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와 상생, 제주 4·3의 치유를 위해 – 제주 4·3 70주년 특별위원회 위원장 문창우 주교

 

편집부

 

올해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제주 4·3 70주년을 계기로 분단의 종식과 민족 화합을 위한 길을 모색하는 다양한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제주 4·3 70주년 특별위원회 위원장인 제주교구 부교구장 문창우 주교를 만났다. 문 주교는 제주 출신 첫 주교로, 4·3을 신학적으로 다룬 첫 번째 시도로 평가받는 「4·3에 대한 신학적 고찰」이라는 논문을 1999년에 발표하기도 했다.

 

제주 4·3과의 인연

Q.문 주교님은 이미 20여 년 전에 제주 4·3과 관련한 논문을 발표하시는 등 이 문제에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이 역사에 특별한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있으신지요?

%eb%ac%b8%ec%b0%bd%ec%9a%b0-%ec%a1%b0%ea%b5%90제가 논문으로 이 문제를 다룬 것 1999년인데, 당시 제주 4·3 50주년을 맞아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활발했던 때였습니다. 제주의 천주교, 성공회, 개신교 등 종교단체들도 희년 정신에 비춰 제주 4·3을 학술적으로 다루는 심포지엄을 진행했는데, 그때 발표하려고 쓴 논문입니다.

사실 저희 어머니가 4·3을 그린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의 배경이 된 북촌마을 출신입니다. 소설에서 군인들이 학교 운동장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살릴 사람과 죽일 사람을 가르던 그 자리에 저희 어머니와 어머니 동생들도 함께 계셨어요. 제가 어렸을 때 부모님께 그 이야기를 들었는데, 제주 4·3의 진실에 관해서라기보다 그 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은 사건이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 사건을 더 깊이 고민한 것은 제가 대학에 가서입니다. 저는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시기에 대학을 다녔는데, 제주에서는 민주화 시위 때마다 4·3에 대한 문제 제기가 계속 있었습니다. 당시 총여학생회 회장이 “4·3을 아는가?”라는 대자보를 학내에 붙였는데, 학내에 주둔하던 사복경찰이 그 대자보를 뜯어내고 그 학생을 구속했습니다. 그때 이 사건이 도대체 얼마나 엄청난 사건이길래 이러나 싶어 궁금했습니다. 저는 당시 가톨릭학생회 회장이었데, 가톨릭학생회 학생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바라보며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깊이 고민했어요. 그러면서 해방신학과 신앙에 관한 글을 읽으며 의식을 다져나갔죠. 또 저 개인적으로 포콜라레 피정에 참여하면서 영성운동도 했는데, 신앙과 사회적 참여라는 두 가지가 동전의 양면처럼 여겨져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이탈리아 포콜라레 영성학교에 가서 1년 반 동안 저의 성소 식별을 하면서, 제가 경험한 시대적 아픔과 어려움에 동반하는 사제가 되겠다고 결심했어요.

제가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사회적 갈등이 완화되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4·3연구소가 설립되었습니다. 신학생 때 4·3연구소 회원에 가입해 이 문제에 계속 관심을 가졌는데, 사제가 되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관련된 집회나 활동을 했습니다. 4·3연구소 잡지에 글도 쓰고, 그런 와중에 1999년 심포지엄에서 발표도 한 거지요. 그에 앞서 제가 신학교에서 석사 논문으로 「한과 화해: 제주민중의 신화에 나타난 한과 복음화 과제」(1996)를 쓰면서 그 안에서 부분적이지만 4·3을 다루는 시도를 하기는 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만난 좋은 스승인 이제민 신부님을 통해 신학적 방법론을 많이 배웠습니다. 덕분에 예전부터 고민했던 4·3을 다룰 수 있는 신학적 방법론에 대한 이해가 생겼지요.

Q.그 신학적 성찰 내용을 조금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논문을 쓰면서 신학이란 무엇일까 생각했어요. 저는 신학이란 하느님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는데,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의 역사로 들어오셨기 때문에 하느님의 이야기는 인간과 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겪는 고통과 슬픔은 하느님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신학은 하늘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이 엮어낸 모든 이야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역사 속에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 예를 들면 20세기 유대인 학살이나 4·3과 같은 사건이 왜 일어났을까, 당시 사람들의 울부짖음에 하느님은 어디 계셨는지 질문했습니다. 이에 대해 여러 해방신학자가 고난 속에서 하느님을 성찰한 글도 썼고, 교회 안에서도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계기로 신학의 초점이 달라지기도 했습니다.

본래 하느님께 향하는 신앙이 오랜 교회의 전통인데, 그 안을 깊게 들여다보니 하느님의 주도권은 절대 변하지 않지만, 이를 상대하는 인간의 관심사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끊임없이 변했다는 점을 확인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관심사인데, 과거 전통신학에는 이분법적으로 하느님과 인간을 분리하고, 선과 악을 분리해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해방신학이나 제3세계 신학이라든지 공의회 이후의 새로운 신학에서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만 선택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예언자와 결정적으로 예수님을 통해 만민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고, 이는 사도들과 수많은 선교사, 그리고 교회의 역사를 통해 오늘까지도 우리를 초대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제주에서 겪는 4·3도 이념적 틀로 해석하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제주 사람들에게 주신 이정표로 여겨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를 ‘제주신학’이라고 말하는데, 이런 표현은 거의 제가 유일하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저는 정말 제주신학, 수원신학, 인천신학 등 각각의 신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2013년에 제주교구가 주최한 제주 4·3 심포지엄 자료집이 제주교구 홈페이지 자료실에 있으니, 그걸 보시면 되겠습니다.

 

제주 4.3을 기억한다는 의미

Q.제주 4.3은 오랜 시간 묻힌 사건이었습니다. 지금도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섞여 있는 복잡한 상황에서, 여전히 진상규명 작업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이런 곤혹스러움을 무릅쓰고 진실을 추구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지요?

우리는 학교에서 근현대사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8·15해방과 이승만 정권 수립 전후사 등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아 현대사를 펼치는 데 아직도 이념적 대립이 걸림돌입니다. 특히 제주 4·3은 더 복잡합니다. 제주도에서는 4·3과 관련해서는 여야가 없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해서 처벌하는 수준에 머문다면 아마 이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못할 것입니다.

4.3특별법의 전체적 기조는 화해와 상생입니다. 물론 가해자와 피해자는 있지만, 지금 가해자를 밝혀내서 그들의 잘못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당시 4·3에서는 사실 가해자와 피해자 할 것 없이 궁극적으로 모두 피해자입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어떻게 볼지 모르지만, 적어도 제주도 안에서는 4·3을 보는 기조 자체가 용서와 화해이기 때문에 특별법 안에서 화해하자는 취지입니다.

제주 4.3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이념적 프레임과 4.3의 진실이 상당히 뒤섞여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폭동’으로, 어떤 사람은 ‘항쟁’으로, 어떤 사람은 ‘학살’로 바라봅니다. 화해와 상생의 담론에서는 이 사건을 양민학살의 문제로 봅니다. 그런 시각으로 접근하니, 여야나 이념 대립을 떠나서 사람들의 피해의식을 모을 수 있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 용서와 화해를 통해 평화의 여정으로 가려고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진실을 규명하려 하는데, 저는 제주도민이 겪은 4·3의 아픔을 함께한다는 점에서 교회가 동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신학적 성찰 방법론은 추상적 논리가 아니라, 정말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해주신 복음의 기쁜 소식이어야 합니다. 4·3의 진실과 이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공감하는 것과 더불어 치유가 필요합니다. 배상과 명예회복도 중요하지만, 트라우마는 완전히 치유되지 않습니다. 국가가, 대통령이 사과했다고 해서 치유되지 않습니다. 온전한 치유와 해방, 부활로 나아가려면 하느님의 섭리와 인간 현실의 만남 안에서 치유의 작업이 이뤄져야 합니다. 저희의 임무가 그런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요.

전통신학에서는 오랫동안 이원론적 사고로 피안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구분하면서, 세상 일에 개입하는 것을 꺼렸습니다. 하지만 한 인간이 일정한 시기가 되면 성장하고 도약하듯, 우리의 신앙도 하느님께 온전한 믿음을 드리는 것은 변치 않지만 그 이해와 실천도 성장해야 합니다.

앞서 신학에 대해 말씀드렸던 것처럼,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 세상에 펼치신 구원계획에 우리가 동참한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인간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관심사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신학의 본질은 그대로지만, 하느님께서 당신의 창조와 재창조를 해나가는 과정에 우리가 동참하도록 우리에게 끊임없이 주시는 시간 안에서 신앙인이 시대적 징표를 읽어내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의 장소는 결코 하늘나라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아픔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제주 4·3 70주년을 맞으면서, 당시를 경험하고 증언할 수 있는 분들이 점점 돌아가시고 있어서 그분들이 살아계실 때 작업을 본격적으로 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습니다. 4·3 70주년도 결국 4·3의 아픔에 연대할 뿐 아니라 하느님이 바라고 원하시는 구원의 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이 하느님의 나라고 구원의 정점이라면, 4·3도 단지 배상과 진상규명 정도가 아니라 온전히 화해와 상생의 여정 안에서 참된 평화의 현실들을 마주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주도와 가톨릭, 지역에 뿌리내린 교회

Q.제주 천주교의 초창기 역사를 생각하면 지역사회에서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고, 무게감 있게 자리할 수 있게 된 과정이 궁금하기도 합니다.

사실 신축교안(辛丑敎案)의 역사에서 보듯 초창기 제주도에서 지역 사람들과 천주교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이후에 온 선교사들이 이를 수습하느라 초창기에 참 고생이 많았습니다. 4·3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제주도가 많이 피폐해졌기 때문에, 이시돌 목장을 중심으로 선교사들이 농촌개발과 계몽운동 등에 앞장서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도우면서 점점 긍정적으로 바뀌었습니다. 1999년도가 제주교구 100주년이었는데, 그때 심포지엄을 하면서 제가 던진 질문은 “교회는 제주를 위해 죽었는가?”였습니다. 그 질문은 교회가 제주를 위해서 밀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에서 ‘문화와의 만남’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가톨릭 문화를 상위문화로 보지 않고 동등하게 보면서 다른 문화를 존중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제주도 문화를 존중하지 않은 초창기의 선교방식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그동안 교회가 제주도민에게 용서를 청하고 사과한 적이 없었는데, 제가 그 심포지엄에서 논문으로나마 사과를 청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향토사학자들과 화해선언문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제주교구가 토착화 측면에서 잘하는 점도 있습니다. 제주는 어느 지역보다 장례문화가 중시됩니다. 워낙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도 많아서, 제주에서 누군가 돌아가시면 그 한을 동네 사람들이 풀어주는 공동체 문화가 살아 있어 동네 전체가 조문합니다. 이런 문화를 존중하면서 교회도 누가 돌아가시면 사제들이 장례미사뿐 아니라 조문 가서 오랫동안 기도하고, 입관, 하관 등에 정성껏 참여합니다.

전반적으로 한국사회의 민주화 과정에서 천주교가 긍정적으로 기여한 부분 때문에 제주에서도 교회가 그렇게 평가받는 부분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강우일 주교님께서 제주에 교구장으로 오셔서 이곳 시민들과 더불어 많은 역할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지역에서 교회의 위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다른 종교가 주로 자기의 신앙과 종교 내부의 사안에 집중할 때, 우리는 오늘 우리가 사는 제주의 생태, 강정마을 문제와 같은 구체적 현실문제를 신학적으로 바라보고 연대하는 데 큰 비중을 두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주에서 천주교회가 단지 내적이고 추상적인 자기 신앙에 머물지 않고 우리 삶의 현실 안에서 성찰과 반성을 하였고, 그 때문에 많은 사람이 천주교에 입교했습니다. 지난 성탄에도 교구장님께서 북한 문제를 비롯해 우리나라의 전쟁 위기 상황을 우려하는 성탄메시지를 발표하셨는데, 지역 언론에서 자세히 보도했습니다. 자랑으로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깨어 있는 역할을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는 겁니다. 세상을 향해서 끊임없이 깨어 있는 작업이 우리 신앙인의 사회를 향한 신앙적 실천에서 가장 큰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주 4·3과 우리의 신앙

Q.부활대축일 주간에 맞는 이번 4.3 70주년을 제주교구민뿐 아니라 모든 신자가 어떻게 새겨볼 수 있을까요?

올해 제주 4·3 70주년을 맞아 제주교구뿐 아니라 주교회의 차원에서 여러 심포지엄이나 행사 등을 기획했습니다. 이번 부활담화문도 이 주제를 다룰 것이고, 또 교황님께 특별 메시지도 청했습니다. 4·3이 70주년을 맞았지만, 여전히 많은 분이 잘 모릅니다. 기본적으로 이를 알리고 이해하는 시간이 되면 좋겠고, 더 나아가 4·3의 아픔과 상처가 결국 우리 주변에 있는 이웃의 아픔과 상처라는 것을 깨닫고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 복음적 행동이라는 점을 인식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아픈 이들과 함께 하는 삶 안에서 기쁜 소식으로 오신 것처럼, 교회는 4·3을 단지 역사적 사건으로 이야기하고 공감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하느님께서 4·3 70주년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부활의 의미를 공감하는 한 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4·3뿐만 아니라 한국근현대사에서 발생한 5·18 같은 역사를 비롯해, 이 시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시대의 징표를 확인하고 동참하는 것이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가져야 하는 치유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4·3을 특별히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상적인 평화운동도 필요합니다. 여전히 진실과 화해를 추구하는 현장이 많습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우리가 관심을 갖고 신앙의 언어로 풀어가야 합니다. 이건 정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사명감 안에서 풀어야 할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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