요청이었으며, 정치권력의 압박과 경제적 불평등에 저항하고, 자연환경의 보호에 앞장서라는 가르침이었고, 교회 안팎의 개혁을 통해 이 땅에 정의와 사랑이 넘치게 하라는 간절한 호소였다.

그렇다면 프란치스코 교종을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음성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우선 개인적으로는 주체적인 평신도로서 거듭나야겠다. Y. Congar가 말한 것처럼 “평신도는 세속이 노력하고 추구하는 것에 응하여 발언함으로써 교회를 풍부하게 할 수 있다”는 자부심으로 신학의 좁은 시야를 벗어나 진정으로 진리란 무엇이며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할 바른 윤리는 무엇인지 폭넓게 배우고 한 걸음씩 실천해야겠다. 또한, 교회 공동체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이 땅의 불의와 불평등이 사라지고 정의와 평화의 세계가 올 수 있도록 현장 속에서 복음의 기쁨을 나누고 싶다. 본당공동체의 사목활동에 사회복지나 자선사업과 함께 정의와 평화 위원회가 구성되어 “밖으로 나가는 교회”, “야전 병원으로서의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면 좋겠다. 나아가 교회가 세상의 선한 이들과 더욱 힘차게 연대하도록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다. 이 땅에서 나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하느님 백성이라는 마음으로 그들과 함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디딤돌이 되고 싶다.

지난여름, 우리는 아파하는 자와 아픔을 나누고자 종교와 나이와 지역을 가리지 않고 함께 걸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간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던 때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정녕 평신도는 길 위에서, 우리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의 백성으로 깨어난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방한을 통하여 우리를 깨어나게 하신 천주여, 우리 안에 선한 것을 자라게 하시고, 자란 것을 자애로이 지켜주소서. 아멘.

이장섭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 충남 아산의 사회복지 현장에서 일하며 주님을 찾고 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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