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복음 –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배안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중 제 28주일, 10월 12일, 마태 22,1-14

처음에 이 본문을 읽으며, ‘헉!’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를 도대체 누구 들으라고 하신 얘기인가 궁금했습니다. 앞뒤를 읽어보니 ‘대제관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대상입니다. 고위성직자들과 사회지도층 정도인 듯합니다. 욕은 한마디도 없고 손에 칼은 안 들었지만 세 치 혀로 사람 잡으려고 작정한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나이 드신 어르신들, 점잖은 표정으로 서른 갓 넘은 예수를 보러 가셨겠지요. 건방져도 한참 건방진, 피도 안 마른 젊은 것 내버려뒀더니 안 되겠네, 혼나봐야 정신 차리지! 뭐 이런 굳은 결의를 하신 어르신들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이야기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 누구를 얘기하는지 아마 그분들은 많이 배우신 분들일 테니 잘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혹시나 못 알아들을까 봐 이야기 속 인물들도 그들과 비슷하게 높은 사람으로 해주는 눈치까지 갖추신 예수님, 읽다가 살짝 웃음이 나왔습니다.

결혼식은 예나 지금이나 큰 잔칫날이 맞습니다. 더군다나 임금 아들의 결혼식이니 더 했겠지요. 분명히 함께 기뻐해 주리라 믿었던 사람들을 초대했을 겁니다. 그러나 참석은커녕 자기 아랫사람의 목숨까지 앗아간 지인들은 너무 충격적입니다. 그들과 함께 한 지난 시간이 배신감을 넘어 분노로 변해버립니다. 철저한 응징을 마친 임금의 파격 행보는 계속됩니다. 성문을 활짝 열어 길거리 행인들을 결혼식 손님으로 초대합니다. 아들의 결혼식, 참 많은 사람이 결혼식에 초대되었습니다. 하지만 온전히 목숨을 부지하고 잔치를 즐긴 사람은 평소 임금을 볼 일이 거의 없을,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임금의 눈 밖에 난 자는 예상외로, 악인이 아닌 ‘혼인 잔치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악인일 것 같은 사람이, 하느님을 사랑하듯 내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이었나 봅니다. 이렇게 되면 도대체 선과 악의 기준이 무엇인가,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왜 예수님이 이 높으신 분들 앞에서 이렇게 독한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선과 악에 관해 가장 아는 것이 많고, 사람들에게 인사받으며 다녔을 그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내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종교, 나는 안 되지만 너는 그래도 괜찮고, 나는 그래도 되지만 너는 그러면 안 되는 삶을 사는 어른들……. 저렇게 나이 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일깨워주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인간의 지혜란 것 자체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나이가 들면 다 지혜롭고, 너그러워지고, 현명해지는 줄 알았습니다. 삶의 파고를 넘어선 사람의 묵직한 존재감,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을 때 바라볼 수 있는 어른들이 없는 사회는 불행합니다. 임금의 행동이 극단의 선택처럼 보였지만, 결국은 가장 중요한 게 뭘까 싶었습니다. 신자가 되어 보낸 긴 시간을 뒤돌아보고, 주일미사 못 가는 대신 평일 미사에 참석하려 애쓰지만 정작 그 시간에 나는 무엇을 위해 기도했으며, 내가 기도한 것이 내 언행에 변화를 주었는지. 나 지금이나 반면교사 노릇 충실히 하는 ‘높은 사람’들에게 원투펀치를 날리는 것 같은 속 시원한 비유로군! 하고 생각했다가, 이게 내 얘기구나까지 진도가 나가니 그 임금님 참 너무하다는 소리가 쏙 들어갔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자라,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사랑’하는 아이 둘을 낳아 키우고 있지만 저는 아직도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뭘까, 또 그렇게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삶은 어떤 것일까요?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모르고 헷갈리는 것이 더 많아지니 걱정입니다.

세월호 유족들, 군대에서 죽음을 선택한 아이들, 어른들의 문제로 태어나지도 못하는 아이들, 송전탑 때문에 고생하시는 어르신들, 강정에서 경찰에게 끌려나가는 신부님들과 수녀님들…. 저에게는 각각 다른 문제가 아니라 뭉뚱그려진 커다란, 하나의 똑같은 일로 다가옵니다. 제 페이스북에 지인이 댓글을 달았습니다. ‘나만 아니면 돼’가 시대정신이 된 것 같다고. 그것에서 저도 무관한가? 그렇지 않음을 알기에, 저 일들에 제 책임이 전혀 없다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존재감 없는 아줌마 한 명이 하루 단식했다고, 경기도 어느 소도시에서 서명 몇 개 받았다고, 미사 시간에 잊어먹지 않고 기도하려고 애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게 해서 달라지는 게 있어?

저는 그 임금님께, 일단은. 초대받은 사람은 맞는 것 같긴 합니다. 길가에서 부르신, 배 아무개이옵니다. 그렇다고 선택받은 여인도 아닙니다. 다만, 선택받은 것이라 착각하지 않고 이곳저곳에서 부르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놓칠까 봐 아등바등하는 아줌마입니다.

월간 <갈라진시대의 기쁜소식>2014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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