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인물 열전 – 나락 한 알 속 우주, 그 광활함과 섬세함의 영성- 무위당 장일순 <1>

황경훈(아시아 평화 연대 센터장)

나락 한 알 속 우주, 그 광활함과 섬세함의 영성
– 무위당 장일순 <1>

‘청강(靑江)’, ‘무위당(无爲堂)’, ‘일속자(一粟子: 조한알)’, ‘일초(一草)’, ‘일충(一蟲)’…장일순 선생의 인품과 삶에 대한 생각과 태도를 그대로 보여주는 그의 호다. ‘一’ 자가 눈에 띄고 물과 무위처럼 노장사상의 냄새도 짙게 풍긴다. 그의 제자인 김지하의 싯구처럼 한포기의 풀이나 낱알, 벌레도 넘어서 그늘진 응달에 핀 난의 향기 속으로 돌아간 지 20년이 지난 오늘, 선생을 다시 불러내어 ‘한 말씀’을 청하는 것은 목가적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시류 때문은 아니다. 그런 대책 없는 낭만을 넘어 거침없는 광활함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우주론과 더불어 그토록 섬세한 생태적 감수성으로 온갖 미물과 연대를 실천했던 선생의 삶이 오늘날 우리가 필요로 하는 영성, 곧 영적 진보의 길이라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정작 장일순은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니었고 그렇기에 직접 책을 집필해 남기지도 않았다. 선생은 이름만으로도 알만한 많은 인사들의 정신적 지주요 스승이었지만, 늘 앞에 나서는 일이 없었기에 오히려 세인들에게는 평범한 가톨릭 평신도 지도자였다. 무위당 장일순을 알아 가면 갈수록, 샘솟는 샘물과 같이 더 깊은 수원이 있음을 발견한다. 따라서 우리가 하려는 이야기는 소박한 것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후학들이 해야 할 일을 일별해 보는 것은 글을 여는 이 대목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제자 가운데 하나인 소설가 김성동이 제안하는 후학이 해야 할 일의 목록은 이렇다.

“몽양의 제자로 입문하여 사회주의 사상에 눈뜨게 되는 과정과 죽산(竹山)과의 이음고리가 맨 먼저 애바삐 밝혀져야 하고, 가학(家學)으로 몸에 밴 유가철학과 가톨릭과의 이음고리, 유학과 동학의 이음고리, 동학과 가톨릭과의 이음고리, 유학과 코뮤니즘과의 이음고리, 동학과 코뮤니즘과의 이음고리, 동학과 주체철학과의 이음고리, 귀독반정(歸督反正)하게 되는 과정, 사회대중당으로 대표되는 4.19 직후 혁신정당과 몽양, 죽산과의 이음고리, 깊이 들어갔던 것으로 보이는 간디즘과 코뮤니즘과의 이음고리, 동학과 민족문제, 계급과의 이음고리, 동학 가운데서도 해월의 ‘밥사상’과 민족문제를 넘어선 인류문제, 지구문제, 생태계문제와의 이음고리…….”

이쯤 되면 장일순은 혼자서 파야하는 샘물이 아니라, 여러 후학이 그의 다방면에 걸친 행보와 사상의 지류를 하나씩 파 들어가 어떻게 장일순이라는 하나의 커다란 강으로 만나는지를 보아야 할 것이라고 수정해야 한다. 따라서 이 글은 장일순을 소개하고 표피적인 수준으로 그의 생명사상의 영성적 측면을 탐색하는 데에 만족하는 것으로 한다.

무위당 장일순은 험난하고 어두운 시기였던 1970년대에는 지학순 주교와 함께 반독재 투쟁을 이끌어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떠올랐다. 이후 도농직거래조직인 ‘한살림’ 을 창립한다.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자생할 능력을 키우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협동운동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특히 그는 원주에서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살아 ‘원주에 살다간 예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장일순은) 유학적인 수양으로 몸을 다지신 분이고, 마치 금강석처럼 부서지지 않는 도덕을 실현한 분이죠. (…) 그래서 유학과의 관계를 밝혀야 그분이 보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어떤 쓰라린 일들이 생겨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 금강석과 같은 도덕을 체현하고 있었다, 이렇게 봐야 합니다. 또 하나는 철저한 가톨릭 정신을 실현하신 분이죠. 세 번째가 해월 정신이 드러난 시기입니다. 드러났다기보다는 나중에 해월과 당신 생각을 일치시킨 것이죠. 그전엔 간디와 비노바 바베의 영향도 컸어요. 이처럼 어떤 도덕적인 정신사의 맥을 이어가면서도 또 철저히 운동정치가입니다.”

고등학생 때부터 장일순을 따른 김지하에 따르면, 장일순은 정치가로서, 도덕가와 교육자로서 또 예술가요 서예가로서 복합적이고 총체적인 인물로 봐야 한다. 그런데 장일순의 도덕정치가로서 정치의 목표는 처음에는 민중운동이었다. 이를 거쳐 후기로 가서 해월사상에 이르게 되고 여기서 생명운동과 한살림운동으로 나아가게 된다. 장일순이 해월을 통해서 태생적인 유학을 넘어서게 된다고 보면서, 가톨릭도 예수의 가톨릭은 좋아하면서도 ‘바리사이식 가톨릭’은 넘어섰으며, 단편적인 종교적 신념이 아니라 유영모나 함석헌처럼 장일순을 종교를 통합해 사상을 펼친 인물로 보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한국사회과학계의 대표적 지성이라 할 수 있는 리영희도 장일순과 각별한 관계였다. 리영희는 장일순의 집의 모습과 사는 모양이 자연 그 자체였기에, 그의 생명사상은 한 인간의 밑바닥에 깔린 본연의 모습이라고 본다고 했다. ‘밑바닥에 깔린 본연의 모습’이 타고난 것이라기보다는 어려서부터 생태적인 환경에 노출되었고, 그런 삶을 살아왔던 선조들의 삶의 양식에서 길러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의 말에서도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장일순은 1989년 10월 한살림 창립기념 강연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마 서너살 때인 것 같은데 명절이 되면 별식이 많잖아요. 이것저것 먹다 보면 배탈이 나지요. 요즘에야 뒷간이 집안에 다 있지만 그때는 30~40미터 떨어진 곳에나 대개 있었습니다. 자꾸 칭얼거리면 어른들이 등불을 켜서 변소 앞까지 데려다주면서 ‘저기 닭장 앞에 가서 구부렁 구부렁 큰절을 세 번해라. 밤똥은 닭이나 누지 사람도 밤똥을 누느냐’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면 ‘밤똥은 닭이나 누지 사람도 밤똥을 누느냐’ 하면서 세 번 큰절을 하고 후련하게 방으로 들어와 잠을 잔단 말이에요. 그런 생활을 어려서 했지요. 그러니까 동심의 세계에서는 ‘내가 인간인데!’ 하고 잘났다는 생각이 없었다고요. 이 점에 있어서는 닭이 나보다 낫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또 사다리를 놓고 알을 끄집어내거나 새를 끄집어내는데, 그러다 보니 서툰 솜씨에 알도 깨뜨리고, 새를 서로 주무르다 보니 할딱거리고, 새가 할딱거리니까 죽을 것 같아서 살라고 똥구멍에 바람을 넣는단 말이에요. 그러면 새가 팔딱거려서 살 것 같은데 죽는단 말이야. 이런 짓을 꽤 했어요. 일상생활 속에 대단치도 않은 것 같던 일들이 그 안에 엄청난 이야기들이 다 있더란 말이에요.”

리영희 선생은 장일순을 두고 “사회에 밀접하면서도 사회에 매몰되지 않고, 인간 속에 있으면서 영향을 미치고 변화를 시키면서도 본인은 언제나 항상 그 밖에 있는 것 같은 사람” 이라고 했다. 무위당 장일순은 말 그대로 안에 있으면서도 밖에 있는 이였다. 흔히 말하는 ‘도인 생활’을 하는 사상가나 영성가가 없지 않지만, 장일순은 그러한 경지에 있으면서도 사회를, 그 진흙탕에서 떠나 본 적이 없다는 리영희의 평가는 장일순의 진면목을 파악하는 데 중요해 보인다. 도인일 수는 있지만 사회운동에 관심이 있는 경우가 드물고, 그 반대로 사회운동가이면서 도인 수준의 영성을 지닌 경우 또한 흔치 않기 때문이다. 장일순의 이런 면들은 그가 일구어낸 여러 일들의 이음새를 잇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계속)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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