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 평신도 교양 – 새로운 인간형의 천주교인

주원준

새로운 인간형의 천주교인

– 새로운 시대, 평신도 교양 <10>

이번 글부터 ‘세속의’ 인문학적 성과를 신학적으로 성찰하려고 한다. 국내 인문학자들의 성과에 기대어 한국 가톨릭의 정체성을 가늠해 보려는 것이다. 그렇게 3회를 보내면, 오랜 여정의 1단계를 비로소 마칠 수 있을 것이다.

4번째 책의 백성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우리 교회의 큰 특징은 무엇인가? 바로 선교사 없이 시작되었다는 점을 놓칠 수 없다. 이는 세계에서 유일한 것으로서, 올해 방한하신 교종 프란치스코도 다음과 같이 확인해 주셨다.

하느님의 신비로운 섭리 안에서, 한국 땅에 닿게 된 그리스도교 신앙은 선교사들을 통해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민족,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통해 이 땅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시복식 미사 강론

하지만 신앙의 선조들은 무(無)로부터 깨달은 것이 아니었다. 가장 먼저 도달한 것은 ‘책’이었다. 책을 읽고 스스로 깨우쳐 신앙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 일이 세계 교회사에 유래가 없다는 사실은 이미 그 당시에 그들도 알고 있었다. 아래 1811년의 글은 위 2014년 강론과 정확히 같은 인식을 보여준다.

선교사가 전한 것이 아니라 글을 읽어 도를 찾은 것은 우리 조선밖에 없습니다.

– 『동국교우상교황서』(1811년, 대만 보인대학본)

이렇게 ‘책을 통해’ 신앙이 시작된 교회라는 점에서, 우리나라 가톨릭교회 신자들을 ‘4번째 책의 백성’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본디 ‘책의 백성’(People of Book)이라는 말은 쿠란에 나오는 용어로서, 무슬림, 그리스도교, 유다교의 세 백성을 가리킨다. 거룩한 책을 통해 귀한 믿음을 전승하는 이 백성들에게 무슬림은 독특한 유대감을 지녔다(한국어 쿠란 번역의 ‘성서의 백성’도 이런 뉘앙스를 담고 있다). 물론 한국 가톨릭교회야 그리스도교 일부지만, 책을 통해 거룩한 진리를 깨닫고, 목숨 바쳐 지켰다는 독특한 역사 때문에 우리 자신을 ‘책의 백성’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면 이 땅의 하느님 백성은 역사적으로 4번째 책의 백성이 되는 셈이다.

새로운 인간형

‘4번째 책의 백성’이 그리스도교 역사 차원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의미하는 이름이라면, 한반도 역사 차원에서 우리의 독특한 점은 무엇일까? 정병설은 복자 이순이 루갈다의 편지와 생애를 연구한 글에서 이렇게 썼다.

천주교라는 새로운 종교와 사상의 세례를 받은 이순이는 이전의 한반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인간이었다. 새로운 인간형이 출현했다. 당연히 그가 쓴 글도 종전 한반도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 정병설, 『죽음을 넘어서 – 순교자 이순이의 옥중편지』(2014 민음사), 182쪽

성리학이라는 단일 이념으로 수백 년을 다스린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천주학쟁이’들은 분명 새로운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정병설은 아예 한반도 전체 역사에서 ‘새로운 인간형’이 출현했다고 보았다. 유불선 전승에서 나오지 않았던 새로운 종류라는 말이다. 과연 무엇이 새로웠을까? 조금 길지만 그의 말을 들어 보자.

이순이는 세상을 헌신짝처럼 보았다 (…) 물론 그 전에도 세상을 버리고 은둔한 사람이 없지 않았다. 세상에 실망해서 은둔한 학자도 있고 세상은 원래 허망한 것이라서 버린 스님도 있었다. 하지만 이순이는 그런 은둔자와는 달랐다. 마음속으로는 세상을 버렸지만 현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누구보다 세상을 잘 살려고 노력했다. 누구보다 성실한 삶을 살았다. (…) 또 막대한 유산의 상당부분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쓰겠다고 결심한 것도 그런 생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욕과 재물욕마저도 극복하면서 세상을 더 잘 살다 죽기를 바란 것이다. (…) 옛날에도 충효의 덕목을 위해 육체적 고통을 기꺼이 감내한 충신과 효자가 있었지만, 이순이처럼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끊임없이 기뻐하고 감사한 인간은 없었다. 모든 일이 영광이고 은총이고 기쁨이고 감사인 사람은 없었다. (…) 이순이과 같은 순교자의 목표의식은 뚜렷하고 강렬했다. 이처럼 강한 의지는 한국 역사에서 일찍이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정병설, 182-183쪽)

천주교 신자가 아닌 정병설의 이런 관찰과 해석은 평신도 신학자의 적극적인 성찰을 자극하기에 너무도 충분한 것이다. 우리는 과연 무엇이 새로운가? 지금도 우리 믿음은 한반도인의 정신에 어떤 새로운 것을 제시하는가? 우리 후손은 여전히 새로운 인간형으로 사는가? 혹시, 우리가 그런 새로운 종류의 후손이란 점을 알고나 있는가?

변방에 있는 중심

새로운 생각과 삶이 새로운 인간형을 만들었다. 그리스도교는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중심과 주변을 완전히 새롭게 정의하는 종류다. 교종 프란치스코에 따르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변방으로 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자신의 안위를 떠나 용기를 갖고 복음의 빛이 필요한 모든 ‘변방’으로 가라는 부르심을 따르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복음의 기쁨』20항)

인간사 지배 이데올로기가 다 그렇듯, 대개는 중심의 안락한 곳을 염원한다. 이 땅의 유교 문화는 그런 경향과 가치를 일관되고 강력하게 퍼뜨렸다. 입신양명은 긍정적 가치였고, ‘중심에 가까운 자리일수록’ 귀한 대접을 받았다. 과거에 급제한 자는 지방이 아니라 서울에 첫 직위를 받는 것이 좋았고, 그 중에서도 궁궐이면 더 좋았다. 임금에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도승지나 사간원의 벼슬은 가문 전체의 영광이었다. 이렇게 중심을 염원하는 사고방식은 지금도 여전하다. 서울의 본사 또는 중앙부처에 자리를 잡는 것을 월등히 선호한다. 재벌 총수나 대통령에서 가까운 서울 본사의 비서실이나 기획실, 청와대 비서실 등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이런 자리는 대개 성적이 좋거나(과거) 집안이 좋은(음서) 자들의 차지라는 점에서도 한반도는 그대로다.

이렇게 ‘만인이 중앙을 염원하는 문화’에서 변방과 현장은 천시된다. 만물이 중심을 향하는 해바라기의 문화는 세월호 참사에서도 극적으로 드러난다. 현장 또는 변방에서 발생한 사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일은 뒷전이었다. 국민은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라도 중앙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태도를 깊이 학습한 사람들이다. 현장에서는 사람이 죽어가도, 중앙의 지시가 오기 전까지 스스로 결정하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임진왜란이나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 이미 드러났던 안타까운 종류로서, 이 땅에서 전혀 새롭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주님의 시선은 정반대 방향을 향한다. 위 인용문에서 교종 프란치스코는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레미야와 예수의 가르침이 모두 일관되게 변방을 향하고 있음을 가르친다. 하느님은 가장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실 때, 팔레스티나의 가난한 작은 가정에 보내셨다. 가브리엘 천사는 변방의 작은 처녀에게 인류구원계획이 시작됨을 맨 처음 알렸다. 유교에도 사림과 은둔의 전통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변방으로 가라는 하느님의 명령은 산속에 들어가 내공을 길러 훗날을 도모하라는 말도, 세상을 비웃고 유유자적하라는 말도 아니었다. 바오로와 베드로가 그랬듯, 가장 중요한 이가 지금 최전선에서 직접 증거하며 기쁘게 살라는 것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참된 보화요, 영광이고 은총이고 감사할 일이라는 말이다. 참된 지도자는 중앙의 자리를 차지하는 자가 아니라, 공동체의 외곽에서 전체를 보는 시선과 설득력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종류의 권위였다.

이런 특성 때문에, ‘중앙을 염원하는 성직주의’는 한반도에서 두 가지 기억을 거스르는 것이 된다. 첫째, 보편적 복음을 거스른다. 둘째는 우리 정체성을 거스른다. 믿음의 조상이 제시한 새로운 인간형을 뒤로하고, 박해자의 문화에 스스로 투항하는 것이다.(계속)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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