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의 편견과 차별에 쫓겨난 한센인의 벗이 되어 –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유의배 신부
권은정(작가)
지리산으로 가는 등산객이면 누구나 들른다는 원지 버스 정류장에 내려서 택시를 탔다. 성심원은 10분 거리도 되지 않았다. 경호강 위로 다리가 놓이면서 가까운 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전에는 나환자촌 성심원을 세상으로부터 격리하는 아주 분명한 경계선이었던 강이다. 오랫동안 나룻배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강을 사이에 둔 두 세상의 거리는 정말 좁혀진 것일까? 시멘트 다리를 건너가면서 드는 생각이었다. 간간이 흩날리는 눈발 때문인지 성심원을 둘러싼 산과 하늘은 어쩐지 더 춥게 느껴졌다. 다른 계절은 아마 아름답지 않을까? 아무튼 먼먼 나라에서 온 선교사 유의배 신부는 거의 반평생을 이 깊은 산골에서 살고 있다. 참 긴 세월이 아닌가!
한센인과의 만남, 하느님이 주신 은총
유의배(Louis Maria Uribe, 71세) 신부가 한국에 온 것은 1976년. 서른 살 젊은 나이에 이 땅에 왔던 스페인 신부는 이제 완전히 할아버지가 되었다. 그와 마주 앉으니 말문이 막혔다. 말보다는 실천이 앞선 삶을 평생 살아온 이에게 몇 마디 말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성심원 내 중증장애인 요양시설인 성심인애원에 개관한 지 한 달 된 ‘성심원 역사관’이 있다. 이곳에서 성심원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성심원은 1958년에 생겼고 유의배 신부가 성심원에 들어온 해는 1980년이다.
“그때 제가 진주본당에 있었는데 이곳에 잠시 일을 도와주러 왔다가 지금까지 머물게 되었어요. 처음에 저와 함께 있었던 다른 분들은 다 돌아가셨어요.”
그가 한국에 왔을 때는 스페인 출신 선교사가 10명 정도 먼저 와 있었다고 한다. 프란치스코회(1997년 작은형제회로 명칭 변경)는 1937년 한국에 진출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추방되거나 철수하여, 1955년부터 다시 수도회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수도회에서 해외 여러 관구에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면서, 1964년 스페인 칸타브리아 관구 형제 10명이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유 신부는 선배 선교사들의 근황을 간단히 전했다.
“스페인 북쪽 바스크 지방에서 오신 분들이었어요. 그중에 한 분은 돌아가시고, 한 분은 미국 가셨고, 또 한 분은 아파서 본국으로 돌아가셨죠. 지금 한국에는 6명 남아 있어요. 대부분 서울 쪽에 계셔요. 서울에 세 분, 인천에 한 분이 있습니다. 강릉에도 한 분 계시는데, 그분은 여기처럼 장애인 시설인 ‘애지람’에 계시죠.”
그의 고향은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다. 1937년 스페인 내란 중 파시스트 프랑코를 지원하는 독일의 무차별 폭격으로 도시주민 7,000여 명 가운데 3,000여 명이 학살당했다. 피카소는 작품 〈게르니카〉로 나치의 잔혹상을 세계에 고발했다.
유 신부는 프란치스코회 사제인 삼촌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사제를 꿈꿨다. 16살 때 프란치스코회에 들어가 바스크 지방 아란차수 신학대학교를 졸업하면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의 꿈은 한국에 오는 것이었지만, 당시 관구장은 그를 먼저 다른 곳으로 보내고 싶어했다. 파라과이의 한센인(나환자) 마을로 파견할 예정이었다.
“파라과이 나환자 마을로 파견받아서 갈 준비를 했죠. 그곳에 가기 전에 스페인의 나환자 병원에 가서 피정도 하고, 환자분들을 만나보면서 미리 시간을 보냈어요. 그때 병원에서 일하는 수녀님들에게 도움도 받았습니다.”
유 신부는 스페인 한센병원에서 처음 한센인들을 만났을 때의 느낌을 이렇게 표현한다.
“아! 좋았어요. 나환자 병원에 갔을 때 제 안에 어떤 마음이 생겼어요. 구약에서는 천형(天刑)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그분들을 보면서 어떤 끌림이 있었어요. 특히 그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 수녀님을 보면서 크게 느꼈지요. 그 수녀님은 나이가 좀 있으셨는데, 헤네시 코냑을 생산하는 주조회사, 그 부잣집 딸이셨어요. 그런데 얼마나 부드럽게 나환자들을 돌보시는지……. 그 수녀님을 생각할 때면 마더 데레사가 생각나요. 그곳에서 일주일 동안 지냈는데, 저에게 나병에 관해 하나하나 가르쳐주시고 나환자들 돌보는 모습을 보여주셨죠. 나중에 파라과이에 가서 어떻게 생활해야 할지, 그런 준비를 거기서 다 할 수 있었지요.”
그러나 그는 파라과이 대신 볼리비아로 가게 되어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2년간 지내다가, 1976년에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한국에서 한센인을 돌보겠다는 계획은 따로 없었다. 프란치스코회에서 운영하는 서울 명도원에서 2년 동안 한국어를 배운 뒤 강릉, 주문진, 제주도, 진주 등에서 약 2년간 사목활동을 했다. 진주본당에 있던 중에 우연히 산청으로 오게 되었다.
“저는 이곳에 나환자촌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어요. 그런데 갑자기 도와줄 일이 있다고 해서 왔는데, 와서 나환자들을 보고나서야 ‘아, 하느님께서 나에게 이 일을 주셨구나!’ 그렇게 생각했어요.”
유 신부는 한센인을 돌보는 일을 하면서 사부 프란치스코 성인을 떠올린다고 말한다.
“우리 성 프란치스코 사부님을 생각하면 더 매력을 느낍니다. 그분이 한센인들 만나면서 회개한 삶으로 들어섰기 때문에 나도 항상 그렇게 살고 싶다는 이상이 있었는데, 그런 은총을 하느님께서 저에게 주신 거죠.”
세상 밖으로 밀려난 한센인 신자들 위해 세워진 성심원
한센인의 정착촌인 산청 성심원의 시작은 이탈리아 출신 프란치스코회 형제들로부터 비롯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다시 수도회를 재건하던 시기에 중국에서 선교하다가 추방된 이탈리아 출신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진주를 중심으로 활발한 사목활동을 시작했다.
1955년 경남지역 전교를 책임지게 된 주 꼰스탄시오(Constanzo Giupponi) 신부가 진주본당 주임으로 있으면서 성심원을 설립하게 되었다. 당시 진주지역 한센인이 모여 살던 구생원의 원생은 개신교를 믿었는데, 이들 중 천주교 신자가 되고 싶은 이들에게 주 신부는 교리를 가르치고 1958년에 첫 세례를 주었다. 이들은 따로 산청으로 이주하여 마을을 만들고 1959년 6월 예수성심성월에 마을이름을 정하며 ‘성심원’이라 이름지었다.
한센인을 구제하는 구라사업(救癩事業)이 한국 천주교회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해방 이후 주로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서였다. 메리놀외방전교회 캐롤 안(Carroll, G.) 주교가 서울, 경기도 지역에서 구라사업을 처음 시작했고, 1952년 서울교구 방인사제인 이경재 신부가 한국 천주교 최초의 구라사업기관인 성라자로원 초대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때부터 각 교구에서 공동으로 구라사업을 시작하여 경상도 지역에서는 프란치스코회가 산청 성심인애병원과 가톨릭피부과의원(칠곡)을 세웠고, 베네딕토회가 성심의원(성주)과 대구 파티마병원을, 벨기에 다미안 재단이 영주 다미안의원을 각각 설립하여 구라사업을 맡았다.
주 신부와 정 시모네(Simone Arnaldi) 신부를 비롯해 이탈리아 출신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은 성심원에서 한센인을 돌보며 그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노력을 한순간도 아끼지 않았다.
“이탈리아 프란치스코 형제들이 거제도, 남해, 산청, 삼천포, 진주 이쪽으로 오셨는데, 당시 진주시에는 중앙본당 하나밖에 없었어요. 주 신부님이 거제도에서 시작하셨는데 진주본당으로 오셨어요.”
부부 사이, 부모자식 사이도 한센인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온 세상에서 밀려난 그들의 마음은 육신만큼이나 뭉그러져 있었다. 그들이 서로 마음을 모아 마을을 만들어 살기까지 얼마나 어려웠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은 한센인들과 똑같이 맨바닥에 짚을 깔고 잠을 잤다. 그들보다 더 나은 밥을 먹지 않았다. 낮에는 일하고 밤이면 본국의 은인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긴 편지를 쓰느라 잠을 설쳤다. 언어의 어려움도 기도의 힘으로 극복했다. 중국에서 사제 서품을 받아 중국어를 아주 잘했지만 한국어는 전혀 몰랐던 시모네 신부는 환자들과 함께 건축 일을 하였는데, ‘빨리빨리’라는 말은 유창하게 했다고 한다.
성심원 마을은 생길 때부터 특히 이탈리아 신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미국, 독일, 오스트리아 등 세계 각지에서 도움을 받았고 그 뒤에 우리 정부와 지역 단체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어엿한 공동체로 성장할 때까지 숨은 노고와 피땀은 오직 하느님만이 아실 일이다.
세상 밖으로 밀려난 한센인 신자들 위해 세워진 성심원
한센인의 정착촌인 산청 성심원의 시작은 이탈리아 출신 프란치스코회 형제들로부터 비롯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다시 수도회를 재건하던 시기에 중국에서 선교하다가 추방된 이탈리아 출신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진주를 중심으로 활발한 사목활동을 시작했다.
1955년 경남지역 전교를 책임지게 된 주 꼰스탄시오(Constanzo Giupponi) 신부가 진주본당 주임으로 있으면서 성심원을 설립하게 되었다. 당시 진주지역 한센인이 모여 살던 구생원의 원생은 개신교를 믿었는데, 이들 중 천주교 신자가 되고 싶은 이들에게 주 신부는 교리를 가르치고 1958년에 첫 세례를 주었다. 이들은 따로 산청으로 이주하여 마을을 만들고 1959년 6월 예수성심성월에 마을이름을 정하며 ‘성심원’이라 이름지었다.
한센인을 구제하는 구라사업(救癩事業)이 한국 천주교회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해방 이후 주로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서였다. 메리놀외방전교회 캐롤 안(Carroll, G.) 주교가 서울, 경기도 지역에서 구라사업을 처음 시작했고, 1952년 서울교구 방인사제인 이경재 신부가 한국 천주교 최초의 구라사업기관인 성라자로원 초대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때부터 각 교구에서 공동으로 구라사업을 시작하여 경상도 지역에서는 프란치스코회가 산청 성심인애병원과 가톨릭피부과의원(칠곡)을 세웠고, 베네딕토회가 성심의원(성주)과 대구 파티마병원을, 벨기에 다미안 재단이 영주 다미안의원을 각각 설립하여 구라사업을 맡았다.
주 신부와 정 시모네(Simone Arnaldi) 신부를 비롯해 이탈리아 출신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은 성심원에서 한센인을 돌보며 그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노력을 한순간도 아끼지 않았다.
“이탈리아 프란치스코 형제들이 거제도, 남해, 산청, 삼천포, 진주 이쪽으로 오셨는데, 당시 진주시에는 중앙본당 하나밖에 없었어요. 주 신부님이 거제도에서 시작하셨는데 진주본당으로 오셨어요.”
부부 사이, 부모자식 사이도 한센인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온 세상에서 밀려난 그들의 마음은 육신만큼이나 뭉그러져 있었다. 그들이 서로 마음을 모아 마을을 만들어 살기까지 얼마나 어려웠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은 한센인들과 똑같이 맨바닥에 짚을 깔고 잠을 잤다. 그들보다 더 나은 밥을 먹지 않았다. 낮에는 일하고 밤이면 본국의 은인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긴 편지를 쓰느라 잠을 설쳤다. 언어의 어려움도 기도의 힘으로 극복했다. 중국에서 사제 서품을 받아 중국어를 아주 잘했지만 한국어는 전혀 몰랐던 시모네 신부는 환자들과 함께 건축 일을 하였는데, ‘빨리빨리’라는 말은 유창하게 했다고 한다.
성심원 마을은 생길 때부터 특히 이탈리아 신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미국, 독일, 오스트리아 등 세계 각지에서 도움을 받았고 그 뒤에 우리 정부와 지역 단체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어엿한 공동체로 성장할 때까지 숨은 노고와 피땀은 오직 하느님만이 아실 일이다.
선교, 고통받는 이들의 곁에 머무는 사명
깊고 깊은 상처를 안고 사는 한센인에게 유 신부는 가장 큰 위로자이며 동행인이었다. 유 신부는 언제나 그들의 곁을 지켜왔다. 성심원 사람들은 유 신부가 어디로 가게 될까 봐 늘 그게 걱정이다.
“제게 늘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신부님, 우리는 모두에게 버림받은 사람들이에요. 신부님은 우리를 버리지 마세요.’ 그래서 저는 늘 이렇게 대답해줍니다. 관구장께서 저더러 어디 가라고 할 때까지는 이곳에 있을 거라고요.”
유 신부는 한센인의 죽음까지도 지켜주었다. 성심원에서 세상을 떠난 한센인이 오래전에 500여 명을 훨씬 넘었고, 다들 고령이니 돌아가시는 분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 가운데 유 신부가 직접 염을 해서 마지막 길을 떠나보낸 이가 150명이 넘는다. 성심원에 그 일을 맡아하던 이가 있었지만, 어느 날 한밤중에 갑자기 임종을 맞은 이가 생기면서 유 신부는 자연스레 장례 일도 맡아서 하게 되었다.
“제가 기쁘게 할 수 있었어요. 그분들은 제가 다 아는 사람들이니까요. 죽고 난 후 몸을 보면서 정말 살아 있을 때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 수 있었어요. 제가 이렇게 말해줘요. ‘할아버지, 정말 고생 많이 하셨다. 진짜!’ 다리가 없거나 팔 없는 분들도 있지요. 마지막 그 순간에 아직 살아 있는 사람처럼 대해주지요. 어떤 때는 안아주고 다시 옷 입혀주고 그랬어요. 임종할 때는 몸이 굳은 분들의 팔다리를 펴기 힘들면 ‘할아버지 미안해요, 할아버지 미안해요’ 그러면서 몸을 폈어요.”
한센인의 마지막 길을 돌볼 때 유 신부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생각한다고 했다.
“돌아가시는 예수님 모시는 것처럼 그런 마음으로 대했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성모님이 안아주시는 그 모습 떠올리면서요. 그런 마음으로 묵상하면서 그분들을 보내드리니 저한테는 너무나 좋은 시간이었어요.”
어쩌면 그는 오로지 예수 성심을 닮기 위해 이곳에서 사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통 속에서 사는 모든 사람에게서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한다. 그들과 함께 그 고통을 견뎌낼 때 그는 힘을 얻는다.
바로 얼마 전부터 가까운 장례식장에서 장례절차를 다 맡아서 하면서 유 신부의 일이 덜어졌다. 그러나 유 신부는 마지막 길을 떠나는 이들이 좀 더 인간다운 예우를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요즘은 다들 전문적으로 장례절차를 배워서 염을 하는 것을 보았는데, 인간적 관계가 없어진 것 같아 많이 서운했어요. 기술적으로 아름답게 하지만, 그 전과는 좀 달라졌어요. 그때부터 제가 아예 안 하게 되었어요. 복잡해지고 사람이 많아지면서 정신이 없어졌어요. 저는 마지막 가는 길은 좀 조용하고 경건한 것이 낫다고 생각해요. 시간에 쫓기듯이 하는 거 말고요.”
수십 년간 한센인과 같이 지내는 그를 보고 혹시 전염의 가능성은 없는지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다. 특히 초기에는 그랬다. 유 신부는 그게 하느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늘 말했다.
“그렇지만 과학적으로 볼 때 전염의 가능성이 없어요. 음성이라 환자들과 아무리 접촉해도 전염 안 됩니다. 어떨 때는 제가 너무 열심한 마음에서 차라리 전염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지요. 그렇게 되면 예수님과 비슷하게 되니 얼마나 좋아요! 아니 더 유명한 사람이 될 수 있어요. 하하하!”
유 신부가 장난기 어린 눈으로 크게 웃는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때 서울교구 구라사업의 전임자로 임명되어 나환자를 위해 평생을 바쳤던 이경재 신부는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래 지금까지 더 힘든 곳과 더 어렵고 희생이 요구되는 일에는 방인 신부보다 외국인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우리 방인 사제단이 복음정신으로 살려고 한다면, 그런 일에 스스로 무관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서양에서 온 선교사들은 특히 한국의 구라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비 오는 날 사제관 계단에 모여 웅크리고 있는 한센인을 외국인 선교사들은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견하시면서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나병환자들을 깨끗이 낫게 하라고 지시하셨다. 유 신부도 예수님의 그 말씀을 따라 살아왔다.
한센병은 이제 완치가 가능해져 점점 사라져가는 질병이 되었다. 이곳 성심원에도 한센인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제 유 신부는 발걸음을 가볍게 해서 바깥세상으로 나가도 되지 않을까?
“하느님께서 주시는 대로 하는 거죠. 이제 저에게 어디로 가고 싶은지 물어보지 않지만, 저는 항상 기다려요. 언제 나가라고 할지, 나가면 어디서 무얼 할 것인지 생각해봅니다. 그 일이 무엇이든 기계처럼 하지 말고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해야 합니다. 병자들과 함께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합니다. 그분들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시사철 맨발로 다니는 유 신부의 발을 보면 그가 말보다는 행동으로 사랑을 보여준 참사람임을 알 수 있다. 한센인의 육신은 물론 마음마저 낫게 해준 유의배 신부는 예수님의 제자로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선교사로 그의 사명은 지금 여기에서 완성되었다!
추가설명
나균(癩菌)으로 감염되는 만성 전염성 난치병인 나병은 문둥병, ‘천형병(天刑病)’이라고도 불렀다. 성경이나 학술 분야에서는 ‘나병’이라고 부르지만, 이 용어가 편견과 차별적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에 최근에는 나병균을 발견한 노르웨이 의학자 한센(Hansen, G. H. A.)의 이름을 따서 ‘한센병’이라고 부른다. 이 글에서는 화자의 표현을 존중하여, 두 용어를 혼용한다. (편집자 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